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우주 생명체는 하나

초대법문

2009-07-28     관리자

▲ 관 응 스님
 우리는 불교를 무엇 때문에 믿으며 참선을 왜 하는가를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괴로움에서 벗어나 편안하게 살고자[離苦得樂] 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눈[眼]으로 보고, 귀[耳]로 듣고 코[卑]로 냄새맡으며, 혀[舌]로 맛보고 몸[身]으로 감촉을 느끼며, 뜻[意]으로 분별합니다. 이러할 때 자기 마음에 맞으면 좋고 즐겁다고 하고, 자기 마음에 안 맞고 거슬리면 싫고 괴롭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몸에 붙어있는 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뜻의 여섯 가지 기관으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며 감촉을 느끼고 분멸을 하니까 생명이라는 것이 몸속에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생명, 즉 사는 자리가 꼭 이 몸속에 있어서 보고 듣고 맛보고‧‧‧‧‧‧ 하는 줄 압니다. 컵에 물을 담아 놓듯이 몸뚱이 속에 생명이 하나씩 들어있는 줄 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애초부터 잘못된 이 생각, 나라는 집착 때문에 괴로워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내가 아는 어떤 스님은 이런 생각을 가지고 12년 동안 장좌불와(長坐不臥)를 했는데 12년 동안 장좌불와하며 참선하였으면 생명자리를 바로 알아 ‘나’라는 아집이 없어져야 할 텐데 달라진 게 없이 12년 동안 장좌불와한 것만 자랑합니다.

 바르게 참선하는 법

 옛날 중국에 마조스님이라는 아주 유명한 스님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스님도 처음 젊었을 때에는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면 공부가 저절로 되는 줄 알고 앉아 있기만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스승인 남악 회양선사가 마조스님의 잘못된 생각을 고쳐주려고 그 앞에서 기왓장을 자꾸 갈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마조 스님이 회양선사에게 물었습니다.

 "스님! 기왓장을 뭐하려고 자꾸 갑니까?”

 "이것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려고 하네.” 

  "기왓장을 간다고 거울이 됩니까?”

 "이 사람아, 그러면 앉아 있기만 한다고 부처가 되는 줄 아는가?”

 그러자 마조 스님은 스승의 말에 생각이 언뜻 돌아가서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하고 공부하는 방법을 새로 물었습니다. 그 물음에 회양선사는 직접 대답은 하지 않고

 "어떤 사람이 소에다 수레를 멍에해서 몰고 갈 때에 만약 수레가 가지 않으면 수레를 때려야 옳으냐 소를 때려야 옳으냐(車若不行에 打車卽是아 打牛卽是아)” 하고 물었는데 이 물음에 확연히 알아서 공부를 바로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쉬운 이야기입니다. 좀 어려운 이야기를 하나 해보면 중국에 서쪽으로 가면 우두산이라는 산이 있습니다. 육조 혜능대사의 할아버지격인 4조 도신대사가 어느 날 길을 가다 보니 산위에 오색구름이 떠있어 하도 희한하여 그 산에 뭐가 있을 것 같아서 근처의 밭가는 농부에게 물었습니다.

 "저기 저 산에 무엇이 있습니까?”

 "저 산에는 큰 도인이 살고 있습니다.”

 도인이 살고 있다고 하기에 그곳을 찾아 들어가 보니 큰 석굴이 하나 있고 어두 컴컴한 그 안에 어떤 사람이 나무둥지처럼 앉아 있었습니다.

 "여기 앉아서 무엇을 하느냐?” 고 물으니,

 "마음을 관(觀)합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때 4조 도신대사가 고함을 지르면서, “이 관하는 자는 어떤 놈이며 관해지는 바는 어떤 물건인고(觀是何物이며 心是何物고)”하였습니다. 우리가 책을 본다고 하면 책은 보여지는 대상이고 (이것을 所라 합니다) 우리는 능히 보는 자(者)입니다. (이것을 能이라 합니다). 아까 마음을 본다고 했는데 보는 자가 따로 있고 보이는 물건이 따로 있으면 능(能) 소(所)가 있어 두 조각난 공부, 즉 죽은 공부입니다. 화두 드는 자와 들리는 화두가 따로 있으면 두 동강나는 공부가 되어서 이런 공부는 평생을 해도 결코 깨닫지 못합니다.

 이것은 전기선에 비유되기도 합니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전기선에는 양극 음극이 있는데 이 양극 음극이 붙어야 불이 들어오지 따로따로 떨어져 있으면 불이 켜지지 않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화두 드는 자와 들리는 화두가 따로 떨어져 능소(能所)가 있으면 아무리 해도 깨닫지 못합니다. 능(能)과 소(所)가 없이 하나가 되어야 깨달았다고, 즉 증(證)했다고 합니다.

 '나’라는 망상을 놓아라.

 옛 조사스님들은 다 이와 같이 해서 마음을 깨달았습니다.

