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스님 寒巖스님

老師의 雲水시절

2009-07-27     관리자
󰊱화두와 염불
이제까지 몇 번인가 우리 스님 한암 조실스님에 대하여 언급한 때가 있었지만 여기서 좀 더 노장스님에 관한 기억을 더듬어 보고자 한다. 나는 한암스님과 같은 선지식을 뵈었지만 오늘의 불광 독자들은 뵈온 분이 적을 것 같아서 우리 스님을 추모하는 마음으로 몇 자 더 적은 것이다.
우리 노장님은 항상 오똑하게 앉아만 계셨다. 뒤에도 말하지만 화두하는 것만을 오직 일로 삼았다. 그런데 손에는 언제나 염주를 쥐고 계셨다. 그렇다고 염불하는 것을 보진 못했다. 남에게 하라고 권하지도 않으신다. 염불을 해도 말리지 않으셨다. 하루는 내가 묻기를
『스님, 스님은 염주를 무엇 때문에 돌립니까? 염주 돌리며 화두 하십니까?』
스님은 아무 말씀 않으시고 염주를 번쩍 들어 보이셨다. 우리스님이 염주 돌리는 것을 보고 그때 수죄들이 뒤에서 수군대기를 글 자하던 분이라 글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막느라고 염주 돌린다고도 했고, 화두가 안되니까 염주를 돌린다고도 했고 조실이 주력한다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스님은 좌선할 때를 빼놓고는 언제나 그 반들반들한 염주를 돌리고 계셨는데 그 뜻을 누가 알까.
이에 생각나는 것은 용성스님의 경우다. 용성스님은 염주를 든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렇지만 염불은 간혹하신 것으로 안다 한 번은 이런 이이 있었다.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여러 차례 간도(間島)를 왕래 하지만 무사히 다녔다. 나는 차중에서 수상한 것을 느낄 대면 관세음보살을 염한다.』하셨다. 그 당시에는 국경, 변경을 출입하다 보면 여러 불안한 일이 있었던 것이다.
『참선 수좌라도 어려울 때는 관세음보살을 염하도록하라.』
나는 이 말을 듣고 곧 대꾸했다.
『노스님, 스님이 삼매 중에 계시면 일체 재난이 침입하지 못할 게 아닙니까. 염불한다는 것은 밖으로 구하는 것이 아닌가요?』
선하는 사람이 밖으로 무엇을 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그것만을 알고 들이댔다. 스님은 대답하였다.
『아, 너희들이 아직 모르는구나. 관세음을 부른 놈과 삼매에 든 놈이 둘이 아니여. 둘이 아니지만 힘은 두 가지가 나타느니라.』
내가 대꾸했다.
『둘이 아니고 하나라면 뭐 부를 필요가 있습니까. 화두나 할 것이지요.』
스님이 웃으시면서 말씀하셨다.
『관세음보살을 많이 부르면 이해할 때가 있어. 지금 너희들은 아직 이해를 못한다만……관음묘지력(觀音 妙智力)이 능구세간고(能球世間苦)라 하였느니라.』
선지식으로서 관세음과 화두가 둘이 아니라는 말을 하는 것은 용성스님뿐이었다. 아무도 그런 말하는 사람을 나는 못 보았다. 이 점에 있어 용성스님은 사뭇 원흉한 종사라는 느낌이다. 망월사에서 천일기도할 때에도 그랬다. 아침에 참선하고 공양할 떼에 발우를 펴고 천수물을 돌리고 나서 대중이 일제히 천수다라니를 3편 외었다. 수좌들이 반대하여 구지렁대니까
『다 이치가 있어서 하는 일이다. 그래야 성중이 가호하고 도량이 장엄하며 불사에 장애가 없는 것이다.』하시니 대중은 아무 말 없이 순종할 뿐이었다. 화과원에서 모시고 지낼 때도 말씀하시기를 『 근기가 약한 사람은 천수를 지속하면 퇴전하지 않는 도리가 있느니라.』하신 것을 기억한다.

