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중흥을 위한 승단의 역할

특집 / 한국 불교중흥의 전망과 과제

2009-07-20     관리자

 단(僧團)의 정체성(定體性)은 기본적으로 부처님 당시의 수도원적 성격에서 그 전형을 찾을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이후 전개된 불교의 역사를 통하여 많이 변화되어 왔다. 예컨대, 인도에서는 대승불교운동과 때를 같이하여 승단이 재가불자에게 구체적인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중국에서는 유교의 충효사상의 영향을 받아 승려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한국에서는 삼국시대 이후 승단이 왕권 내지는 귀족집단과 깊은 관계 속에서 귀족불교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들의 이익을 대변해 왔다.

 그러나 이와같은 역사과정 속에서도 면면히 숭고하게 이어져 오는 정신은, 승단이 청정과 평등과 화합을 기초로 수도하며, 그에 따라 중생을 교화하는 사명을 가진 단체라는 것이다.

 한국적 현실에서, 불교중흥을 위한 승단의 역할도 크게는 이와같은 맥락속에서 파악되어져야 한다고 본다.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 참여함은 물론이고, 역동적인 미래의 비젼을 제시하여야 함은 현재 불교가 안고 있는 여러 난제 가운데 어느 것보다도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현재 교단이 처해있는 상황으로 비추어, 이들이 원만히 해결 · 수행되리라 낙관할 수 만은 없다. 왜냐하면, 이조 불교가 역사적 공백을 겪음으로 인하여 참다운 승려의 상에 동요를 이르켰고 한일합방 이후 승려에 대한 전문교육의 부재는 승단이 현실 정치 · 사회 · 경제 · 문화 등 모든 면에 탄력적으로 대처하는 능력의 부재를 초래하였으며, 이에 더하여, 출가자와 재가신자 사이의 윤리는 권위와 순종이라는 비불교적 관계로 전락하고 말았다.

 불교의 중흥은 근본적으로 이에 대한 심각한 반성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앞에서 지적된 수도인의 상에 대하여는 교단의 일각에서 심각한 반성이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승단의 정통성은 역사적인 맥락에서 바라보면 구도정진하여 깨달음을 얻은 후 중생을 교화해 온 것에 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생명력을 지닌 것이었다. 이에 때로는 깨달은 선지식은 기존의 사회질서 변혁의 주체자로서 역할을 하기도 하였고, 사회의 안정기조 구축에 공헌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숱한 역사속에서도 교단은 깨달은 자 중심으로 뭉쳐졌으며, 또한 수행자는 깨달은 바에 의하여 중생을 제도한다는 원칙은 일관되어 온 사실이다.

 그러나 역사적인 변화를 연기의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하여, 한국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수행과 교화의 병행을 주장하는 대승불교 본래 정신을 망각하고 이타보다는 수도 · 자리중심으로 변화된 것조차 긍정적으로 평가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새로운 승가상의 모색이 절실히 대두되게 된다.

 불교는 한국에 전래된 후 신라와 고려시대를 통하여, 다양한 사회현상을 주도 · 포용하는 문화복합체로 발전하였다. 그러므로 불교라는 이름으로 대표되어진 것 속에는 상대적인 가치체계나 삶의 방식을 갖는 것들이 공존하여 올 수 있었다. 그가운데 일변에서는 자기 수행에만 치우치고 적극적인 교화활동 · 사회활동을 망각한 바도 있었다. 그런데 이것은 이조시대의 억불 과정에서도 심각한 피해를 입지않고 근대에 이어져 왔다. 반면에 대사회활동이 왕성했던 여타의 불교공동체는 조정의 정책으로 거세되었다. 이와 관련된 일련의 억불정책은 사회적 활동이 미약했던 단체를 중심으로 통 · 폐합하였다는 것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구한말에 이어진 불교가 매우 폐쇄적이었으며, 한반도에 맞게 세련되어져 오던 승단으로부터 단절된 형태의 것이었다고 하는 데에 비판의 소지가 있다. 게다가 개항과 함께 들어온 서구의 막대한 자본은 기독교를 필두로 선교에 이용되어 불교의 상대적 위축을 가속화시켰다. 그러므로 이와같은 사실을 고려하여 현재 우리 승단이 안고있는 수도인의 상은 새롭게 정립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승려들의 선적인 수도만을 불교로 오인한다거나, 이와 관련된 모든 출세간의 관심만이 옳은 것이라는 편견은 버려야 한다. 진정한 출세간을 이루는 길은 연기를 바탕으로한 관계성의 성찰이어야 한다. 보살의 행원을 다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공동체 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교화와 전법의 사명이 선적인 탐구에 못지 않게 중요시 되어야 하며, 동시에 이것이 출가인의 삶에 대한 표본으로 인식되고 실천되는 것이 시급하다고 본다.

