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생도반(多生道伴)들의 만남

생활인의 불교신앙

2009-07-17     관리자

인과와 윤회를 믿는다면 수없이 환생하는 동안 내 부모 형제 아니었던 생명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길가의 해골에 예를 올리신 것도 제자들의 자비심에 시동을 걸기 위한 무량자비의 실천이신 것이다.

 원에서 차로 약 20분 달리면 곡성이 되고, 곡성에서 굽이 굽이 섬진강을 옆에 끼고 수려한 경치를 살피며 구례쪽으로 약 20분 달리면 보성강과 섬진강이 합류하는 압록에 이르게 된다. 이곳에서 구례 하동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굽이도는 섬진강을 따라 포장도로가 이어지고 있는데 압록에서 구례쪽으로 향한 포장도로를 버리고 오른쪽으로 돌아서 비포장도로로 들어서 보성강을 거스르며 진달래, 복사꽃, 살구꽃,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산길로 들어서면 갑자기 마음이 안온해지며 무릉도원 입구에서 선 듯한 느낌이다. 차에서 잠깐 내려 강물 흐르는 소리를 듣노라면 '헤르만 헷세'의 '싣달타'에서 물소리를 들으며 공부하던 뱃사공이 떠오른다. 보성강을 거슬러 오르다가 삼각주가 있고 지류와 보성강이 합치는 곳을 지나쳐 보성강을 건너 ㄷ 자로 다시 보성강 물흐름을 따라 흐르다가 지류를 따라 거슬러 오르면 오동나무의 보라색 꽃이 만발한 동리산(棟裏山) 태안사(泰安寺)에 이르게 된다.

 극락세계에 파견나온 듯한 온갖 새들의 지저귐을 들으며 숲길을 오리정도 지나며 정심교(淨心橋), 반야교, 해탈교의 세개의 돌다리를 건너 마지막으로 골물위에 걸린 정자식 나무다리인 능파각을 건너면, 가운데 섬의 사리탑을 둘러싼 구품(九品)의 연꽃이 피는 보배연못이 나타난다.

 오리길을 헛되게 걸으면 속세의 연못에 다다를 것이며, 오리길을 한 발자욱 한 발자욱 부처님 생각 놓치지 않고 걸으면  아미타불께서 건설하신 극락세계의 보배연못 연꽃속에서 태어나게 될 것이다.

 동리산 태안사는 신라때 세운 절로 구산선문(九山禪門)중 하나이고 한 때는 화엄사를 말사로 거느릴 정도의 대본찰이었다. 혜철(蕙哲)국사가 크게 도풍(道風을 일으킨 곳으로 산수가 매우 수려하다.

 혜철국사(서기 785~ 861년)는 15세 때 부석사(浮石寺)에서 출가하여 화엄경을 배우고 율(律)과 선(禪)을 함께 닦다가 서기 814년에 당나라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중국의 서주(西州) 부사사(浮沙寺)에서 공부할 때 3년동안 한번도 자리에 누운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후 신라로 돌아와 동리산 태안사에서 하안거 중 기도로써 큰 가뭄을 없애고, 또 산불로 절이 다 타도 스님의 암자만은 화재를 면하는 등 여러가지 신통력을 보여 주셨다고 한다. 당시 동리산은 산수가 수려하여 절을 짓기에 적합한 곳이었지만 모기가 많아서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을 정도였다 한다. 그런데 혜철스님이 오셔서 신력(神力)으로 모기를 쫓았다하는데 모기떼를 쫓은 곳을 축맹치(逐虻峙)라고 부른다. 그후 수백인의 문도(門徒)가 있어 통일신라말기와 고려초기에 걸쳐 많은 활약을 했는데 혜철국사와 그 문도들을 동리산파라고 불렀다.

 6.25때 법당이 불에 타 봉서암(鳳捿庵)을 옮겨 법당으로 쓰고 있으며 보제루의 크기로 보아 법당이 상당히 컸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동안 거의 폐찰이 되다시피 된 것을 청화(淸華) 큰스님께서 주석하시며 중창불사를 해, 본래의 면목을 되찾아 가는 중이다.

 지난 동안거 해제일에 3년결사(結社)를 마쳤는데, 몸과 목숨을 돌보지 않는 가행정진(加行精進)으로 위없는 큰 지혜를 이루어서 위로는 부처님 은혜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널리 중생제도하기를 발원한 결사 대중들이 3년간의 피나는 정진을 마치고 결사를 풀은 것이다. 3년간  눕지도 않고 공부하신 혜철국사를 본받아 법답게 공부하신 스님들께서 분명 많은 진전이 있었을 것이며, 결사대중의 맑은 마음의 힘으로 온 우주가 맑아졌을 것이며 대한민국의 앞날에도 무한한 광명이 비추이리라고 믿는다.

