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하는 불자로 거듭나자

월간 「불광」창간 20주년 기념 좌담

2009-07-22     관리자

 

사회자 바쁘신 가운데 이렇게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저희들이 이렇게 한 자리에 모인 것은 좀 더 바람직한 한국불교의 내일을 위한 준비를 하기 위한 것입니다.

  저희 불광이 올해 창간 20주년을 맞으면서 기획 특집으로 잡은 것은 ‘불교, 내일을 위한 제안’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대중교화에 힘쓰시고 계신 원로 큰 스님들의 기획대담을 1월호부터 계속해왔습니다. 불교가 이 시대에 맞게 생활화 대중화 되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이번 기념호를 통해서 어느 정도는 그동안 해왔던 얘기들에 대한 결론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불교는 수행이 우선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다 아시다시피 이 자리에 참석해주신 현능 스님이나 김정빈 선생님 그리고 대중불교에 김희균 편집장님은 모두 10년 이상을 치열하게 수행을 하시면서 누구보다도 수행의 중요성을 절감하며, 지금은 대중을 위해 회향하고 계신 분들입니다.

  우리나라 불교 현실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많은 고민과 함께 지금은 좋은 결론을 얻으시고 불교의 대중화, 생활화를 위해 힘쓰시는 분들이기에 한 말씀 한 말씀이 저희 불광 가족들에게는 좋은 지침이 되리라 믿습니다. 사회가 다소 길어졌습니다만 우선 주제에 들어가기 전에 그 주제에 필요성이 있는지 현재 한국불교의 현실부터 진단해 봤으면 합니다.

 

김정빈 현재 우리 한국불교가 수행하는 불자로 거듭나지 않으면 안된다는 데 절대적으로 동감합니다. 저희 한국불교는 조선시대의 암울했던 여건 아래 경허 스님의 선 수행 중심의 불교가 그나마 생명을 유지해왔습니다.

  그런데 근세 이후 기독교가 강력하게 유입되면서 산중불교도 도시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행해졌던 기복불교에서 벗어나 법설불교, 다시 말해서 경전과 교리를 중심으로한 설법위주의 불교가 행해졌지요. 그러나 이제는 이러한 법설불교에서 벗어나 수행불교가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불교의 핵심적 가치는 수행에 있습니다. 그것은 불교만의 특성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의 법설불교가 우리의 표충의식만을 파고 들었다면 이제는 심층의식으로 파고 들어가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수행에 의해서만 가능하지요. 특히 구심력이 약해지고 원심력이 강해진 현대인들에게도 수행은 꼭 필요한 것입니다.

 

김희균 저도 개인적으로나 불교 현장에 다니면서도 그렇고 수행에 관해서 그 필요성을 누구보다고 절감하고 강조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과연 한국불교의 재가 불자들이 수행이라는 것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 혹은 그 이전에 수행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가 할 때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름대로 수행하고 있는 분들도 계시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 계시고, 참선을 하거나 기도․독경을 하거나 염불을 하는 등 나름대로는 열심히 하는데 그것을 너무 막연하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반성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불교가 수행이 핵심이며, 누구나 해야 하는 것이라는 것조차도 모르는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하는 것이 수행인지도 모르는 것 같아요. 수행이라는 것을 뜬구름 잡는 것 같이도 생각하고 곡해도 많이 하고 있는 듯 합니다.

 

사회자 이 부분에서 우선 수행에 대한 정의부터 내려야 할 것 같습니다. 스님께서 말씀해 주시지요.

 

현능 일반적으로 수행하면 스님들이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절에 가면 기도하러 간다. 절하러 간다. 법회보러 간다 정도이지 수행하러 간다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수행을 좀 한다는 사람의 말을 들어봐도 수행의 결과만을 가지고 이러니 저러니 얘기합니다. 돈오돈수니 돈오점수니 하면서 말이지요.

  수행이란 그 말을 그대로 풀이하자면 닦을 수(修) 행할 행(行)입니다. ‘닦아 간다’는 의미가 있어요. 어디로 가느냐 그것은 부처님, 부처님 법, 부처님과 그법을 따르는 무리를 향해 가는 것이지요. 삼보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삼보께 귀의한다는 것 그 자체가 수행이지요. 말이 아니라 실지로 그렇게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내용 자체가 수행이지요. 진리를 믿고 따르며, 진리공동체 화합공동체로 가는것 그 자체가 수행이지요.

