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에서 활약한 우리 스님들

-신 라 편(4)-

2009-07-20     관리자

인도 구법(求法)의 먼 길

(1)구법행로:
우리의 삼국시대에 많은 스님들이 서쪽의 중국땅에 불법(佛法)을 공부하기 위하여 구법의 길에 나섰다. 우리 스님들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더욱 서쪽으로 불법 구하는 발걸음을 옮겨갔다.

서역(西域)지방으로 가는 중국의 관문인 돈황(敦煌)으로부터 옥문(玉門)을 거쳐 죽음의 모래바다<流沙>라고 하는 타클라마칸사막을 가운데에 두고, 남쪽과 북쪽의 두 갈래 길이 전개된다.

북쪽은 천산산맥 남쪽의길<天山南路>인데 이 통로의 대표적인 불교국은 구자국(龜玆國)이며, 유명한 구마라집(鳩摩羅什) 법사의 본국이 된다. 남쪽은 곤륜산맥 북쪽의길<崑崙北路>인데 그 길목의 불교문화 중심지는 널리 알려진 우전국(于闐國)이다.

그 두 길이 모이는 지역에 소륵(疏勒)이라고 하는 불교문화 동점(東漸)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지방이 있다. 이 소륵에서 서쪽으로 향하자면 큰 산맥이 가로막아 섰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총령(葱嶺) 곧 파미르고원이다. 이 총령은 옛날 중국에서 서역지방으로 왕래하는 가장 중요한 통로였는데, 특히 불교문화가 중국에 들어온 최초의 유일한 길목이며 관문인 것이다.

맨 먼저 중국에 불교문화를 전한 인도 및 서역의 스님들이 이 길을 통해 들어왔고, 나중에 바닷길이 열리기까지는 중국의 구법승이나 불교의 서역(인도포함)인들이 거의 모두가 이 길을 통해오고 갔다. 따라서 삼국시대 우리 스님들이 중국에 갔다가 다시 인도<天竺>방면으로 구법의 나그네 길을 계속하였을 경우에도 거의가 이 길을 지나갔다.

앞 고구려 장에서 본 바 있는 고구려의 현유(玄遊)스님이나, 이제 여기에서 다루고자 하는 신라의 여러 스님들이 대부분 그러한 경로를 택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예외가 없지 않으니 다음의 두 경우를 들 수가 있다. 같은 삼국시대이면서도 앞의 백제장에서 본 바 있는 백제고승 겸익(謙益)법사는 그러한 통로를 전혀 밟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중국에 갔다가 다시 인도로 향한 것이 아니고, 아예 바닷길로 해서 곧장 인도쪽으로 가서 구법하고 귀국하였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또 신라의 혜초(慧超)법사는 중국에서 공부하다가 인도로 향하였지마는 그 통로를 경유하지 않고, 바닷길로 해서 인도에 간 것으로 되어 있다.

그 역시 신라스님이기는 하나 그는 삼국시대가 아닌 통일기의 인물이므로 그 당시 중국에서 많이 이용한 항로(航路)편을 택하였던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한 삼국시대의 신라 스님으로 인도에로의 구법길에 오른이가 매우 많았을 것이나, 오늘날까지 그 이름이 전하는 이로는 다음의 몇분에 지나지 않는다.

(2) 아리야발마(阿離耶跋摩) 법사:
신라스님인 아리(難으로 된 곳도 있음) 야발마법사가 언제 중국으로 들어갔는지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 수가 없다. 그는 중국의 장안(長安) 광협사(廣脇寺)에 머물다가 정관(貞觀 : 627~649)년 중에 출발하여 인도로 향하였다.

그가 험하고도 먼 길에 셀수 없는 어려움을 무릅쓰고 인도에 갔던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첫째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正敎>을 더욱 원천(源泉)적인 곳에서 구하고자 함이었고, 다음에는 부처님이 끼치신 발자취<遺跡>를 직접 찾아가서 예경(禮敬)을 다하고자 함이었던것이다.

그가 순례를 거의 마치고 자리를 잡았던 곳이 나란타사(那爛陀寺)였다. 나란타사는 중인도의 왕사성(王舍城)북쪽에 있었던 유서깊은 절이다. 서기 5세기 초쯤에 당시 인도의 굴다왕조(崛多王朝)의 제일(帝日. Sakraditya)왕이 삼보(三寶)를 받들고 갈라사반사(曷羅社槃社, 北印度僧)스님을 위해 이 절을 세웠으며, 그 뒤 역대 왕들이 계속해서 증축하여 오래지 않아 대가람(大伽藍)으로 번창하기에 이르렀다.

아리야발마가 이 절에 도착하였을 때에도 이 나란타사는 인도불교의 중심지가 되어 있었다. 여기에 머물면서 그는 많은 율전(律典)과 논장(論藏)을 열람하였고, 여러 중요한 경전들을 초록(抄錄)하고 또 빼껴썼다. 물론 고국 신라땅에 가지고 가기 위하여서였을 것이다.

그는 몹시도 고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는 그 나란타 절에서 이 세상의 삶을 마쳤다. 그 때가 언제인지는 자세치 않으나 그의 70여 세 되는 해의 일이었다는 것이다.<大唐西域求法高僧傳 卷上>

(3)혜업(慧業)법사:
혜업법사 또한 언제 신라에서 중국으로 건너갔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아리야발마와 비슷한 정관년간(貞觀年間)에 중국을 떠나 서역지방으로 향하였다.