 3년결사 기간동안 여름 휴가때 마다 태안사 윗절의 결사대중을 우러르며 아랫절에 머물렀다. 자비하신 큰스님께서 안거철마다 용맹정진기간에 우바이, 우바새들이 가행정진 하실 기회를 주시곤 하셨는데 세사(世事)가 바쁘다는 핑계로 그나마 시종여일(始終如一) 참여하지 못하고 잠깐 얼굴만 비치는 정도로 그쳤다. 그 짧은 동안에도 모기떼와 씨름을 해야했는데 아마 신라때 혜철국사님께 쫓겨갔던 모기들이 다시 돌아온 모양으로 어떻게나 극성인지 두꺼운 담요 두꺼운 옷도 뚫고 물을 정도이다. 피를 빨겠다는 일념(一念)으로 아무리 두꺼운 장벽도 물리치는 모기의 원력(願力)은 수시로 이루어진 셈인데, 다생겁래(多生劫來)의 업장(業障)을 소멸시키고 부처님 지혜에 이르겠다는 나의 원력은 과연 진전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결사에 참여하신 스님들은 수 십년간을 일종식(一種食) 하신 큰스님을 본받아 하루 한끼만 드시고 정진하셨는데 불살생계(不殺生戒)도 철저히 지키셨다. 내가 달라붙는 모기를 손바닥으로 때려잡은 동안 윗절 스님들은 미니 잠자리 채로 모기를 잡아두었다가 방선시간에 밖에 나가 방생(放生)하고 하였다.

 초등학교 1학년짜리 둘째가 절에서도 기도를 하는 동안 피아노 생각을 하면 저절로 합장한 손의 손가락이 옴찔거려진다고 한다. 피아노 배우기 시작한지 몇달 되지도 않았는데 그러할진대 수십 겁을 익혀온 습기는 어떠할 것인가? 욕심은 많이 낼수록 습기가 붙어 더욱 욕심스러워지고, 화도 자주 내면 버릇이 되며, 어리석은 마음도 그와 같다.

한정된 시야만이 열린 우리들에게는 태안사에서의 만남들이 우연인것처럼 보이지만, 열린 눈으로 보면 모두가 수많은 생에 걸친 도반들일 수 있다.

 5월 1일 태안사에서 가사불사 회향이 있어 참여하였다. 전국 곳곳에서 구름같이 몰려든 우바새, 우바이들이 가사를 머리에 이고 법당과 연못 주위를 돌며 아미타불을 염(念)하였다. 수없이 아미타불을 염하면 습기가 되어 어떤 상황에서도 놓치지 않고 염불(念佛)이 될 것이다.

 살생은 자비의 종자를 끊는 것이라했는데 하다못해 파리나 모기의 목숨도 기루고 살리는 마음이 지속되면 부처님의 대자비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인과의 윤회를 믿는다면 수없이 환생하는 동안 내 부모형제 아니었던 생명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제자와 함께 길을 가시던 부처님께서 길가의 해골에 예를 올리신 것도 제자들의 무량한 자비심에 시동(始動)을 걸기 위한 무량자비의 실천이신 것이다.

 우리는 왜 지혜와 자비가 구족하신 큰스님을 뵙기를 원하고, 뵙게되면 환희심이 나는 것일까? 그것은 이미 우리 마음 속에 지혜의 밝음과 자비의 씨앗이 내재되어 있어 현현되고자 하며 이미 지혜와 자비가 현현된 스님을 통해 지혜와 자비의 구현에 시동이 걸리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단지 난해한 문자의 연속이던 경전이 큰스님의 말씀과 행동을 통해 나올 때에는 그대로 부처님의 생생하신 가르치심이 되고 살아있는 진리의 말씀이 된다.

 꿀이 있는 곳에 벌과 나비가 모여 들듯이 감로(甘露)의 말씀, 무한 생명의 자비와 무량광명의 지혜가 있는 곳에 불종자(佛種子)가 모여 드는 것이다.

 한정된 시야만이 열린 우리들에게는 태안사에서의 만남들이 우연인 것처럼 보이지만, 열린 눈으로 보면 모두가 수많은 생에 걸친 도반(道伴)들일 수 있다.

 태안사에서 만난 모든 맑은 불자(佛子), 우주의 모든 생명이 모두 함께 한번에 부처가 이루어지이다.(自他一時成佛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