  가만히 살펴보면 우리 불자 중에 수행을 하지 않는 사람은 없어요.․․․․․․ 자신이 하는 것이 수행이라는 것 자체도 모르고 해요. 그리고 우리 불자의 상당수가 의례중심의 수행을 하고 있는데 그것을 기복이라고 매도 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것은 기복이 아니라 의례중심의 수행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의 원래 의미도 사실은 자기 자신을 위한다기 보다 타인을 위해 빌어주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기도의 몫도 나의 몫이 아니고, 기도에 의해 얻어지는 모든 공덕 또한 회향하여 되돌려 주겠다는 것이니만큼 그것 또한 이타적 수행이 아닐 수 없지요.그렇게 따진다면 불자의 모든 행이 수행이다 라고 정의를 내려야 할 것입니다.

  수행이란 보살의 성숙과정으로 닦아간다는 측면에서 이해하고 부처님의 인격을 닮아가며, 부처님과의 연결고리를 갖는 것이라고 해야지요. 그런데 그것은 알음알이로만은 불가능해요.

 

김희균 스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불자들의 행자체가 다 수행이다. 보살로 가는 길은 모두가 수행이다 하는 것은 다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덧붙인다면 방법은 어떤 것이라도 다 좋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염불․선․기도․절․독경․사경․주력을 하는데 늘 생생하게 깨어 있으면서 자기를 성찰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기도냐 수행이냐 하는 구분은 내 욕심을 채우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기도나 수행을 하는데 있어 그것이 자기자신의 이기심을 채우려고 하는 것이냐 아니면 이타심에서 발로하는 것이냐는 늘 점검해 보아야지요.

 

김정빈 기복을 하면서도 올바른 견해를 가지고 하면 수행이 되고 올바른 불제자가 될 것입니다. 기복이란 이기심을 충족시키는 것이고, 수행이란 이기심을 버리자는 것이니까요. 그 화해의 포인트는 역시 지도하시는 스님이나 법사님들의 수행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있어 그것을 분명하게 짚어줄 때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수행을 한다고 할 때 수행하는 사람의 겉모습이 과연 부처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바람직한 모습으로 나타나는가는 늘 점검해 보아야지요. 수행을 열심히 하는 사람은 기복불자만도 못하거나 아니면 비수행자만도 못해서는 안되지요. 수행을 하고 돌아서서는 일상생활에서 달라진 것이 없는 것은 수행법에만 몰두했지 수행을 통해서 달라진 것이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수행은 근본적으로 인격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인격의 변화란 곧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것이고, 그것은 곧 부처님의 원만구족하고 자비한 인격을 그대로 닮는다는 것입니다.

 

사회자 수행의 필요성은 거듭 말해도 그 중요성을 다하지 못할 듯 싶습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는 아무래도 구체적인 수행의 방법을 중심으로 얘기하지 않으면 안될 듯 싶습니다. 현재 우리 불자들이 일반적으로 하고 있는 수행법에는 선(禪)․염불(염송)․독경(간경)․만트라(다라니․주력)․절(예배) 등이 있습니다만 우선 현능 스님께서 현재 사천왕사에서 행하시고 있는 수행법을 중심으로 말씀해 주시면 합니다.

현능 저는 아직은 수행의 단계인지라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습니다만 분명한 것은 지도자의 확실한 수행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수행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늘 자신의 공부확인이 필요하고 지도자는 그 물음에 답해줘야 하니까요. 그렇지 못한 경우엔 경전 속에서 점검이 가능한데 그것은 일반 불자들에게는 어려운 일입니다.

  저희 사천왕사에서는 경전읽기, 즉 간경을 주로 합니다. 경전을 통해서 부처님과 만나자는 것이지요. 부처님의 성도 체험 메시지인 화엄경의 메시지를 체득하게 하는 것이 수행이라 생각하고 화엄경을 가까이 하면서 화엄경 경찬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화엄경의 본래 제목인 ‘대방광불화엄경’을 수십만번 염송하는 것을 주된 수행방법으로 삼고 있습니다. 불교가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부처님과 가까워져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경전과 가까워져야 한다는 이치지요. 과거 우리의 선인들이 염불을 통해 부처님과 가까워지긴 했으나 경전에는 무관심하지 않았나 합니다. 그래서 저희는 염불수행과 경전읽기를 동시에 하는 수행방법으로 화엄경 읽기와 경찬염송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특히 독경이 초심자에게 익숙하지 않을 때는 반야심경부터 국어책 읽듯이 하라고 합니다. 그렇게 수행을 조금씩 늘려가면서 반드시 매일매일 일과 수행을 하라고 강조합니다. 그것은 곧 부처님과의 만남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수행은 집중적이고 지속적으로 했을 때 인격의 변화가 가능합니다. 그리고 관세음보살을 염할 때는 『관음경』을 통해 관세음보살이 어떤 분인지 알고, 지장보살을 염할 때는 『지장경』을 통해 지장보살이 어떤 분인지 제대로 알고 해야 그 공덕도 더 크고 집중이 잘 되는 것이 분명하니까요. 이것 역시 경전독송과 이해를 함께 할 것을 권합니다. 그리고 일상 생활에서 일과 수행을 하되 특별기간, 예를 들어 100일이라든지 짧게는 토요일, 일요일 휴가 때를 정해 특별정진하는 가행정진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야 그 변화도 읽을 수 있고요.

