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의견을 존중한다

현대 산업사회의 불교

2009-07-29     관리자
육화경(六和經)의 다섯 번째 덕목은 견화동해(見和同解)이다. 견(見)이란 사물을 보는 눈이다. 세상 사람들은 그 환경과 경험 및 학식과 이해상관(利害相關)들이 다른 까닭에 어떤 시실을 보는 눈이 각기 다르게 마련이다. 그러나 누구나 자기가 보는 바야말로 가장 정당하다고 믿고 있으며 그 견해와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을 보게 되면 당장에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마침내 조직 내부의 인적 화합을 파괴하는 요인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다 같이 생각하여 보자. 우리중의 어느 누가 이미 성인의 지위에 올라서 자기가 보는 바는 완벽하므로 어느 누구도 그 의견에 합치 되지 아니하는 의견을 가질 수 없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또한 우리와 함께 지내는 주변의 사람들은 도저히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유치해서 그의 의견에는 귀를 기울일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겠는가? 우리 모두는 어느 때나 겸허한 마음 자세로 자기 의견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용납할 줄 알아야 하고 남들이 제시하는 반대 의견에 대하여 존중하는 아량이 있어야 한다. 자기 의견에 대한 확신은 좋은 일이지만 그것이 유일한 견해라고 하여 남들에게도 그와 똑같은 견해를 기대한다는 것은 첫째로는 교만이며 둘째로는 남을 얕잡아 봄이다. 우리 불교인은 어느 때나 공덕을 키워야 한다. 공덕이라는 말은 육조대사(육조대사에 의하면 외경타인(外敬他人)이 시공(是功)이요, 내심겸하(內心謙下)가 시덕(是德) 밖으로 남을 공경함이 곧 공이요, 안으로 내 마음을 겸손하게 함이 곧 덕- 이라고 정의하였다. 교만심을 불교에서는 탐진치 3독(毒) 다음가는 제 4의 독소라고 일러온다. 그러므로 적어도 불교에 귀의한 불자들은 먼저교만심을 빼버리고 일상생활을 하여야 한다.
나이가 많은 것으로 교만하려 든다. 그러나 나이 먹은 것이 꼭 자랑일 수 있겠는가? 나이는 곧 풍부한 경험을 뜻한다 하여 그 경험을 배경으로 자기의 의견이나 판단을 절대적인 것으로 삼으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의 과거를 돌아볼 때, 그 풍부한 경험 모두 다 떳떳하고 자랑스러웠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가잘 성실한 삶을 살아왔고 모든 일의 처리 과정이 결코 부끄러움이 없었으므로 그 경험에서 얻은 지식은 어느 누구도 건드릴 수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사람이 참으로 있을까? 대체로 경험에서 얻어진 결론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볼 때 소극적이며 부정적인 판단이다. 대개 안 된다는 결론을 내어 놓는다. 그리고 그 안 된다는 판단을 우겨대고 타인의 승복을 강요한다. 만약 우리가 이와 같은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판단만으로 살아간다면 인류 사회에는 아무런 진보도 기대할 수 없다. 인류의 조상은 나는 것을 꿈꾸며 그 방법을 생각해 보기를 여러 천년 하였다. 그 오랜 세월의 경험은 모두 실패의 기록이다. 만약에 실패의 기록만으로 비행의 꿈을 버렸다면 오늘의 항공술이 어떻게 되었을까? 과거의 경험이 실패하였다고 하여 새로운 시도를 전혀 인정치 아니하려함은 인류의 역사를 발전시키지 않겠다고 함과 같은 것이다. 경험 많은 것으로 교만할 수 없다.
