영원한 스승, '중대통령' 동산 스님

흠모 / 동산 스님의 제자 흥교 스님

2009-07-29     관리자

시냇물처럼 가늘게 흐르는 시골길을 따라 한참을 들어서니 이정표가 보인다. “용천사 → ” 허름한 시골 농가의 흙담벽 위에 낙서처럼 삐뚜름하게 쓰여진 글씨가 이집 저집 등에 기대어 용천사로 가는 길을 안내하고 있었다. 동산 스님 열반에 드신 지 44년. 오랜 세월 묻어둔 그리움의 흔적을 찾아가는 길인 것을 아는 듯 용인 용천사는 옛 사진처럼 정겹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서였을까. 돋보기를 내려놓으며 하얀 눈썹을 활짝 펼치며 지어보이는 흥교 스님의 미소는 더욱 눈이 부셔보였다.
“절은 한 번만 해. 많이 더웠지. 오느라 힘들었겠어. 여기가 찾기 참 어려워.” 범어사 전계대화상 흥교 스님은 그렇게 객을 맞이했다. “그래도 난 여기가 참 좋아. 50년 전에도 지금 같았어. 여기서 그 유명한 대강백 안진호 스님께 치문을 배웠거든.”
굳이 말을 고르느라 애쓰지 않도록, 굳이 예를 갖추느라 긴장하지 않도록 흥교 스님은 따뜻하고 밝고 넉넉하게 말문을 열어주었다.

▲ 동산 스님

닭이 백이면 봉이 하나다
 
“내가 출가를 결심한 도량은 고암 스님이 계시던 다보사였어. 참선하는 스님들을 보니까 정말 멋있어 보이더라구. 그런데 고암 스님이 나보고 범어사로 가라셔. 그곳에 동산 스님이 계신데 바로 그 스님이 ‘중대통령’이라는거야. 그러면서 편지를 들려서 나를 범어사로 보냈지. 광주에서 출발해 마산에서 하룻밤 자고 범어사에 도착하니까 해가 뉘엿뉘엿 지더라구. 그때 노란 가사장삼을 두른 스님이 내 앞을 지나가셔. 그래서 물었지. 동산 스님이 어디계시냐고. 그랬더니 청풍당으로 가보라고 하시데. 다음날 보니 그 어른이 바로 동산 스님이었지. 그게 우리 스님하고 나하고 첫 만남이야. 지금도 그 모습이 또렷해. 하하.”
처음 본 범어사는 가슴이 설렐 정도로 근사했다고 한다. 일주문도 어찌나 멋있어 보이던지 우리나라도 이런 곳이 있구나 싶었단다. 그리고 그때 보았던 동산 스님은 어린마음에도 첫눈에 ‘중대통령’이 맞구나 싶을 정도로 잘생기고 기품이 있어 보였다고 한다.
동산 스님은 용성 스님의 맏상좌이며 성철 스님의 은사이다. 계행이 철저했고 종정을 역임했던 당대 최고의 선지식으로 한국불교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걸승이다. 스승 용성 스님이 옥중에 계실 때는 그것이 죄스러워 한겨울에도 방에 불을 때지 않았을 정도로 지극한 제자였고, 대중을 위해서는 당신의 공양에 물을 부어 기꺼이 열 배 스무 배로 불려 나눠 먹었던 자비로운 스승이었다.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도 다시 불러 수행케 했던 동산 스님. 그래서 동산 스님의 상좌는 100여 명이 넘었고, 스님의 회상에 머무르고자 찾아드는 대중은 막을 길이 없었다고 한다. 먹을 것이 없어 제자들이 한탄을 하면 ‘네 밥과 내 밥에 물 좀 더 붓자’며 달래 대중을 더 받아들였던 동산 스님. 닭이 백이면 그 중에 하나는 봉황이 나는 법이라며 제자를 품었던 스승. 흥교 스님은 그 많은 제자들 중에 막차를 타듯 19세이던 1959년, 69세의 스승과 사제의 인연을 맺었다.

