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는 사랑

보리수 그늘

2009-07-17     관리자

묵은해가 가고 또 새해가 밝았다. 흔히 사랑은 주는 것이라지만 지난 한 해도 참 많은 걸 베풀지 못하고 보냈다는 심정이다. 삶을 살면서 우리는 많은 방법들을 나름대로 배우고 경험하고 터득한다.

세수하고 밥먹고 옷입고 하는 일차적, 표피적 기술의 숙달에서부터 무슨 주의니 지도(之道)니 하는 지고의 가치를 지닌 방법까지,

우리는 이것들을 개인적 출세와 영욕만을 위한  한낱의 「기능적 부속품」으로 박제해 버리기도 하고, 살고 사랑하고 배우는 큰 삶의 틀을 기름지고 윤택하게 하는 「떨어져 썩는 한 알의 밀알」 그 고귀함으로 가꿔내기도 한다.

삶의 과정에서 택하게 되는 이러한 갖가지 삶의 방식들은 궁극적으로 행복을 위한 것이며 이 행복이란 것은 긍정적이며 발전적인 과정의 집적으로 이루어지는 가치있는 결정체이어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므로 「밀알로서의 사랑」, 불교적인 「보시로서의 사랑」이라는 일종의 강령들이 참 행복을 위한 실천적 지침으로 흔히들 우리 앞에 이야기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잣대로 이 「밀알됨」과 「보시」를 가늠하고 실천해야 겠는가?  우선 사랑을 능력의 문제(대상의 문제가 아니라)로 인식해야하겠다. 성격이 생산적이지 못한 사람들은 보통 준다는 것을 손해보고 빼앗기고 포기하는 것으로만 해석하고 이에 따라 행동을 결정한다.

그러나 성격이 생산적인 사람은 주는 것을 내가 가진 잠재적 생명력을 상대에게 표현하여 이식하는 최고의 행위로 여긴다. 자연히 준다는 것이 그에게는 무엇보다 즐거운 것이 된다. 다시 말해 주는 사랑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정신적․ 인간적 측면에서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참사랑이란 내가 가진 기쁨․슬픔․지식․재능․값진 경험과 같은 가장 소중하고 생명력 있는 것들을 줌으로써 「너와 우리」를 풍요롭게 만드는 「마음의 수평적 전달」임과 동시에

「동등한 참여․교류행위」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는 상대방에 대한 나의 일방적인 희생만을 의미하진 않으며 나의 능력으로 상대방의 풍요를 돕겠다는 인간적 다짐이나 철학이 선행 , 전제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참사랑은 이렇듯 「줄수 있는 나의 능력을 신장 ․ 발전시켜가는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구현되는 것이어야 하며 대상의 가치-귀천․ 빈부․미추-에 따라 변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참사랑에 언제나 영원토록이라는 수식어․ 한정어가 따르는 것도 이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사랑을 베풀 때에도 자비심에 도취되어서는 안 되며 상대의 즐거워함과 기뻐함 그 자체로부터 큰 만족과 기쁨을 누려야 한다. 참사랑에는 또 올바른 자기애가 필요하다. 여기에서 자기애란 친구들의 애정으로 순전히 자신만을 살찌우려 드는 에고이스트의 게걸스런 이기심과는 엄연히 다르다.

옛날 배고팠던 나, 속박받던 나, 쓰리고 아팠던 나를 진정 사랑하는 일, 그래서 지금의 배고픈 우리, 속박받는 우리, 쓰리고 아픈 우리를 맨발로라도 찾아나서는 일이야말로……, 열악한 환경에서 자라나서도 이 다음에 조그만 사랑이나마 베푸는 자는 누구이며 파괴적 행위만을 일삼는 자는 또 누구인지,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못함에서 비롯되는 엄청난 괴리임이랴.

또 사랑은 소유욕과는 엄격히 구분되어야 한다. 새장에서 새를 즐기는 것이 치졸한 소유욕의 표현이라면 새를 창공에 날게 하는 것은 확대된 사랑의 표현이다. 상대를 나의 편견이나 편협한 가치관으로 묶어 두려는 것이 소유욕이라면 상대를 상대 그 자체로 인정하고 자유롭게 있게 하려는 노력은 사랑이라 이름 할 수 있을 것이다.

제나름의 속성과 개성을 가지도록 배려하는 「주는 사랑」, 그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이겠는가. 묶어 두라, 그러면 영원히 떠날 것이요, 자유롭게하라, 그러면 영원히 머물 것이니. 나의 것을 사랑하면서도 남의 것을 싫어하지 않는 사람,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요즈음 그리움과 사랑으로 절절이 쌓은 편지 한 장은 어떠하며,

비록 가진건 없으나 다정히 잡아 줄수 있는 따스한 빈손, 세상 가장 아름다이 달려나가 맞아줄 수 있는 맨발이면……,  또 얼마나 이 세상은 아름다우랴!  아주아주 작은 사랑, 주는 것부터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