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각성의 어머니 박씨

우바이 만세 여성불자 만세

2009-07-24     관리자

  부휴선사의 법제자로서 <도중결의> <간화결> <선문상의초>를 저술하고 처능이란 유명한 제자를 길러낸 벽암각성 (碧巖覺性 : 1755 ㅡ 1840). 그는 조선 선조 8년 충북 보은의 김씨 가문에서 태어나 현종 1년 사신으로 일본으로 가다가 병을 얻어 입적하기까지 86년 동안 오로지 국방의 임무와 중생교화에 몸을 바친 장한 고승이었다. 어렸을 때의 이름은 징원 (澄圓)이라 했다.

  이홉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그 이듬해 화산의 설묵선사에게 나아가 행자생활하기 만 네 해가 되던 열 네살에 드디어 사미계를 받고 각성이란 법명을 받았으며 가사를 수한 뒤 스무 살이 되도록 오로지 불교의 기초 학문을 연마했다.

  스무 살이 되어 비로소 구족계를 받고 부휴선사를 모시고 정진하기 여러 해만에 마침내 도를 깨달아 부휴선사로부터 벽암이란 법호를 받았다. 특히 초서와 예서에 뛰어난 서예가로서 그는 속리산 법주사, 금강산 유점사와 장안사, 덕유산과 가야산의 해인사 등지에서 경전을 연구하고 참선수행에 전념하였다.

  그러던 그가 열여덟 살 되던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산중에서 수행하는 가운데서도 항상 국제정세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593년 열아홉 살의 젊은 나이로 스승인 부휴선사를 따라 전쟁터에 나아가 해전을 승리로 이끌기도 하였다. 그는 부휴선사를 20년 동안이나 모시면서 불법의 진수를 체득하였으며 무엇보다 계행이 청정하였다. 또한 쌍계사를 비롯하여 화엄사 송광사 등을 중건하기도 하여 가람수호에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스승인 부휴선사가 광해군 (1608 ㅡ 1623)때 요승의 무고로 한양으로 피납되자 같이 모시고 올라가 봉은사에 머물며 그때 판선교도총섭에 제수되었고 인조 (1623 ㅡ 1649)때에는 팔도도총섭이 되어 스님네를 인솔, 남한산성을 축조하는 일에 전력투구 하였다. 남한산성이 완공되어 갈 무렵 병자호란이 다시 발발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파천하였고 벽암 각성은 예순두 살의 노구를 이끌고 즉시 의승 천여명으로 항마군을 조직하여 인조를 보호하는 한편 북으로 진격하였다.

  한강을 건너 한양에 도착한 항마군은 이미 진지를 구축하고 있던 청군을 물리친 뒤 한양을 수복하고 인조를 환궁케 하였다. 인조가 높은 벼슬을 내리며 여러 가지로 회유하였으나 벽암각성은 극구 사양한 뒤 남한산성으로 돌아왔다.

  이처럼 뛰어난 선각자 벽암각성의 뒤에는 어머니였던 박씨의 뼈를 깎는 아픔과 열성적인 가정교육이 함께했다. 교육이란 크게 보아 세 가지로 대별되는데 첫째는 가정교육이요, 둘째는 사회교육이며, 셋째는 학교교육이다. 벽암각성은 이 세 가지 교육을 모두 철저히 받았던 것이다. 가정교육은 어머니로부터 학교교육은 서당에서 사회교육은 불가에서 받았다. 그의 어릴 때 이름은 징원이었다. 그가 징원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데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충북 보은에 한 이름없는 선비가 살고 있었다. 선비는 벼슬은 한 적이 없었지만 학문에 능통한 데다 덕이 높아 고을 사람들은 그를 보통 김생원이라 했다. 하지만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어서 농사라든가 온갖 허드렛일을 김생원 내외가 손수해야 했다. 생원의 내외는 신혼의 단꿈을 보냈다. 비록 가난하지만 가난을 원망하지도 않고 인생의 참뜻을 오히려 학문하는 데서 찾았다. 생원의 부인 박씨도 당시의 보통 여인네들과는 달리 시서예악 (詩書禮樂)에 깊은 조예가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특별히 학문을 했다기 보다 그녀의 오라비들의 어깨 너머로 배운 글들이었다. 게다가 불교를 좋아해 틈이 나면 남편인 김생원과 함께 법주사를 참배하고 부휴선사로부터 법문을 듣기도 하고 불경을 구해 읽기도 했다.

  결혼한 지 10여 년 생원 내외의 나이도 서른을 바라보게 되었다. 온 집안에서는 아이가 없는 생원 내외를 동정했지만 오히려 김생원이나 부인 박씨는 태연했다. 그들은 아이가 생겨 자녀의 양육에 신경을 쓰기보다는 우선 그들만의 시간을 갖기를 더 원했다. 그러나 가끔씩 아이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전혀 안한 것도 아니었다. 생원보다 박씨가 더 아이를 원했다. 그것은 아무리 남편 김생원이 우선은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정말 아이가 없을 경우 뜻하지 않은 일들이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었다.