“흥교야, 흐르는 물에도 그러는 게 아니다”

“그때가 종정하실 때였는데, 너무 어마어마한 큰스님이라 나는 고개도 못 들었지. 그런데 먼발치서 스님을 가만히 뵈니까, 세수를 하시고 그 세숫물을 자꾸만 고무나무에 끼얹어 버리시는 거야. 당시 고무나무가 상당히 귀할 때인데 그래서 나무가 결국 죽어버렸어. 안타까운 마음에 나무 뿌리를 들고 시냇가에 가서 깨끗하게 씻어서 작은 분에 담아 스님 방 옆에 두었지. 그런데 그놈이 정말 예쁘게 싹을 틔우는 거야. 하하. 어느 날 동산 스님이 그것을 보시고 기뻐하셨어. 그래서 그 많은 대중 가운데에서도 스님이 나를 기억하게 되셨지.”
흥교 스님은 원예학과를 졸업한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었다. 그 인연으로 1960년대 말 전국 산사 주변의 수종을 변경하라는 종단의 부름을 받고 ‘가나안농군학교’에 들어가 ‘가나안 상’까지 수상했을 정도로, 흥교 스님은 자연을 대하는 지혜가 깊었던 듯하다. 동산 스님과 함께 살았던 강진 만덕사를 설명하면서도 흥교 스님은 만덕사 주변의 동백나무를 먼저 이야기했다. 스님의 설명을 따라 그려지는 아름드리 동백나무며 울창한 동백숲, 그리고 그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만덕사에서 수행하던 동산 스님과 흥교 스님의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맑고 기운차게 느껴졌다.
“우리 스님이 만덕사를 참 좋아하셨어. 마지막 열반처로 삼겠다고 늘 말씀하셨을 만큼 좋아하셨고, 자주 가 계셨지. 그때 마침 나도 강원도 상원사에 있다가 우연히 만덕사로 갔는데, 우리 스님이 계셨어. 그때 ‘고무나무 키운 흥교로구나’ 하시면서 한눈에 알아보시더라구. 그렇게 해서 만덕사에서 3년 동안 스님 모시고 살았지.”
만덕사에서 흥교 스님은 은사와 함께 더덕도 캐러 다니고 공부 가르침도 받으며 ‘재미나게’ 살았다고 한다. 어느 날인가 스님과 포행을 나섰다가 동산 스님이 저만치 앞서 가시길래 흥교 스님은 몰래 개울물에다 소피를 보았는데, 동산 스님이 이를 아시고 “흥교야, 흐르는 물에도 그러는 게 아니다” 하는데, 어찌나 민망스럽던지 그 뒤로 흥교 스님은 아무리 급해도 길을 가다 방뇨는 안 했다고 한다.

중노릇 잘하는 방법

큰 스님이 머무는 도량이니 손님도 많았다. 차 심부름은 당연 흥교 스님의 몫이었다. 특히 만덕사 아랫마을 귤동에는 ‘해남 윤씨’ 일가들이 모여 살았는데. 구름처럼 넓은 갓을 쓴 선비들이 열댓 명씩 종종 몰려 올려와 “동산이 있는가” 하며 스님을 떠보곤 했다고 한다. 종정스님을 대하는 예가 어찌 그 모양인가 싶어 흥교 스님은 그때마다 마음이 무척 상했다. 그러나 동산 스님은 언제나 “자네들 왔는가?” 하며 기꺼이 마주 앉아 스님을 떠볼 요량으로 던지는 한시를 툭툭 받아내셨다고 한다. 차 시중을 들며 곁눈으로 보았던 그때 스승의 그 당당한 모습에 흥교 스님은 그날 종일토록 가슴이 뿌듯하곤 했다고 한다.
동산 스님은 흥교 스님에게 중노릇 잘하는 방법으로 ‘돈, 여자’ 딱 두 단어로 잘라 말했다.
“화두처럼 생각하며 살았지. 그리고 경계에 설 때마다 ‘돈, 여자’라는 거울에 비춰봤어. ‘이건 옳지 않구나. 이 마음은 지켜야 하는구나.’ 그러다보니 어느 날 저절로 모든 행이 계율 안에서 자유로워지더군. 참으로 정확한 가르침이었어. 사실 나는 우리 스님에게서 ‘신심’을 배워왔다고 생각해. 우리 스님은 해야 할 일은 다 하셨고, 정해진 시간에 어김없이 하셨거든. 그게 바로 신심 아니겠어. 몸과 마음을 온전히 조복 받을 만큼 대단한 신심이셨어.”

