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이신 부처님

-아함 2 -

2009-07-18     관리자
세 가지 사상에 다 포함되다
장아함에는 많은 외도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그 잘못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그 당시 외도, 전통적인 브라만이즘이 있었습니다. 이 브라만이즘은 베다라는 문헌이 있는데, 인도의 아리아 민족들이 유목생활을 하면서 신봉했던 하나님 관념을 중심으로 한 여러 가지 신들에 대한 예찬을 모아 놓은 그러한 책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신들의 기도, 제사 등이 발전해서 불교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상당히 높은 수준의 지적인 종교철학으로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저희들이 보통 학문적으로는 우파니샤드철학이라고 얘길합니다.

이 사상은 복잡하고 그 발달과정에 있어서 많은 현상을 볼 수 있지만, 결국은 세계를 움직이는 가장 근원적인 힘은 브라만이라고 그 브라만에 의해서 세계는 유출된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상들에 대해서 도전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의 많은 사상이 불교가 일어날 무렵인 B.C.5세기경에 인도에 우후죽순처럼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당시 도시 국가가 많이 발생하면서 언론의 자유가 최대로 향유되는 그러한 사회적 배경속에서 많은 철학자들이 나와서 전통적인 브라만에 도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가에 대해서도 아함경에는 풍부하게 수록이 되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여섯사람의 외도라고 해서 불교경전에서는 육사외도(六師外道)라 부르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마치 지금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공산주의적인 유물관 또는 자연과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요소설입니다.

그 다음에 또 인간의 모든운명은 결정된 것이다. 또 정신과 육체는 둘이다. 하나다 하는 등등의 그런 사상들이 거의다 망라되어 있는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인간의 그 어떤 의식에 대해서 극단적인 회의론까지 주장했습니다.

불교도 또한 그 당시에 부처님부터가 하나의 사문의 길을 걸어가셨던 그러한 사상가였습니다. 어쨌든 당시의 그런 사상이 복잡했는데, 그 복잡한 사상들 속에서 가장 무엇이 문제가 되느냐 하면, 도대체 궁극적인 진리라는 것은 하나일텐데 왜 설하는 사람마다 이렇게 다를까 하는 그러한 문제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아함경에서 그당시 다양한 사상의 대립을 의식하시면서 그러한 사상들을 세가지에 다 포함되어 있다라고 설하고 계십니다. 중아함에 설해지고 있는 삼종외도설이 바로 그것입니다. 일체는 하나님과 같은 절대자가 화작한 것이다 하고 설하는 것이 전후화작인설(前後化作因說)이라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또 한 가지는 모든 인간의 길흉화복은 과거에 지은 업에 의해서 나타나는 것이다라고 설하는 그것이 숙작인설(宿作因說)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가지는 모든 것은 그냥 우연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이렇게 설하는 것이 있었는데 이것을 무인무연설(無因無緣說)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아함경에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그 잘못을 지적하고 계십니다마는 어쨌든 그 외도를 분류하는 기준이 아함경에 숱하게 나옵니다.

그런속에서 가장 기초적인 것, 십사육연설(十四六緣說), 육십이연설(六十二緣說) 오종악변(五種惡變)등이 많이 나옵니다만 가장 체계적이고 기초적인 것은 바로 그 삼종외도설입니다.   또 오늘날도 우리 주변에 있는 여러 가지 종교사상들 또는 문학에서 설하는 인생관 등을 종합해보면 이 세 가지에 다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궁극적인 진리
그러면 부처님께서는 이 세가지의 잘못을 어떻게 지적하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만일 모든 것이 God<神>에 의해 모든 것이 창조되고 지배된다면 두 가지 현상이 설명되지 않게 됩니다.

우리 인간들의 그 악업, 과연 우리들이 살생을 지었다 하면 그것을 우리들은 죄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죄악이라는 현상이 잘 설명되지 않아서 이렇게 부처님이 지적하고 계십니다.

그 당시에 모든 외도는 삼종에 다 포섭이 되는데, 그 삼종을 이제 하나씩 부처님께서 비판해 나가십니다. 우선 아까 전후화작인설, 모든 것은 God와 같은 그런 절대자가 창조하고 지배한다고 한다면, 인간이 어떤 악을 지었다고 했어도 인간의 악은 결국은 창조자의 뜻에 의한 것이라고 봐야 되지 않겠는가, 이렇게 부처님은 잘못을 지적하고 계신 것입니다.