 

사회자 선생님께선 요즈음 위빠싸나를 공부하시면서 대중을 위해 강의도 하시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김정빈 제가 불교에 관심을 가지고 수행을 한지는 10여년이 됩니다. 그 이전에는 불교공부를 지식으로만 하다 보니 번뇌망상만 자꾸 생기고, 현실적으로는 아무런 진전이 없고 자꾸 괴리감만 커졌어요.

  마음도 삭막해지고 건조해지는 듯했어요. 그러면서도 부처님의 논리에 수긍하고 있는 입장에서 불교를 떠날 수는 없었지요. 그러던 차에 한마음선원의 대행 스님과 인연이 되면서 신앙으로 전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또한 광의의 막연한 수행으로만 머물었고 구체적인 수행법을 찾지 못하다가 최근 위빠싸나를 하게 되었습니다. 위빠싸나를 소승선, 혹은 남방선이라고 하여 경시하는 경향이 있으나 현대인들에게는 설득력이 있는 방법이 아닌가 합니다.

  중간 과정이 인정될 뿐만 아니라 철학적 배경이 합리적이고 논리적이어서 현대인들의 사고방식에 맞아요. 역시 구경각은 화두선을 해야하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중간과정을 위해서는 위빠싸나를 해야겠다는 스님도 있습니다.

  수행의 테크닉 이전에 반드시 계율이 전제되어야 하고, 자기관조는 수행에 있어 필수적이라 할 때 무슨 수행을 하든지 위빠싸나는 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수행의 방법은 달라도 50% 정도는 다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어요.

  목표가 너무 멀다 보면 허무감에 빠지기 쉬운데 목표를 작게작게 잘라서 보면 처음과 끝이 없어지고, 순간순간에 보람과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도 좋은 방법이지요.

  화두선은 중간과정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상근기의 사람들은 문제가 없겠지만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깨달음이 집착이 되고, 그러다 보면 깨달음이 멀어지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집착하면 할수록 그것은 멀어지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서울에서 부산까지 간다고 할 때 우선 수원까지 가도 좋은 것 아닙니까. 간 만큼 좋은 것이지요. 부산은 못 가더라도 더 많이 간 것이 보람과 행복이지요. 스피노자의 말처럼 이상은 높게 생활은 단순하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수행방법은 확실하고 구체적인 것으로 하되 그 결과 결과에 기쁨과 보람을 느껴야 해요. 반야공이다. 뭐다해서 체험이 없는 상태에서 관념만이 들어오다 보면 갈증만 심해집니다. 그러나 설사 꼭대기는 가지 못하더라도 간 것만큼 남는다는 데 현실성이 있어 설득력이 있어요. 108배를 한 후 땀이 났다면 그 또한 결과가 아니겠습니다.

  위빠싸나를 대중을 위해 접목시켜보려 했으나 아직은 어려움이 많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미얀마에 가서 전문적으로 위빠싸나를 공부해 보고자 합니다.

  제가 수행을 통해 얻은 결과는 우선 매사에 진지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타심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그 이전에 제가 생각하고 말하던 이타심과는 다릅니다. 진정한 이타행,법보시는 체험적인 깨달음이 없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사회자 요즈음 젊은 스님과 일반 사회인을 중심으로 위빠싸나에 관한 관심이 많이 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구체적인 수행법을 듣고 싶지만 지면 관계로 다음 기회로 미루겠습니다. 김희균 편집장님께서는 그동안 개인적으로 다양한 수행을 해오셨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김희균 저는 큰스님들의 선(禪)법문을 많이 들으면서 제 자신에게 의심이 안 생긴다는데 많은 좌절을 했습니다. 근기가 박약하다고 고민도 많이 했어요. 그러나 그 고통 극복 방법으로 절을 하기 시작했어요. 108배, 1,080배, 3,000배. 100일정도 원을 세워놓고 해도 막바지에 가서는 좌절되곤 했지만 어쨌든 또 시작해서 10여년을 반복했어요. 그러면서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주력도 하고『지장경』과「보현행원품」독경 등을 반복해서 10여년을 한 것 같아요.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해보았지요.

