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광>! 그 전법행원의 20년

불광 20년

2009-07-19     관리자

  오백 년 동안의 억불의 기간과 왜곡된 왜색불교의 폐해를 일소 하려는 헌국불교의 정화운동이 일단락되고 새로운 불교의 기운이 서서히 움트던 1974년 11월, 월간 <불광>은 종단의 중진이셨던 광덕 스님의 원력과 현대적인 포교의 의지로 창간되었다.

  당시의 현실에 있어서 불교언론이란 각 종단의 기관지가 아니면 찾아보기 힘들었고, 몇몇 개인이 발행하는 또 다른 잡지들은 불교를 대변하거나 불교의 이익을 앞세우는 전법 포교지라기보다는 여러 여타의 잡지 중에서 불교를 표방하는 수준에 머무는 일면을 보여왔었다.

  전법, 포교의 신행지 <불광> 창간

  이런 형편에서 불광의 창간은 하나의 사건이었으며 전국을 망라하는 불교계 전체의 관심의 초점이었다. 창간 당시의 이야기를 여기 두 분의 기억을 통해 들어보자.

  "... 물론 당시에도 많은 불교 잡지들이 나오고 있었습니다만 <불광>의 창간은 많은 불자들에게 있어 가뭄의 단비를 기다렸 듯한 반응을 받았습니다. 대한불교진흥원과 대원회를 맡고 있었던 장경호 거사님께서는 직접 전화를 해오셔서 `진작에 이런 잡지가 나왔어야 했는데....`라며 <불광>의 창간을 반가워해 주셨고, 쌍용그룹 김석원 회장의 모친이셨던 김불국생 보살님께서는 창간 이후 깊은 애정을 가지고 직접적인 도움을 많이 주셨습니다.

  하지만 가장 힘들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재정문제였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큰스님께서는 어느 사찰의 주지도 아니었고 단체의 대표도 아니었습니다.

  대각사 한쪽 골방을 사무실을 겸해서 쓰시며 전화도 한 대 없을 때였으니까 말입니다. 잡지사가 전화도 한 대 없이 창간되었다고 한다면 요즈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일겁니다. 이 재정문제의 대부분은 큰스님의 종단내에서의 신망에 힘입어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지방의 큰 사찰들에서나 큰스님들께서 많게는 몇백 부에서 몇십 부에 이르는 법보시를 해주셨고 필자들도 원고료의 다소를 문제삼지 않고 흔쾌히 원고를 보내 주셨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불교언론이 갖는 역할이 세 가지가 있다고 봅니다. 첫째는 비신자들에게 전법하는 것이며 둘째는 초보신자들에게 교육하고 신행지도 하는 것이고 셋째는 교계내의 정보를 전달하고 교양지로서의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불광>은 큰스님께서 가지고 계셨던 종단 내에서의 신망과 새롭고 참신한 바라밀 사상에 힘입어 교계에서는 처음으로 불교언론 본래의 역할을 수행하는 불교잡지가 된 듯합니다."

                                                              ㅡ 지환 스님 (범어사)

  "나는 불교를 잘 몰랐습니다. 막연히 동경만 하고 있었지요. 그러다 우연히 큰스님을 한 번 뵙고 반야바라밀 설법을 들었습니다. 설법을 듣다보니 내 주의를 감싸고 있던 미명이 환하게 벗겨지는 걸 느꼈습니다. 그래서 이 설법을 보다 널리 펴는 것이좋을 듯 싶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마침 <월간>불광의 창간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나는 창간 작업에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뜻을 피력하고 내가 하고 있었던 인쇄쪽을 책임졌습니다. 그래서 창간에서부터 오늘날까지 <불광>의 인쇄를 해오고 있는 겁니다.