인도의 보리사(菩提寺)에 머물면서 부처님의 끼친 자취를 배관(拜觀)예경(禮敬)한 다음 그는 당시 불교학연구의 중심지이며 오늘의 불교대학이라 할 수 있는 나란타사로 갔다. 거기에서 오랫동안 강의를 듣고 경전을 읽으며 공부하다가 60여 세에 그 절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뒤 당(唐)나라의 유명한 구법고승 의정(義淨: 635~713)법사(大唐西域求法高僧傳의 저자)가 나란타사에서 당나라 책<唐本>을 찾아보다가 우연히 양섭론(梁攝論, 梁의 眞帝가 번역한 攝大乘論釋)의 밑에,

「불치목의 나무 아래에서 신라승 혜업이 베껴쓰다.<在佛齒木樹下 新羅僧慧業寫記>」라고 적힌 것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그 절 스님에게 혜업스님에 관한 것을 물어보았다는 것이다. 그 나란타절에는 혜업법사가 한자로 베껴쓴 책과 함께 범어(梵語) 원본을 옮겨쓴 것도 간직되어 있었다고 한다. <앞의 求法高僧傳 上>

(4)현태(玄太)법사:
아라야발마처럼 현태스님도 살바신야제바(薩婆愼若提婆)라고 하는 범어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문 뜻으로는 일체지천(一切智天)이라고 한다. 그 역시 언제 중국에 건너갔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영휘(永徽; 650~655)년간에 중국에서 출발하여 티베트<吐藩>쪽으로 가서 니파라(泥坡羅)를 거쳐 중인도에 도착하였다.

부처님께서 성불하셨던 보리수에 절하고, 많은 경전과 논전(論典)을 두루 섭렵하였다. 그는 다시 중국쪽으로 가기 위해 토곡혼(吐谷渾)까지 갔으나, 거기에서 당나라의 도희(道希)법사를 만나 다시금 되짚어서 대각사(大覺寺)에 돌아왔다. 그 뒤에 당나라로 돌아갔으나 어디에서 언제 입적하였는지를 알 수가 없다고 한다.<앞과 같음>
 
(5)현각(玄恪)법사와 두 신라스님:
일찌기 중국에 들어갔던 신라의 현각스님은 역시 정관(貞觀)년중에 당나라의 현조(玄照)법사와 함께 인도여로의 구법길에 올랐다. 대각사(大覺寺)에 이르러 부처님께서 끼치신 자취에 예경하고 바른 가르침을 찾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는 병을 얻어 거기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나이 겨우 40을 지났을 때였다고 한다. 그 밖에 이름이 알려져있지 않은 두 사람의 신라스님이 있었다. 그들은 중국의 장안(長安)을 떠나 멀리 남해(南海)쪽으로 내려와서 배를 타고 바닷길로 인도를 향해 출발하였다. 그들은 실리불서국(室利佛逝國)의 서쪽 바로사국(婆魯師國)에 도착하였으나, 병을 얻어 함께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앞과 같음>

(6)혜륜(慧輪)법사:
범어 이름을 반야발마(般若跋摩)라고 하였다는 혜륜스님은 일찍이 신라에서 출가하고는 곧 인도 구법의 길에 뜻을 두었다고 한다. 언제인지는 모르나 그는 비록 배를 타고 중국 남쪽의 해안에 도착하여, 걸어서 장안(長安)으로 갔다. 거기에서 그는 당나라의 현조(玄照)법사를 따라 인도를 향해 출발하였다.

물론 그 일행중에는 신라의 현각법사도 끼어 있었다. 인도에 도착한 그는 부처님의 성적지(聖跡地)를 두루 순례하였다. 그리고는 암마라파국(菴摩羅跛國)에 있는 신자(信者)의 절에 머물었다. 거기에서 10년을 지낸 뒤에 그는 동변(東邊)의 북쪽 도화라승사(覩貨羅僧寺에) 머물었다.

이 절은 본래 도화라국(覩貨羅國, 葱嶺의 서남쪽 박슈河의 상류에 있었던 나라)사람들이 본국의 스님들을 위해 세운 절로서, 매우 재산이 많고 풍요하여 공양과 시설이 더할 수 없이 풍족하였다는 것이다.

도화라의 스님들 절이라고 해서 도화라승사라고 하지만 실은 그 절 이름이 건다라산차(健陀羅山茶)였다. 혜륜스님은 이 절에 머물면서 범어를 잘 하였고 구사론(俱舍論)을 읽었다. 그가 그 곳에 왔을 때는 나이 아직 40세 정도 밖에 안 되었다고 한다.

그 북쪽의 스님들이 오면 모두 이 절에 머물면서 주인이 되었다고 하는데, 혜륜스님도 이 절에 머물면서 공부하다가 삶을 마친 것 같으나 그 자세한 것을 알 도리가 없다. <앞과 같음>

지금까지 보아온 인도 구법의 신라스님들 이야기는 모두가 당나라 의정법사가 저술한 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에 수록되어있다. 상하 2권으로 되어 있는 이책의 상권에 들어있는 부분들을 차례대로 옮겨본 것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권4, 의해(義解) 5 귀축제사(皈竺諸師) 조에는, 이 구법고승전의 신라스님 부분만을 간략하게 옮겨놓고 있다. 제목 그대로 「인도<天竺>로 간 여러스님들<皈竺諸師>」인 것이다. 그밖에도 많은 스님들이 인도구법의 길에 올랐겠지마는, 신라로 돌아왔다는 스님의 이름을 아무 문헌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