지식이 많으므로 교만 하려든다. 지식은 대개 남들이 저술한 서적이나 남의 말을 통해서 얻어지거나, 또는 자기의 경험에서 얻어진다. 경험에 관하여는 위에서 이미 보았거니와 서편이나 담론에서 얻어진 것이 어째서 자기의 교만거리로 될 수 있는가? 그 지식이 참으로 가치 있는 것이라면 그 원천을 찾아 그것을 제공하여 준분에게 감사하는 것이 당연 한 것이어늘 그 원천이 자기가 아니면서 그것을 가지고 남을 업신여기며 교만을 피우려 드는 것은 어리석음의 절정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학문의 세계를 보면 이제까지 불변의 진리처럼 존중되던 학설이 오늘날에 와서는 아무 쓸데없는 망설에 불과한 것으로 밝혀지는 것을 우리는 흔히 본다. 진리의 객관성을 전제로 하여 만인으로부터 동일한 결론이 존중될 것을 기대하는 자연과학에서도 그 이론은 끊임없이 수정되어 가고 있다. 시험관에 넣고 실험한 결과에서 얻어진 결론이 아닌 사회과학 내지 인문과학의 이론이 끊임없는 쟁론의 대상이 되고 후학들의 신랄한 비판을 받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러한 학식을 가지고 교만을 부리고 남들의 의견을 꺽으려 한다는 것은 적어도 수행인으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교묘한 논리를 구사해서 자기가 정당한 것처럼 나타났을 경우라도 그것이 꼭 진리라고 남들에게 믿기를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가 알고 있다는 것이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것을 알고 많이 안다는 것을 교만스럽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돈이 많다거나 세력이 높다거나 명예가 높은 것으로 교만 하려든다. 돈은 어떤 경위를 거쳐 나에게 있게 되었는가? 세력이나 명예는 누구에 의해서 마련되었는가? 조금만 지각 있는 사람이라면 반성해 볼 수 있는 일이며 그 돈이나 힘이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다. 어떤 시기에는 세상에 절대적 권위로서 군림하던 세력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것을 우리는 주위에서 흔히 보고 지내건만 , 그러한 것은 남의 일이요, 내 힘은 그러한 것과 다르다고 믿고 그 힘을 가지고 자기 의견을 정당화 시키려 한다. 대체로 조직내부에서의 의견이라는 것은 조직의 번영과 발전에 이로울 때 정당한 것이며 그렇지 아니할 때 정당한 것이 아니라고 판단되어야 하는 데도 불구하고 조직의 번영에는 오히려 해로울 수 있는 의견이 고위층의 의견이면 이것은 부조건 존중되어야하고 조직의 발전에 이로운 것이라도 말단미직의 의견이면 이것을 무시하려 드는 것은 바로 이 세력을 배경으로 하는 교만이 그 원인이 된다. 로마시대에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지동설을 기독교가 그 세력과 권위로서 억압한 것을 오늘날에도 우리는 교훈으로 이야기 하고 있거니와 크고 자은 조직체에서 지금도 이러한 어리석음을 항상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 불교적 입장에서 보면 내 주변의 모든 사물들은 바로 나 자신의 마음의 반영이다. 나의 경험세계는 곧 나의 심적 수준을 의미한다는 밀이다. 여래만으로 이룩되어 있는 세계가 바로 우리 세계라는 것을 여러 번 강조하였다. 여래만이 계신 세계라면 모든 사람은 다 내 편이 되어 있을 것인데 어째서 이와 같이 나와 반대되는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 세상에서 나는 살고 있다는 말인가? 여래만이 참다이 세계에 그득하다면 모든 사람들이며 모든 일은 광명뿐일 터인데 어째서 나는 이렇게도 나쁜 사람에게 에워싸여 지내고 나의 하는 일은 모두 답답하고 어둡기만 하단 말인가? 우리는 이러한 의문을 수시로 품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의심하더라도 여래일원의 진리 세계는 본래 그대로 엄연하다. 우리가 아무리 내 주위의 어두움을 한탄하더라도 여래의 무한광명은 까딱도 없다. 문제는 내 마음의 눈이 열리지 아니한 데에 어두움의 참 원인이 있는 것이다. 마음속의 지혜의 눈을 열어야 한다. 그것만이 광명을 받아들이는 길이다. 내 마음의 문을 닫고 있을 때 나로 하여금 그 굳게 닫힌 문을 열게 해 주는 부처님의 선묘 방편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내 주변에서 나에게 반대적 입장을 취하는 보살들이다. 내 주위에서 수많은 보살들이 나의 어리석음을 끊임없이 일깨워 주고 있다. 만약 내 주위의 사람들이 내 의견에 무조건 따라 준다고 할 때 나에게서는 교만심이 한정 없이 자랄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내 주변 사람들은 나의 의견에 반대되는 의견을 내놓거나 나를 비판하거나 해서 나의 겸손을 재촉한다. 밖으로 남을 공경하고 안으로 겸허하게 되는 것이 공덕이라면 내 주위의 반대 의견자들은 얼마나 고마운 보살들인가? 내가 교만하다는 말은 내 주변에는 나보다 못한 사람들만 있다는 말이며 반대로 내가 남을 공경할 수 있고 내 스스로 겸허할 수 있다는 것은 내 주위에 나보다 나은 분이 그득하다는 것이 된다. 실상의 세계에서 볼 때 어느 형제가 부처님의 자녀 아닌 사람이 있으며 어느 누가 부처님의 무한 공덕을 받지 아니한 사람이 있겠는가? 이와 같은 훌륭한 분들에게 에워싸여 있으면서도 그 분들은 못난 사람들이라고 보며 지내는 내 어리석음은 교만심을 꺾어버릴 때 사라지리라. 교만심이 사라질 때 남을 공경하게 되며 남의 의견을 존중하게 된다. 의견의 존중이야말로 조직의 생명이다. 화합을 이루는 활력소이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여래의 공덕 생명 아닌 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