  <불광>은 창간 즉시 전국에 배포되었고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말하면 반야바라밀 사상이 전국적인 호응을 받은 것입니다. 전국에 불광 형제, 바라밀 형제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이 사람들은 일 년도 채 되지않은 다음 해 10월에 대각사를 인산인해로 만들었던 불광 목요법회를 만드는 주역이 됩니다. 다 잘 알다시피 그 법회는 오늘의 불광 법회를 만드는 근간이 되었습니다. <불광>을 통해 큰스님을 알았던 사람들이 큰스님 설법을 직접 듣고 싶다는 바람에서 시작되었던 불광법회. 사람들 가슴 속에 반야의 씨앗을 뿌리고 보현행의 원을 심은 것은 바로 월간 <불광>이 했던 역할입니다."

               ㅡ 박충일 사장님 (불광법회 회장)

  <불광>은 창간 이후 그야말로 전법, 신행지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나간다. 다른 잡지들이 해보지 못한 교리문답이나 포교전략 등에 대한 특집 기사를 싣기도 하고 경전을 현대적으로 풀이해서 연재하기도 했다. 이런 기회들은 뒤에 창간된 다른 잡지들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불교잡지가 어떠해야 하는가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되기에 충분했다.

  제 1기, 불광을 만든 사람들

  이야기의 편의를 위해 대략적으로 창간에서 70년대 말까지를 불광 제1기로 본다면 이 시기에 불광은 전법, 신행지로서의 불교적 역할과 일반 잡지로서 가지는 보편적인 대중매체로서의 성격을 잘 조화내 내면서 불자대중에게 확실하게 뿌리 내린 시기였다.

  이 가장 힘들었던 시기 동안 <불광>을 한군 한권 펴내며 앞으로 가야할 <불광>의 길을 열었던 사람들 중에는 초대 편집장이었던 신지견 씨, 또 위에서 기억을 더듬어 주셨던 지환 스님, 그리고 초기 업무를 총괄했었던 지오 스님 등이 있었다. 또, 해조 거사님과 대학생 신분으로 `봉투 쓰는 걸 도와드리러 왔다가 졸업 후에 첫 직장으로 삼아버린` 홍성복 현 동방불교대학 교학처장, 79년 단행본 출간과 더불어 기획위원을 맡았던 전보삼 신구 전문대학 교수도 이 시기 동안 <불광>에 몸담았던 분들이다.

  이외에도 수많은 분들이 있었지만 보이지 않게 물심으로 도움을 주신 칠보사의 석주 큰스님과 우여곡절 속에서도 꾸준히 나오게끔 한 박충일 사장의 역할은 이구동성으로 꼽는 불광 20년의 수훈감이다.

  현재의 불광이 창간 당시의 모습 중에서 닮아야할 가장 큰 것 중에 하나가 바로 필자의 문제인 듯하다. 이 시기동안 모셔졌던 필자의 면면을 살펴보면 당시를 대표하는 내로라할 선지식, 석학, 전문인들이었다. 경봉스님을 비롯해서 운허 스님, 운학 스님, 석주 스님, 학산 스님, 성철 스님, 일타 스님, 고산 스님, 지관 스님 등과 조명기, 양주동, 서정주, 김성배, 이종익, 이숭녕, 황수영, 이기영, 이동식, 김용운 박사 등이 연재로 혹은 수차례에 걸쳐 옥고를 넘겨주셔서 독자들과 만날 수 있었다.

  균형과 안정화를 위한 노력

  제 1기가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렸던 시기라고 할 때, 제2기는 균형을 이루고 안정화를 꾀한 내실의 시기였다. 창간 후 5~6년이 지난 후였으므로 일정 정도의 방향을 수정하거나 경영이나 편집 등에 있어서 대폭적인 손질이 필수불가결한 시기였다. 사회도 급격하게 변해 나가던 80년도에서 80년대 중후반기까지가 <불광>에 있어서도 다른 모습을 준비하고 변해나갔던 시기였다.

  먼저 칼라텔레비전의 보급으로 천연색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그에 걸맞는 정도의 배려를 할 필요가 있었으며, 모든 매체들이 다양성을 추구하고 내용의 심도보다는 얼마나 많은 정보를 충족시켜 주느냐에 독자들의 관심이 기울어짐에 따라 나름대로의 대응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제2기 전 과정 동안 주간으로 있으면서 최초의 흑자살림을 이끄시고,< 불광>의 중간 도약을 이끄셨던 지범 거사님께 이야기를 들어보자.