 불교의 중흥을 이루기 위해서는 교화의 주체인 승단이 그 구심점으로서 역할을 무난히 수행하여야 한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 승려의 상이 정착되고, 그에 따라 전법포교에 대한 관심이 모든 종도들에게 사명의식으로써 인식의 공유를 이를 때, 불교중흥을 위한 가장 이상적인 교단의 형태가 된다.

 이를 이루기 위하여 우선적으로는 승려들의 의식이 깨어나야 한다. 이는 모든 종단의 관계자나 불교의 현대화에 관심을 갖고 있는 분들이 한결같이 동의하는 사실이다. 한편, 승려의 세대 단절에서 비롯된 일부 승려의 보수적인 태도는 이를 가로막는 심각한 장애요소로 작용한다. 사회에 대한 무지나 무관심이 미덕일 수는 없다. 교의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현실에 적용시키는 노력이 계속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승려들 사이에는 아직도 세간사에 대한 무관심을 조장하는 행위가 많다. 이는 승려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세대차와 관련된 것으로 반드시 극복되어야 하는 대상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현대화에 대한 신념이 확실하지 않는 자들이 자신의 현재 상황의 변화을 두려워한 나머지, 혹으 자신에게 닥칠지도 모르는 불이익에 대한 우려로 말미암아 개척의 의지 · 실행에 있어서 매우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자신을 상대화 · 객관화 시키는 노력속에서 사회 · 문화전반에 관한 기본적인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불교교육의 요체가 되어야 한다.

 연기란 관계성을 성찰하는 데 그 진미가 있다. 그러므로 개인의 해탈도 대중속에서 파악되어져야 한다. 불교는 이러한 고유의 특성을 갖고 있으므로, 이웃이나 모든 중생에게 삶의 진정한 의미를 깨우쳐주고, 그들의 희노애락을 같이하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종도들의 의식을 개인적인 안위나 무기력으로 부터 깨어나게 하는 교육에 있다.

 보살도의 실천은 개인의 안심입명을 위하여 정진하는 것보다 불교적이라는 확신이 종단의 구성원들 사이에 넘쳐 흘러야 한다. 그리하여, 포교 · 전법사가 보살로서 그 신뢰를 회복하고 상징적인 해탈을 현재 이 땅에서 구현되도록 모두가 노력해야 한다.

 불교가 대사회적인 영향력을 갖기 위해서는 조직의 강약정도에 따라 그 단체의 정체성 실현여부가 달려있음에 비추어, 조직을 강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의 창조적인 능력을 말살하는 것 이어서는 안되며, 범불교도의 질적 향상으로 인한 자발적인 종단 참여 자세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양적인 조직 확대도 수반하여 명실상부한 불교조직이 될 것이다.

 사원의 경제는 기본적으로 시주에 기초하고 있으므로, 사회에 재환원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갖고 있다. 시주물에 대하여는 누구도 주인이 될 수 없다.

 불교의 대중화 내지는 중흥을 이루는 것이 이전 역사에서 나타난 번다한 의식주의(Ritualism)의 재현 이어서는 안된다. 또, 관제적인 힘을 갖는 것에서, 이단의 애매한 포용에서 불교의 중흥이 시작되어서도 안된다. 불교가 역사적인 상황속에서 변화되어온 사실이 연기 혹은 무상으로 호도되어서는 더우기 안된다. 불교가 과거 이 땅에서 누렸던 영광은 이미 지난 과거의 일이다. 그러므로 이는 건전한 비판과 검토를 거친 후에야 우리에게 교훈이 될 수 있다. 거기에, 승려가 사제적인 권위만을 앞세우지 말고 청빈과 신뢰와 자비를 바탕으로 이웃과 더불어 살 때 불교의 중흥은 약속된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