마지막 길에서도 마당을 쓸었던 스승

열반에 드시던 날 아침에도 흥교 스님은 마당을 쓸던 은사를 뵈었다. 그리고 점심 무렵 스승의 열반 소식을 들었다. 마지막 가는 길까지 당신이 해야 할 운력을 다 마치고 떠난 스승이었다.
“마지막 가르침이었지. 나도 우리 스님 떠나시고 얼마간 공부에만 매진했어. 14안거일 거야. 하하. 그러다 40대 초반에 범어사 주지가 됐어. 아마 최연소라고 했던 거 같아. 나도 모르게 발령이 난건데, 많이들 말렸어. 성철 스님부터 모두들 주지하지 말고 공부하라고 했지. 그때 주지하지 않았으면 좋았겠지만, 그래도 후회는 안 들어. 참선도 좋지만 생활 속에서 세상 속에서도 수행의 향기는 만들어지는 거거든. 그렇지 않을까?”
스님은 은사가 다져놓은 토대 위에서 더 많은 그리고 더 다양한 열매가 열리길 기대하는 듯 했다. 세상에 힘이 되는 불교, 사람들과 함께 하는 불교, 그리고 문화·경제·복지 등 모든 분야에서 먼저 선도하는 불교를 이야기했다.
2006년 흥교 스님은 ‘앞으로 어느 시골 암자에서 채마밭이나 마당을 쓸지 않겠냐’며 대각사를 떠났다. 마지막 주지 소임을 놓는 자리였다.
“선승처럼 보인다고? 아니야. 만약 그렇게 대중들에게 비춰졌다면, 은사스님 덕일 거야. 동산 스님이 너그러우셨거든. 또 사형이셨던 광덕 스님이 참으로 자비로우셨고. 그 두 분에게서 신심과 생활을 배웠으니까, 그 덕에 조금 닮게 되었겠지.”
어느새 시골 산사에 해가 기웃 기울었다. 너무 오래 스님 시간을 뺏었다. 죄송한 마음에 걸음을 서두르자 스님이 말했다.
“나는 아주 시간이 많은 노인입니다. 하루 종일 시간이 많아. 그런 나를 만나러 오느라 고생이 많았어요.”
수행자의 향기는 머물지 않는다. 바람을 거슬러 전하는 향기처럼….

▲ 흥교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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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 스님 _ 1890년 충북 단양 출생으로 경성의전을 졸업하였으며, 1912년 용성 스님을 은사로 범어사에서 출가하였다. 범어사 강원을 수료하고 금강산 마하연 등에서 수십 안거를 성만했다. 성철 스님, 광덕 스님 등 수많은 제자를 배출했던 철두철미했던 선승으로서, 범어사와 해인사 조실, 조계종 종정을 역임했다. 1965년 범어사에서 세수 76세, 법랍 53세에 열반에 들었다.

흥교 스님 _ 1959년 범어사에서 동산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으며, 상원사, 범어사, 칠불사, 만덕사, 벽송사 등 제방선원에서 정진하였다. 범어사· 대각사· 성주사 주지, 조계종 중앙종회의원을 역임했다. 현재 범어사 전계대화상, 학교법인 원효학원 이사장, 재단법인 대각회 이사장을 맡고 있으며, 용인 용천사에 주석하고 있다. 

                                                                                            - 다음 호에 ‘동산 스님’ 제2편이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