  "제가 정식으로 <불광>을 맡은 것은 80년 3월이었습니다. 그 전에도 전혀 관여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맡고 보니 최우선으로 해야할 과제가 바로 경영합리화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발행되는 부수에 비해 회수되어 들어 오는 것은 미미했습니다. 그래서 과감하게 정기 구독자들에 대한 정비를 했는데, 그런 과정에서 키워진 외형을 오히려 깎아먹는다는 얘기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 다음에 한 일은 잡지의 일반적인 성향에도 충실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의욕적으로 앞서가는 잡지의 모습을 가지려고 노력했습니다. 일반 잡지와의 경쟁에서도 뒤떨어지지 않는 것이 중요했지요. 읽히지 않는 잡지는 그   속에 아무리 좋은 내용이 들어 있어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여주는 잡지로 거듭 나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중, 제가 할 수 있는 중에 사진이라는 매체를 적극 활용했습니다. 질좋은 사진들이 내용 중에 자주 보이면서 보여주는 잡지라는 슬로건에 어느 정도는 일조를 했다고 자부합니다.

  또, 단행본 출판을 적극적으로 펼쳐나갔습니다. 큰스님께서 연재하셨던 글 중에서 불자들의 신행생활에 도움이 되는 글들을 추려서 책으로 엮어내니까 잡지의 위상도 높고 넓어지고 단행본 자체에 대한 호응도 꽤 활발하게 보여지곤 했습니다."

  시대적인 상황의 변화와 자체의 필요성 절감에 따른 변모가 실제로 이 시기에, 몇 가지 간과할 수 없는 사실들로 나타난다. 첫째로 84년도 부터 전면 가로쓰기를 실시했다. 또, 부분적으로 활자가 아닌 사진식자가 보이기 시작한 것도 이시기부터이다. 두번째로는 사진원고들의 질이 괄목할 정도로 좋아졌다는 점이고 셋째로 연재물의 연재기간이 늘어났다는 점이다. 연재물 중에서 처음으로 만화를 실었던 `달공거사`는 이후 93년도에 연재를 마칠 때까지 13년 동안 (중간에 잠시 쉰 적이 있지만)이나 연재되었다.

  그외에도 활동적인 취재기사가 눈에 띄기 시작했으며 기자의 기명기사가 처음으로 등장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필자들로서는 `노사의 운수시절`이란 난을 통해 운성 스님께서 근대 불교의 뒤안 얘기를 해주시기도 했고, 종정이신 성철 큰스님께서 `해탈에 이르는 길`이란 제목으로 근 2년 동안 연재설법을 해주셨다. 또 `불자의 예법`란을 김무득 선생께서 메워주셔서 예절과 의식 절차에 대한 통일성을 기하는데 도움을 주셨고, 현재 달공 조홍식 박사께서 좋은 글로 연재하고 있는 `선심시심`란을 동국대 이종찬 교수께서 무려 8년간이나 맡아 주시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최초로 이희익 교수께서 <경덕전등록>을 해설 연재한 것도 커다란 성과의 하나로 꼽힌다.

  이때 <불광>에 몸담고 있었던 사람들로서는 현재 추리소설가로 활약 중인 권경희씨가 어린 나이로 기자 역할을 3년간 했었으며, 김평수 광고부장, 김희증 총무부장, 허성국 영업부장 등은 그때부터 현재까지 15~6년간 <불광>에 몸담고 있기도 하다.

  미래를 건설하는 <불광>의 역할

  87년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회에서는 변화된 현실이 서서히 또다른 방향을 모색하고 있는 기간이다. 흔히들 90년대는 불확정성 시대, 다가올 21세기를 맞이하러 가는 안개 속 같은 시기라고 하며 무엇 하나 예측할 수 없는 현실을 탓한다. 하지만 공동의 이상이 무너지고 가치판단의 기준이 사라졌으며 각 개인은 파편화되어 극심한 개인 중심의 굴레 속으로 스스로를 가둘지라도 불교의 진리는 금강석처럼 단단하게 빛나고 있다.