  점점 불안해지는 마음을 감출 수 없어 박씨는 법주사 부휴선사를 찾아뵙고 조그마한 지장조살상 한 분을 모시고 집에 돌아와 아침 저녁으로 기도를 올렸다.

  "지장보살님 !   지장보살님께서는 영험하시니, 저희 부부에게 자식 하나만 점지해 주십시오. 아들이든 딸이든 저희 내외가 적적하지 않고 정붙이며 살게 하옵소서. 대를 있는 것이 목적은 아니오나 아들이면 더욱 더 좋은 것입니다. 지장보살님 저희에게 가피를 주옵소서...."

  그러던 어느 날 박씨의 꿈에 웬 스님이 맑고 깨끗한 거울을 선물하며 말했다.

  " 부인께서는 이제 옥동자를 잉태하시게 될 것입니다. 이 둥글고 맑은 거울을 징표로 드리니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아드님을 낳으면 고이고이 잘 기르십시오. 반드시 우리 조선을 위한 크나큰 인물이 될 것입니다. "

  박씨가 말했다.

  "거울을 제게 주시니 여기에는 어떤 비밀이 숨어 있는지 말씀해 주시지요."

  "맑고도 둥근 거울이니 아드님의 이름을 `정경`이나 `징원`이라 하시면 되겠습니다. 산승의 생각에는 정경보다는 징원이 나을 듯 싶소이다만.... 자 그럼."

  " 징원이라고요? 아들도 낳기 전 이름부터 얻었으니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박씨는 남편 김생원에게 꿈이야기를 했고 그들 내외는 더욱 더 금슬이 좋아졌다. 과연 박씨는 태기를 느꼈다. 박씨는 그날로부터 태교를 실천했다. <소학>의 <명교편>을 펼쳐 놓고 읽던 그녀는 태교에 대한 방법은 알았으나 너무나 기뻐 들뜬 마음을 추스릴 만한 마음의 가르침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러던 어느 날 밖에서 염불소리가 들려 나가보니 한 스님이 삿갓을 깊숙이 내려 쓰고 탁발을 하고 있었다. 박씨는 본디 신심이 깊은 여인이라 스님네를 보면 한 번도 그냥 보내드린 적이 없었다. 스님에게 옷가지며 식량을 시주하자 스님이 말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부인께서 태교를 실천하시고자 한다면  다른 것은 그만 두고 이 <법화경>을 열심히 읽으십시오. 태교에는 뭐니뭐니해도 법화경이 으뜸이지요."

  박씨가 멈칫 놀라며 물었다.

  "제가 임신한 것을 스님께서는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부인의 태내에서는 징원이가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습니다. 고이 잘 기르십시오. 장차 크게 쓰일 겁니다. 나무관세음보살...."

  박씨가 스님을 알아보고자 가까이 다가가려 했으나 스님은 이미 자취를 감추고 스님이 섰던 자리에는 <법화경> 한 권이 떨어져 있었다. 박씨는 열 달 동안 지극정성으로 <법화경>을 읽었다. 경을 읽으며 그녀의 들뜬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아 그야말로 명경지수와 같게 되었다. 마침내 아이가 태어나자 이름을 징원이라 했다. 징원이는 총명하고 재롱동이였다. 다섯 살이 되자 벌써 <천자문>을 떼었다. 여섯 살에 <효경>과 <명심보감>을, 일곱 살에 <오언당음>과 <칠언당음> <소학> <자치통감>을 이수하였다.

  하루는 서당에서 돌아오자마자 방바닥을 뒹굴며 배가 아프다고 했다. 생원과 박씨 내외는 인근에 있는 의원은 물론 한양에까지 사람을 보내어 훌륭하다는 의원을 모셔왔으나 백약이 무효였다. 징원이는 점점 야위어 갔다. 음식도 입에 대지 않았고 잠도 제대로 자지 않았다. 벌써 열흘을 내리 앓고 있었다. 그때 밖에서 누가 찾고 있는 느낌이 들어 생원이 문을 벌컥 열었다.

  거기 삿갓을 깊숙이 내려쓰고 손에는 육환장을 들고 있는 스님이 서 있었다.

  김생원이 부인 박씨에게 말했다.

  "여보, 부인 탁발하는 스님이신가 본데 시주좀 하시구려."

  박씨가 광으로 들어가 쌀을 담아가지고 나왔다. 시주를 하면서 스님의 모습을 본 그녀는 하마터면 바가지를 떨어뜨릴 뻔 하였다. 꿈 속에서 본 그 스님이었다. 맑은 거울을 주면서 옥동자를 잉태하리라던 그 스님. 또 아이를 낳으면 징원이라 이름하라던 바로 그 스님이었다. 그때 스님이 법화경 한 권을 내어 보였다. 박씨가 경을 받으려 하는 순간 스님도 경전도 온데 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 바로 그때 징원이가 언제 아팠냐는 듯 훌훌 털고 밖으로 나왔다. 박씨는 비로소 징원이가 불가와 인연 있음을 알고 남편을 끝내 설득하여 아들을 부처님께 바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