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게 사는 법

특집 / 나의 믿음 나의 생활

2009-07-26     관리자

 극도로 분화되고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학문도 예외는 아니어서 매우 세분화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제 내가 다시 고3이 되어서 대학에 진학을 해야 한다고 가정한다면 어느 과를 택해야 할까? 아마도 인류학을 공부할 수 있는 과를 택할 것이다. 인간이 발(發)하는 모든 의문이 각각의 학문을 만들어 냈다면 그 의문을 발하고 학문을 만들어낸 인간이나 인류 자체를 연구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 궁극의 학문의 목적이 아닐까 생각되어지기 때문이다. 

 인류학도 그 분야가 많아서 인간의 신체적 형질을 연구하는 형질인류학 문화적 특질을 연구하는 문화인류학으로 대분(大分)되고, 형질인류학은 다시 진화생물학과 인간생물학으로, 인간생물학은 다시 인류유전학 생태학 골격생물학 등으로 가지치기를 계속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렇게 세분화되고 전문화되는 인류학이 과연 인간과 인류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궁극적이고 확연한 해답을 줄 수 있을까 의심스럽다. 결국은 모든 것을 객관화하고 통계화하고 비교연구하는 현재의 학문방법으로는 해답이 주어질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은 누구나 바르게 살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바르게 살기가 힘이 든다. 우선 이렇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이다 라는 지침이 주어져도 그것을 지키기가 힘이 들고, 더 원초적으로는 지침 자체가 바른지 아닌지도 문제가 된다.

 지금 우리 사회는 ‘내가 바르고 너는 그르다’고 목소리를 크게 내는 사람과 집단이 많아져서 그 소리의 부딪침으로 인해 소란하기 그지없는 사회가 되었다. 과연 상대적인 바름이 아니고, 참으로 바르다면 그렇게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일까? 이러한 모든 혼란을 해소할 길은 ‘나는 바르다’는 ‘나’에 대한 철저한 탐구와 이해에서 실마리가 찾아질 것이다. 결국 모든 해답은 밖으로 질문을 던지고 밖으로 구해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고 안으로 자기를 살펴서(攝心內照)얻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자기를 어떻게 살필 것인가? 산에 오르는 것을 예로 들면 등산초보자는 지도(地圖)를 보아 먼저 사람들이 내놓은 길을 살피고 이정표와 등산 전문안내인의 안내를 따름으로써 쉽게 등산을 할 수 있다. 그후 등산이 익숙해지고 산을 잘 알게 되면 새로운 길을 개척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자기를 살피는 일의 지도와 이정표가 있다면 수월하게 따를 수가 있을 것인데 이미 부처님께서 지도를 잘 만들어 놓으시고 길을 잘 닦아 놓으셨으며, 역대 조사들께서 길에 잡초를 다 뽑아 놓으셨으니 있는 이정표를 모른 척하고 암중모색(暗中摸索)할 필요는 전혀 없다.

 현재 세계를 지배하는 양대 산맥인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모두 물질을 최우선(最優先)에 놓은 유물주의(唯物主義)로서 인간성(人間性)을 배제(排除)해 놓고 인간을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하니 될 말이 아니다. 사람의 육체적인 눈은 밖의 것만 보고 눈 자체나 안을 볼 수 없는 부자유스러운 것인데 이 부자유스러움과 유한성이 본질인 물질로 인간을 자유스럽게 하고 인간의 무한한 욕망을 채울 수 있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스스로 모순된 것이다.

 달마대사께서 중국에 왔을 때 물질의 많고 적음과 외형적인 것으로 신심(信心)을 저울질하는 즉 물질로 마음을 재려는 중국불교의 실상을 보시고 마음 보는 법 관심법(觀心法)을 설하셨다. 이제 물질의 다소(多少)가 모든 것의 척도가 되는 현대사회에서도 모든 병폐의 근원을 다스리는 길은 마음을 보는 법 뿐이다. 마음을 제대로 파악함으로써 모든 것이 질서가 잡혀지게 된다(觀心一法摠攝諸行). 우리의 마음에는 참되고 변하지 않는 청정진여심(淸淨眞如心)과 욕심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물든 염오무명심(染汚無明心)을 본래 갖추고 있어 인연에 의해 비록 어울려 있기는 하지만 상생(相生)의 관계는 아니다. 수많은 번뇌는 결국 간추려서 세가지 나쁜 마음(욕심내고 성내고 어리석음)을 그 뿌리로 삼고 있으며 더 간추리면 나라는 생각(我見)과 내것이라는 생각(我所有見) 때문이다. 이러한 ‘나’와 ‘내것’이라는 생각인 염오무명심을 벗기면 청정진여심이 드러나는데 이것이 깨달음이며 부처이다. ‘나’와 ‘내것’이라는 데서 출발한 모든 말과 행동과 생각은 악(惡)이고 삿된 것이며 이것을 여읜 상태에서 나오는 모든 것은 선(善)이고 바른 것이다. 온갖 악을 끊고(斷惡), 모든 선을 닦으며(修善), 널리 생명체를 이익 되게 하는 것(度生)이 바른 것이며 깨달아서 부처가 된 때만이, 바꾸어 말하면 염오무명심을 벗겨내고 청정진여심이 드러난 때만이 바르게 살 수가 있는 것이다.