왜냐면 이 사람이 악을 지을 수도, 선을 행할 수도 있을 때, 선을 행하지 않고 악을 지었으니까 그 책임은 그 사람에게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악이라는 것이 성립하게 됩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창조되고 지배되고 있다고 한다면 모든 것 속에 God의 생각도 들어가야 될 것이고 그러면 사람이 악을 행하든 선을 행하든 그것은 God의 뜻이라고 봐야 되지 않겠느냐 부처님이 이렇게 잘못을 지적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로 지적하는 것은, 만일 세상을 그렇게 본다면 우리들이 잘 살려고 하는 노력은 뭣하러 있겠느냐, 내가 잘 사는 것도 하느님이 해 주실 것이고 내가 못 사는 것도 하느님이 내린 벌이니까 우리들이 잘 살고 못 사는 노력은 해서 뭘하나라고 지적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로 지적하는 것은, 만일 세상을 그렇게 본다면 우리들이 잘 살려고 하는 노력은 뭣하러 있겠느냐, 내가 잘 사는 것도 하느님이 해 주실 것이고 내가 못사는 것도 하느님이 내린 벌이니까 우리들이 잘 살고 못 사는 노력은 해서 뭘하나라고 지적하고 계신 것입니다.

따라서 전후화작인설로 두 가지 설명을 붙이자면 붙일 수 있겠지만 브라만이라든가, 사문이라는 입장을 떠나서 허심탄회하게 말해 본다면 두 가지 문제, 즉 죄악의 문제와, 인간의 노력의 문제는 마땅한 도리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하는 것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그 다음에 똑같은 이유로 과거에 지은 업에 의해서 일어난다고 하는 숙작인설에서도 그 두 가지는 그대로 적용됩니다. 왜 그런고 하면 과연 어떤 사람이 악업을 지었다, 살생을 했다 해도 그것은 과거에 지은 업에 의해서 살생하게끔 되어 있으니까 살생한 것이다라고 봐야 되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 죄악이 성립할 이유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또 과거에 내가 지은 업에 의해서 잘 살게 되어 있으면 가만히 있어도 잘 살 것이고, 못 사는 사람은 못 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잘 살고자 하는 노력은 무엇이며 잘 살아보려고 하는 욕심을 일으킬 필요가 있겠는가. 제삼의 견해도 부정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처님은 그 세가지 외도설의 잘못을 아주 날카롭게 지적하고 계신 것입니다.

결국 참다운 진리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현실 세계, 우리들이 볼 수 있는 현실세계의 모든 현상을 남김없이 최대로 설명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어느 부분은 잘 설명할 수 있지마는 어느 부분은 설명되지 못하는 부분이 생긴다. 그것은 궁극적인 진리라고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분적인 진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부분적인 진리를 궁극적인 진리인 척한다면 그건 부당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부처님은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우선 진리를 제시하기 전에 우리 인간의 현실 세계를 보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현실 세계를 정확하게 파악해서 현실 세계를 일으키고 있는 근본 원리가 무엇인가하는 것을 찾아 들어가자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그 길을 실제로 걸어가신 분입니다. 그 분이 그 당시에 왕자의 몸으로 태어났습니다. 또 장가도 잘 가셨읍니다. 또 아들도 낳았습니다.