 여기에서 마음이라는 것은 우리의 생명자체이며 법이라고도 합니다. 이것은 생명 자리인데 한 사람 한 사람 따로 있는 생명체가 아니라 하나의 생명체입니다. 이 생명체, 즉 사는 기운이 내 몸에서는 눈에 가면 보고, 귀에 가면 듣고, 코에 가면 냄새 맡고, 손에 가면 잡거니와 그것을 넓혀보면 김씨에 가면 김가노릇, 이씨에 가서는 이가노릇을 합니다. 다시말하면 이것은 귀에 가서 듣고, 눈에 가서 보는 것이 각각 따로 있는 것이 아니듯이 김씨에 들어가고 이씨에 들어가는 생명체가 따로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이 생명자리가 나무에 들어가서 나무가 살고, 풀에 들어가서 풀이 살며, 모기에 들어가서 모기가 살지만 예를 들어 생명체ㅡ즉 사는 기운이 나무에 들어간다고 할 때 나무에 들어간 만큼 생명체가 나뉘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몸속에도 생명체가 별개의 것으로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님에도 우리는 몸속에 생명체가 하나씩 따로 들어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나’라고 고집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화두를 들고 있는 한 깨칠 수가 없습니다. 이 아집을 버려야 깨칠 수 있는 것입니다.

 온 우주에 꽉 차서 한 덩어리로 되어있는 이 ‘사는 기운’이 나에게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것은 도란스를 가져다 놓으면 전기불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것과도 같이 ‘나’라는 아집, 삿된 생각을 가지고 우주의 생명 기운을 차단하기 때문에 전체의 기운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우주전체의 생명기운이 나에게 들어오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나’라는 아집을 없애버리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염불을 하고 화두를 들고 참선을 하는 것도 이 ‘나’라는 아집의 도란스를 집어치우자는 것입니다. 이 ‘나’라는 생각을 없애는 순간 어두운 밤에 전기불이 환하게 들어오듯 이 우주의 생명기운이 나에게 온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염불을 하고 화두를 드는 것도 아집을 없애고자 하는 것인데 아집을 꽉 쥐고 앉아서 공부를 하니 공부가 제대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망상으로 망상을 정화시키려고 해봤자 깨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라  는 망상을 놓아야 합니다. 화두는 일종의 ‘나’를 없애는 소독약과 같습니다. 그래서 화두를 들고 자꾸 참구하면 ‘나’가 녹아 없어지는 것입니다. 

  산기운, 활구를 깨친 사람

 참선을 하든 염불을 하든 모두 좋습니다. 건강을 위해서는 철봉이든 아령이든 테니스든 사람에 따라서 맞는 운동을 택해서 해야 하듯 그 사람의 근기에 맞는 것이면 됩니다. 그리고 건강해지는 것은 운동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운동을 하다보면 그 힘이 자기속에서 나오는 것이듯 불교수행도 역시 그렇습니다.

 옛 조사스님들은 모두 이러한 수행을 통해서 ‘사는 기운’이 회복되어 그 힘이 충만된 스님들이었습니다. 사는 기운을 깨치고 보니 이 몸에 사는 기운이 가득찬 것입니다. 깨치지 못했을 때에는 눈으로 보는 것, 귀로 듣는 것, 코로 냄새 맡는 것 등이 희미했으나 깨치고 보면 생명의 기운, 우주 전체의 기운이 나에게 가득차서 내 몸속에서 모든 것이 활발하게 살아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우주전체에 있는 기운과 내 몸속에 있는 기운이 하나가 된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되면 눈으로 보는 것도 활안(活眼)이 되어 모든 것을 꿰뚫어 볼 수 있게 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법을 물으러 들어오면 그 사람이 왜 왔는지, 그리고 무슨 공부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다 압니다.

 눈뿐만 아니라 몸에 가면 신통이 생기고, 뜻으로 가면 무한한 지혜가 열리며, 입으로 가면 무한한 변재가 되는 등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으로 산기운이 나옵니다.

 길에서 고아를 만나면 친자식같이 대하고, 불쌍한 노인을 만나면 부모처럼 대하는 등 일체중생을 수순해서 온갖 행을 하여 적극적으로 남 덕되는 일을 베푸는 것입니다. 이것을 백억화신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산기운ㆍ활구(活句)를 깨친 사람은 몸으로는 무한한 신통, 입으로는 무한한 변재, 뜻으로는 무한한 지혜가 열려 어디에도 막힘이 없고 죽지 않습니다.

 옛날 조사스님들은 도를 가르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쓰셨습니다. 마치 의사가 환자를 진찰하여 그 사람에게 맞는 처방을 하듯이. 이것은 곧 화두입니다. 예를 들어 조주스님이 도를 묻는 이에게 ‘뜰 앞에 잣나무’라고 한 것은 그때 그 사람에게 꼭 맞도록 한 법(法)입니다.

 조주스님이 그 당시 그 사람에게 그 약방문을 몇 백 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대로 가져다가 쓴다는 것은 맞을 리가 없습니다. 옛날 조주스님이 이렇게 했으니 해봐라 하는 것은 활구(活句)가 아니라 사구(死句)입니다. 사구인고로 그때 그 상황에서처럼 깨칠 수 없는 것입니다. 같은 병이라도 그 사람에게 맞는 약을 처방해야 합니다. 만병통치약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법문을 부지런히 듣고 화두를 챙기다 보면 자신에게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이전부터 들어서 익숙해진 화두가 있는 사람은 그 화두를 계속 들고 간절히 공부하면 됩니다. 사구(死句)라 할지라도 자꾸 하다보면 길이 들어 힘을 얻게 됩니다. 고려말 나옹화상과 보우스님도 이러한 화두를 참구하다가 깨닫고 생명체가 하나임을 알게 되었던 분들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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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관응 노스님을 친견하러 온 신도들에게 80노령임에도 불구하시고 두시간 동안 고구정녕하게 해주신 법문을 기자가 듣고 독자들과 그 감동을 함께 나누기 위해 녹음 정리하여 게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