 훌륭한 지도가 있어도 지도보는 법을 잘 모르고 등산에서 주의할 점을 잘 모르면 전문 등산인의 안내를 받아야 하듯이 부처님과 조사들께서 훌륭한 경론(硬論)을 남기셨지만 몸소 수행하신 선지식(善知識)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 부처님께서 법문을 강을 건너는 뗏목에 비유하셨는데 뗏목을 다룰 줄 모르는 사람이 뗏목에 타면 강을 건너기는 커녕 물에 빠져 위험을 당하듯이 부처님 경전이 있어도 뗏목을 저을 줄 아는 사공과 같은 선지식이 필요한 것이다. 말로만 뗏목은 이렇게 저렇게 저으면 된다고 하는, 뗏목의 노나 삿대를 저어보지 않은 사공이 아니라 실제로 뗏목을 저어서 건네주는 사공이 필요하다.

 달마혈맥론(達磨血脈論)에 “염불은 왕생의 인과를 얻고 경을 읽으면 총명해지며, 계를 지키면 하늘에 태어나고, 보시를 하면 복된 과보를 받거니와 부처는 끝내 얻을 수 없느니라.(念佛得因果 誦經得聰明 持戒 得生天 布施得福報 覺彿 終不可得也)”라 하셨다고, 염불(念佛)해서는 깨닫지 못한다며 염불무용론을 펴시는 분들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마음 밖에서 부처를 구하는 것을 경계하신 것이지 염불의 방법을 배제하신 것은 아니다. 참선을 한다고 해도 마음 밖에 따로이 얻어질 것이 있다고 생각하고 불지(佛智)가 얻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이것은 맞지 않는 것이다.

 또 “교법을 시설해 놓은 뜻은 마음을 알았을진대 교법을 볼 필요가 없느니라(說敎只爲標心 若識心 何用看敎)?”라고 하셨다고 경을 볼 필요가 없다고 하는 분들도 있는 데 달마혈맥론이나 ‘달마관심론(達磨觀心論)’에도 경전의 문구가 많아 인용된 것을 알 수있다. 그리고 마음을 성품을 본 후에 경을 볼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이지 무조건 경을 보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다.

 ‘관심론’에서 먹은 법(霽食)을 말씀하실 때 “세째는 염식(念食)이니, 늘 부처님을 생각하여 마음과 입이 서로 응하는 것이요(三者念食 想念諸佛 心口相應)”라고 하셨다. 즉 염불(念佛)을 항상하되 입으로만 하지말고 마음으로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전체를 훑어보면 염불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고 마음 밖에 따로 불성이 없으므로(心外無佛性) 마음으로 마음을 좇아 염불(念佛)을 하라는 말씀이시다. 마음으로 부처를 염(念)하되 법신(法身) 부처님 곧 일체만법의 본바탕은 있는 것(有)도 아니고 공(工)한 것도 아닌 중도(中道)의 실상(實相)임을 염(念)하는 실상(實相念佛)을 하면 “모름지기 염불의 본체를 실천하라(須行念佛之體)”는 달마대사의 뜻에 맞을 것이다.

 신해행증(信解行證)을 다 갖춘 선지식이 드물고 해(解)만이 범람하는 시대에 다행히 청화(淸華) 큰스님을 만나 뵈어 바른 큰 견해(正見)을 세울 수 있게 된 것을 감사드린다. 청화 큰 스님께서는 40여 년간 토굴에서 참선수행만 전념해오신 분으로 근년(近年)에 도생(道生)의 인연 따라 세상에 나오셨다. 약 5년 전부터 전남 곡성 태안사(泰安寺)에 주석해 계시며 매월 첫째 일요일 태안사에서 법회를 여신다. 태안사 법회에 참석하여 큰 스님의 향훈(香薰)을 입으면 다음 법회 때까지 한 달간 세파(世波) 속에서 살아갈 힘을 얻는다.

 나의 평소의 수행법으로는 아미타불의 실상(實相)을 관(觀)하고 염(念)하는 실상염불(實相念佛)을 한다. 영원불멸한 우주자체의 대생명의 대명사(代名詞)인 아미타불을 상념常念)하면 부처님으로부터 베풀어지는 타력(他力)과 자기수행의 자력(自力)이 아울러 감응(感應)하게 된다. 그러나 아직 깨닫기 전에는 우주의 대생명이며, 내 본래면목(本來面目)인 아미타불의 실상(實相)을 확연히 알지 못한다. 이러한 미오(未悟)한 중생을 위하여 나의 스승의 선지식이신 금타(金陀) 대화상께서 견성오도(見性悟道)의 방편으로서, 정혜(定慧)를 균등하게 지닌 마음을 한 곳에 모으는 묘결(妙訣)을 지으셔, 보리방편문(菩堤方便門)을 여셨다. 아미타불의 실상(實相)을 표현한 이 묘결(妙決)을 벽에 붙이고 한마음으로 관(觀)하고 염한다. 좌선을 할 때도 이 묘결을 관하고 염에 염불선(念佛禪) 즉 실상염불(實相念佛)을 하고, 차를 타고 갈 때나 누워서나 걸을 때 틈만 나면 이 묘결을 통해 삼신일불(三神一佛)인 아(化身)ㆍ미(報身)ㆍ타(法身)불을 관(觀)하고 염(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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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광식  / 치과원장. 1949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대학원에서 치의학 박사를 취득하였고
              ‘83-86년 원광대치대에서 강의한 바 있으며, 현재는 서울대치대 외래강사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