󰊲선왕지법
우리스님은 불공 의식을 친히 하셨다. 물론 시식도 하셨다. 어산조의 범패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의식문 그대로 진행하는 것이다. 그 당시 의식문을 외우는 것을 수좌들이 이해 못하고 『이거 시주밥 얻어먹으려고 외우는 거 아닌 가』하니까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예 그런 소리 말아라. 옛날의 스님은 지금 사람보다 다 낫다. 의식을 행하는 데는 덮어 놓고 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이유가 있다.』
스님은 고풍은 모두 존중하였다. 행건치는 것만 하도라도 그렇다. 아침에 일어나 행건을 치면 잘 때만 풀으셨다. 혹 누가 행건을 매면 각기가 생기니 풀으는 것이 좋다고 하면 『이것도 선왕지법(先王地法)이다.』하였다. 옛 고풍을 좀체 버리지 않는 것이다. 또 예불도 조석으로 각단 예불을 다했다. 수좌들은 모두가 큰 방에서 죽비로 3배할 뿐이었지만…… 공양도 아침에는 죽, 낮에는 밥, 두 때뿐이다 드린 대로 잡수시고 차다, 덥다, 질다 ,되다, 짜다, 싱겁다, 도무지 말씀이 없으셨다. 그 생활 일체가 참으로 검박하셨다. 시주가 올린 물건은 안 써야 한다는 신조인 듯했다. 명주나 비단은 결코 몸에 안 붙이셨다. 공양은 사뭇 적게 잡수셨고 오후에는 변소에 가셨는데 반드시 병수를 쓰셨다. 예불 때에는 꼭 참석하셨고 혹 변소에 가셨다고 하여 대중끼리 먼저 하지 못했다. 한 번은 먼저 했는데 스님이 오셔서 다시 했다. 대중이 다모여 예불하는 규칙을 지키게 하려고 하신 것으로 보인다. 늘 말씀하시기를 태혜스님은 대중이 1700명이었는데 조실스님이 두 가지만은 늘 안 빠졌다는 것이다. 두 가지라 함은 조석 예불과 대중 운력(작업)이다. 스님도 그러하셨다. 그 당시의 운력이란 채소 가꾸기, 감자 심고 거두기. 꿀밤손질, 채소 다듬기 등이다. 콩나물 다듬을 때는 꼭 나오셔서 대가리 하나 버리지 않고 모두 가렸다. 내버리는 것은 너무하다하리만치 질색이었다.

󰊼노조 스님의 가풍
우리 스님의 24시간은 어떠하였던가. 밤에 잠시 누운 밖에는 언제나 큰 방에서 대중과 함께 계셨다. 새벽 3시에서 밤 9시 까지 항상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앉아 참선만 하고 계셨다. 허리를 구부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당시의 운정(雲頂)스님이나 단암(檀庵)스님, 설봉(雪峰)스님, 동산(東山)스님, 모두가 그랬다. 고단하면 밖을 거닐라고 하였다. 종일 눕지 못하고 발도 못 벋고 벽에 기대지도 못했다. 따로 있을 지대방도 없었다. 그러므로 여간한 수좌가 아니면 한암스님 회상에서 지내기 어렵다고 겁을 먹고 오지 않았다. 『군자는 꿋꿋하여 쉬지 않는다.』君子健健不息는 신조 그대로였다. 3시에 기상하여 참선 예불공양을 대중과 함께 하셨고 조실방이 있어도 가시지 않았다. 언제나 큰방에 앉아 계시니 대중이 꼼짝 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가풍은 노조(魯祖)스님을 본받은 것으로 보인다. 당나라 南泉 스님제자인 노조스님은 납자가 찾아오면 벽을 보고 돌아앉았다. 한길을 말하는 것이 한 자를 가느니만 못하다는 뜻이다. 묵묵히 생각하는 것이 제일이라는 뜻이다. 스님도 한상 노조스님을 칭찬하셨는데 내가 보기에 스님은 그 가풍을 숭상한 것이 분명하다. 조실스님으로 대중과 함께 이렇게 행한 분이 또 어디 있을까! 그 뿐만이 아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