  그러다가 7~8년 전쯤 벼랑 끝에 선 것만큼의 곤경에 처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갑자기 ‘백척간두에 섰을 때 진일보하라’는 말씀이 떠오르더라구요. 그러면서 기존의 제 인식의 틀이 완전히 바뀌면서 생활태도가 바뀌었어요. 어떤 사물을 봐도 사랑스럽고 연민스럽고 어떤 사람을 봐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 수행 과정 중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나는 정법이 아니면 안 간다”는 원이었어요. 사법(邪法)은 나를 정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지요. 물론 정법의 기준은 나의 수행이 이기적인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가지 믿음은 부처님의 말씀은 진리이기 때문에 이 길로만 가면 깨달음이란 꼭 얻을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있었지요.

  그 이후 많은 사람들은 만나서 취재를 하며 얻은 결론은 보통사람들이 수행이라고 생각하고 하는 수행이 서로 부분부분이 어느 부분과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방법을 택하든 올바르게 열심히만 할 수 있다면 어떤 길이든 그 길을 갈 수 있다고 믿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선행되어온 수행을 집중적으로 다해보아야한다고 생각해요. 현능 스님께서 화엄경을 택하신 것도, 그리고 김정빈 선생님께서 위빠싸나를 택하신 것도 많은 세월동안의 수행결과 자신의 근기에 맞는 것을 선택하였으리라 봅니다.

  그리고 또 하나 화두가 필요하구나 하는 생각을 최근 하게 되었습니다. 화두가 내 인생의 중심축이며, 사법의 침입을 막는 우주중심축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화두를 놓치지 말라는 큰스님들의 말씀을 이해하게 된 것이지요.

 

사회자 이렇게 여러분의 수행담을 듣다보니 수행의 구체적인 방법이나 공덕(결과)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나온 것 같습니다. 부처님께서 8만 4천 가지로 법을 설하셨듯 우리의 수행방법도 다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서로 다른 방법으로 수행하고 있는 분들의 수행법이 인정되는 풍토가 조성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어느 것 하나 월등하거나 열등한 것이 없다고 보아야 하지 않나 합니다.

  수행의 방법과 길이 다르다 할지라도 궁극적인 도달점은 하나일 것이며 그 깨달음의 맛 또한 같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관념화된 한국 불교, 의식과 수행방법 또한 제각기여서 어렵다는 일반불자에게도 이러한 결론은 어느 정도 대답이 되리라 믿습니다.

  각자가 하는 방법대로 열심히 수행하고 아직 수행을 하지 않는 불자가 있다면 자신에게 맞다싶은 방법을 택해 열심히 수행을 하게 된다면 오늘 좌담은 작은 성공을 거둔것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매일 뿌리고 매일 거두는 일과수행이 되어야 한다는 뜻에서 참고로 불광법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불자수행일과표를 소개합니다. 감사합니다.

불자수행일과정진 순서

 ...1.입정

3분간 입정을 합니다.

...2.삼귀의

합장하고 삼귀의를 하면서 반배씩 합니다

...예불문

...3.독경

「천수경」「반야심경」「금강경」「지장경」

「보현행원품」중 시간과 기도사정에 따라서

경전을 택해서 독경합니다

...4.바라밀염송

‘마하반야바라밀’염송 혹은 ‘석가모니불’

‘관세음보살’‘지장보살’등 기타 염불 정근을 화되

바라밀염송을 할 때는 마하반야바라밀염송을 왼 후에 시간에 맞추어 염송 회수를

정합니다

...5.축원

기도사정에따라 축원중에 하나를 택해서

다 같이 읽습니다. 「불자일과수행요전」에 없는

축원 내용은「법회요전」에서 택할 수도 있습니다

...6.사흥서원

합장하고 사흥서원을 하면서 반배씩 합니다

*100일 기도등 특별기도 때에는 축원 다음에

108예경을 할 것을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