 <불광>의 제3기는 의연하고 꿋굿한 자기행보를 해나왔다. 이제는 더 이상 불교잡지가 일반잡지의 수준을 따라 잡기에 급급한 모습일 수 없었다. 사회를 제도하고 이끄는 종교의 역할이 그대로 적용되어야 하는 시기였다.

  이 기간에 주간을 맡았던 송암 스님의 말씀을 들어 본다.

  "<불광>은 가치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큰스님의 사상을 펼치는 수만 독자의 지상 법회임을 명심해야합니다. 어느 법당이 매달 3만에 육박하는 불자들을 대상으로 법회를 볼 수 있습니까? 저는 <불광>을 만들면서 그런 자부심으로 했습니다.

  20년 전, 창간 당시와 비교해 볼 때 독자들도 변했고 시대 상황도 변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사람들과 상황을 예리하게 읽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거기에 맞는 잡지로서 쉴새없이 변모해 나가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변하지 않는 창간정신, 반야바라밀 사상을 변해가는 현실에 맞게 어떻게 전달하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그 방법들로는 첫째는, 전문화된 인력의 확보로 현실을 정확하게 읽어내는 것입니다. 둘째, 읽어낸 현실을 토대로 해서 전법, 포교의 다양한 방법들을 강구해 내고 또 그것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셋째 유연한 대응력으로 보다 넓은 부분으로 영역을 확대해 나가는 것입니다...."

                                                         ㅡ 송암 스님 (도피안사)

  이시기에 이르러 <불광>은 비로소 다른 일반잡지와 서로의 장점을 주고 받을 수 있는 대등한 입장에 서게 되었다. 다양한 내용과 거기에 걸맞는 편집디자인은 여타의 불교잡지는 물론 일반 교양지들의 인정과 부러움을 사고 있으며, 필자들을 발굴하고 소재를 계발하며 성실하게 변화발전하는 기획 추진력은 불광이 가지는 또다른 특성의 하나로 자리매겨졌다.

  이 환하게 꽃봉오리를 맺는 시기, 제3기의 필자로서는 소설가 남지심씨가 처음 보이기 시작하였고, 한 ㅇ년간 쉬었다 요즘 다시 연재하고 있는 이남덕 교수님, 그리고 `선의 고원` 원고를 주셨던 연관 스님, `건강교실`의 홍문화 박사님, `결혼, 가정, 행복의 장`의 이근후 박사님 등이 있었으며 `법화경 강의`의 무비스님, 연재소설 `원효성사`의 백운 스님도 기억에 남는 필자들이셨다.

  남든 사람들은 현재의 남동화 편집장이 이 시기 초기서부터 안정적인 기틀을 만들고 있으며 이연정 현 불일회보 편집장, 이지현, 권현주, 사기순, 임성옥 기자들이 현재의 인원들이 있기 전에 <불광>을 빛낸 사람들이다.

그동안 <불광>은 총 발행총수 400만 부를 넘어섰으며 그중 약 10%에 달하는 책이 군부대와 교도소 등에 보내졌다. 이 숫자는 전체 불자 다섯 명중의 한 명은 <불광>을 사 봤다는 의미가 되며, 군부대나 교도소의 한정된 인원들에게는 더 볼 기회가 많았다는 뜻이 된다.

  <불광>은 앞으로도 꾸준히 발행부수를 늘리고 군부대나 교도소에 불서 보내기 운동을 벌여나갈 것이다.

  현재 불광은 총 17명의 인원이 월간 <불광>과 불광출판부의 단행본, 그리고 도서출판 한강수의 책을 만들고 있다. 20주년, 사람으로서는 성년의 나이에 도달하는 오늘, 아직 십대라서 용서받을 수 있는 관용의 시기를 벗어나는 책임감으로, 또 이제 스스로 판단하고 계획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우리 앞에 있는 전법 (轉法)의 현실을 직시하려 한다.

  삼세 제불과 여러 독자님들의 가호와 격려를 바라며 20년의 역사를 딛고 다시 20년, 200년의 역사를 만들어 나갈 활기찬 미래를 기약해 본다

  마하반야바라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