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등의식

결혼.가정.행복의 장

2009-07-24     관리자

열등의식, 이 의식에 사로잡히면 자신을 잃게 된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주체인 내가 없는데 세상을 어떻게 살며 무엇으로 내가 존재할 것인가 싶다. 열등의식은 나 자신 타인과 비교하여 타인보다 못하다는 주관적인 느낌이다.

나의 체험 한 가지를 적어 보자.
나는 초등학교 때 친한 친구 셋이 있었는데 늘 함께 어울려 다녔다. 그중 한 친구는 집이 가난하여 내가 장차 어른이 되어도 이 친구를 먹여 살려야 될 것 같은 책임감을 항상 지니면서 살았다. 우리 집이 부자는 아니었지만 비교적 안정된 경제 상태였기 때문에 그 점에 관한한 나는 열등하단 느낌은 없었다. 늘 도시락을 나누어 먹고 때로는 그 집 양식을 우리 집 양식으로 퍼다 날랐다.

다른 한 친구는 공부를 썩 잘했다. 운동도 잘하고 말하자면 만능 탤런트인데 초등학교 6년 동안 나는 한 번도 그 친구를 경쟁해서 이겨본 적이 없다. 밤새워 공부해도 최고의 성적이 2등이다. 그 친구 다음이다. 그래서 그때 어린마음에 이 세상에서 1등 하는 사람은 항상 정해져 있구나 하는 숙명론 같은 걸 믿었던 기억도 있다. 이 체험들은 우스꽝스럽게도 어른이 된 지금까지 우리 셋의 관계에서 역동적으로 작용한다.

나는 학문을 하는 교수가 되었고 가난했던 친구는 큰 재벌은 아니지만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되었고 공부 잘하던 그 친구는 고등학교만 마치고 장삿길에 들어 성공했다. 나는 장사하는 친구 앞에 서면 지적인 열등감이 생긴다. 그가 말하는 것은 무엇이나 옳고 나는 그 앞에 무엇이라고 한마디 한다는게 왜소해 보인다. 내가 기가 죽는 친구다.

재벌이 된 친구는 내 앞에선 주눅이 든다. 우리는 어리석게도 과거의 경험에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다. 열등의식을 우리 정신의학에서 이론화 한 것은 프로이드에서 비롯된다. 프로이드는 그의 이론 가운데 하나인 정신성적 발달과정을 설명하면서 전생식기와 생식기로 나누고 있다.


이때 남근기는 인간이 최초로 느끼게 되는 우월감과 열등감을 경험 한다. 남성은 남근을 가진 것 때문에 우월하단 느낌을 지니고 여성은 남성과 같이 외견상 볼 수 있는 성기가 없기 때문에 원래 있었던게 무엇인가 잘못되어 처벌 받은 열등한 존재라는 자각이 생긴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의 비교의식처럼 가진 자는 우월을 못가진 자는 열등한 주관적인 생각을 갖게 된다는 그런 이론이다. 다른 하나는 아들러란 학자의 이론인데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열등한 존재라는 전제다. 서양사회에서 그들이 믿는 하나님의 완벽한 존재에 비해 모든 인간은 열등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인간은 이 열등감을 극복하려고 부단히 애쓴다.

말하자면 열등감이 원천적인 힘이 되어 인간을 성장시키고 우월에 이르도록 만든다는 그런 이론이다. 이런 이론의 근거는 생리학에서부터 비롯된 것을 바탕으로 발전시켰다. 가령 우리 신체의 한 부위가 손상을 입거나 열등하면 그 손상을 보충하기 위해 유사한 주변조직이 보상적 대응을 함으로써 전체적 평형을 유지해 나간다는 것에 착안한 것이다. 우월감과 열등감은 나타나는 모습은 전혀 다른 것이지만 사실은 동전의 양면과 같고 물길의 갈림길과 같고 따져보면 결국 한 뿌리에서 자란 나뭇가지와 같다.

“선생님 나보고 유엔사무총장을 하라고 그러는데 선생님 생각은 어떠세요?” 정말 그렇게 믿고 있는 A는 진지하게(?) 의논한다. 좀 더 심한 환자 B는 자신이 예수라고 주장한다. 사람에 따라선 젠 체하고 으스대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 건강한 사람에겐 망상은 없다. 망상이란 게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이라고 믿는 것을 말하는데 앞서 예를 들어 사무총장이나 예수라고 확신하는 사람이 과대망상을 가진 환자다. 이런 으시댐이나 망상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자신의 열등감을 은폐하려는 데서 표출되는 모습이다. 사무총장쯤 되어야 아니면 예수님쯤 되어야 열등성을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이란 소망은 결국 자기 자신을 그런 소망스런 사람과 동일시시켜 일치한다.