그런 분이 모든 명예와 부귀를 버리고 뭣하러 산에 가셨느냐? 그것은 우선 그당시에 앞에 말한 종교의 문제성을 철저하게 의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외도들을 찾아가서 사람들의 사상을 직접 이해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과정을 거치시게 됩니다. 참 엄청난 고행을 많이 하시게 됩니다. 설산육년고행이라는 말이 있듯이 부처님이 29세에 출가하셔서 35세에 성도하시기까지의 기간은 6년입니다. 그런데 그 6년을 거의 전부 고생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목숨이 끊어질만한 고행을 해보셨어도 어떠한 궁극적인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저절로 일어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걸 버리시고 보리수아래 조용히 앉아 독자적인 사색에 잠겨 깨치셨읍니다. 깨치신 게 무엇이냐? 우리 인간 현실세계에 나와 있는 모든 현상을 가장 마땅한 도리로 설명할 수 있는 궁극적인 원리, 진리를 깨치신 것입니다. 그래서 깨치신 뒤에 세상에 나와서 우리들에게 설하는 것이 바로 아함경의 교설이며 대승경의 교설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
부처께서 세상에 나오셔서 설하시고자 하면서 문제에 부딪칩니다. 아함경에는 그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나도 세상에 나가서 사람들에게 가리키고자 하는데, 가르칠 때에 나도 다른 종교처럼 내가 하늘의 계시를 받았노라. 내가 궁극적인 진리를 깨쳤노라. 절대적인 권위를 내세우고 너희들은 다만 내 말을 믿을지이다.

내가 진리요, 내가 곧 길이니라. 이렇게 가르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나와 똑같은 길을 걷게 해서 궁극적인 진리를 각자가 깨닫게 해야 될 것인가.」 이 두 가지 갈림길에서 번민하게 되신것입니다.

부처님은 그때 후자의 길을 택하게 됩니다. 부처님께서 만일 전자의 길을 택하셨다고 하면 불교도 오늘날 브라만이즘이나 다른 종교와 똑같은 그런 권위주의적 종교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우리들의 종교적인 길을 궁극적인 진리로부터 우리들의 현실 세계로 쭉 설해 내려 오시는 그러한 길이 아니고 정반대로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괴로운・이 덧없는・이 죄악의 그런 사회를 응시하면서 그런 사회가 왜 있게 되는가 인생과 세계가 왜 있게 되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점점 사람들의 능력을 성숙시켜 마침내 궁극적인 진리를 깨닫게끔 하는 그러니까, 어린아이를 조심스럽게 잘 길러 어른이 되었을 때 가산을 맡기는 그러한 방법을 택하신 것입니다.

아함경을 보면 아주 수없이 우리들의 현실 세계의 괴로움・덧없음・그것은 내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인간은 여섯 가지 감관으로 구성되고 그런 인간이 있게 됨으로써 세계가 있게 된다는 그래서 우리들이 없으면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들이 없는 세계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자기가 있는 세계만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세계라는 것은 무엇이냐? 여섯 가지 감관과 여섯 가지 인식대상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게 불교의 유명한 십이처설(十二處說)입니다. 「일체는 12가지에 들어가 버리더라」

그런데 여기서 우리들이 주목해야 될 것은 그러한 12가지 속에서도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6가지감관, 즉 눈・귀・코・혀・몸・마음으로 구성되어 있는 인간인데, 인간의 주체를 마음이라고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곧 의지입니다.

그리고 인간을 감싸고 있는 환경을 법이라 그렇게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십이처설에서 우리가 가장 중요시 해야 될 점이 바로 인간을 의지적 존재로 규정하고 계신다는 것과 대상을 의지가 없는 법으로 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법이라는 것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의지가 없는 것들, 자연물을 가르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대상이 되는 것은 바로 법이다. 이렇게 규정하신 것 입니다. 불교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세계관이요, 인생관이 되는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왜 있는가는 문제 삼을 필요가 하나도 없는 것이며, 있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인 이상 있다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유의지가 인간에게 왜 있게 되는가. 이러한 문제들은 궁극적인 진리가 풀리면 다 풀리는 문제들입니다. 그것을 깨치면 알게될 것이기에 우리는 어쨌든, 시작은 자유의지가 인간에게는 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불교 교설은 삼종 외도설이 범했던 그러한 잘못은 멀리 떠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자유의지가 외경에 작용하게 되면, 대상에 작용하게되면 대상은 우리 인간에게 어떠한 작용에 상응한 반응을 반드시 보인다는 입장입니다. 이것은 당시의 브라만이즘의 세계관과 비교하게 되면 정말로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부처님이 제시한 십이처설은 인간이 자유로운 의지를 가지고 있는것이고, 그러한 인간이 대상인 자연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것이 기본입장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계속>      

이 글은 불광 바라민 교학강좌에서 행한 강의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文責記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