“누가 나를 비난해요, 버스를 타면 승객들이 모두 수군수군하는데 나보고 병신이라고 그래요.” 이런 호소를 하는 사람도 있다. 비현실적인 보상으로 자신을 보호하려는 과대망상과는 달리 자신을 스스로 비난함으로써 남이 자신을 비난한다고 책임을 전가한다. 사실 이 바쁜 세상에 버스를 타면 타인이 누가 타고 내리는지 무관심한 처지에 자기가 누구라고 비난하고 칭찬한단 말인가. 하지만 자아가 약한 더욱이 열등감이 가득한 개인은 병신이라고 남이 보면 어떡하나 하는 막연한 걱정이 자라서 욕한다로 확대되어 버린다.

“…….” 병원 진찰실에 찾아와서도 아예 굳게 입을 다물고 있는 사람도 있다. 말할 용기조차 잃어버린 열등감이다. 입을 열어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이야기 한다는 것도 자아의 힘이 있어야 된다. 가뜩이나 낮은 자존심에 열등감으로 짓눌려 있다면 입인들 한번 벙긋하겠는가. 다른 사람의 눈치를 지나치게 보다보니깐 기가 죽어 찍소리도 못하는 것이다. 열등감이 가장 심한 사람은 가사상태라 이를 만큼 입을 다문다. 열등감에서 조금 벗어나 반응하는 사람은 자신을 형편없는 사람이라고 낮추어 규정하거나 반대로 이 세상에서 아주 중요한 사람이란 비현실적인 사실을 믿고 행동한다.

전자가 가치없는 자신이니깐 살아갈 가치가 없다고 규정하며 자살감을 갖거나 행동하는 반면 후자도 대단히 중요한 사람이기 때문에 타인이 자신을 해칠거라고도 생각한다. 자신을 낮추거나 비현실적으로 높이는 어느 쪽도 정신건강이 나쁜 상태이다. 이 두 경우, 모두 자신에 대한 열등감이 주된 원인이라 볼 수 있다. 가장 건강하다면 자신의 자아를 있는 그대로 보고 인정하고 행동하는 것일 것이다. 이론적으로 한 치 보탬도 없고 한 치 빼는 것도 없이 자신을 볼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진정한 자신이 아닐까 싶다.

“천상천하유아독존, 당신도 이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니깐 존귀합니다. 당신이 당신 자신을 존중하는 것만큼 다른 사람도 당신을 존중해줄 것입니다. 당신이 당신 자신을 하찮게 취급하는데 다른 사람이 왜 당신을 존귀하게 생각하겠습니까?” 나는 열등감에 가득 찬 환자에게 언젠가는 한번쯤 들려주는 말이다. 이 말을 하고도 환자들의 근기에 따라서 그렇다고 용기를 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괜히 위로하려 들지 말라는 저항을 받을 때도 있다.

그러나 나의 말은 단지 위로하기 위해 던진 말은 아니다. 사실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 세상, 이 많은 인구가운데 나처럼 생긴 사람이 또 있으면 나와 보라. 이 말은 우리의 존재가 그만큼 귀하다는 뜻인데 그 귀함을 당사자인 자신에 의해 거부당하고 있으니 아무리 강한 자아라도 무너지지 않을 수 없다. 열등감, 동전의 양면이나 강줄기의 갈림길 같은 것이라면 반드시 부정적인 측면만이 있는게 아닐 것이다. 열등감이 동기가 되어 긍정적인 성취를 이룰 수도 있겠고 반대로 그에 짓눌려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고를 어느 쪽으로 트는가에 따라서 자신을 보다 빛나게 아니면 자신을 보다 무겁게 짓누를 것이다.

“나 같은 주제에……” 이런 상념에 사로잡혀 있는 독자가 있다면 지금 당장 당신의 물고를 긍정적인 것으로 바꾸어 보라. ‘내가…’이런 비현실적 생각에서 ‘나는 나구나’ 하는 통찰에 이른다면 당신은 우월감도 열등감도 없는 진정한 당신 자신과 만날 것이다. 그 만남에서 당신은 ‘나는 타인에게 어떤 존재인가’그리고 ‘타인은 나에게 어떤 존재인가’하는 관계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열등감은 나 자신이 아니다. 나 자신을 움직이는 에너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