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라

불광법단

2007-05-25     관리자

부처님이 법문을 하신 곳이 여러 곳이지만 가장 유명한 정사로는 두 곳이 있습니다. 하나는 왕사성의 죽림정사이고, 또 하나는 사위성에 있는 기수급고독원입니다. 왕사성의 죽림정사가 먼저 지은 것이고 사위성의 기수급고독원이 그 후의 것입니다. 왕사성의 죽림정사와 사위성의 기수급고독원, 이 두 곳이 아마 부처님께서 제일 많이 머무르시고 설법도 제일 많이 하신 곳일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그 절을 지은 경우를 보면 왕과 왕자와 큰 부자가 발심해서 지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죽림정사의 경우, 가란타 장자가 죽림을 바치고 그 위에 빈비사라왕이 절을 지어 부처님께 바쳤고, 기수습고독원은 기타 태자 동산에 급고독 장자가 지은 것입니다. 급고독 장자가 부처님을 모시려고 절을 마련할 때 자리가 좋아서 그 산을 살려고 하니까 그 소유주인 기타 태자가 팔지 않을 생각으로 그 땅에 금을 깔면 판다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급고독 장자가 정말 금을 깔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도 태자가 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급고독 장자가 재판을 걸었다고 합니다.

재판 결과 "태자가 두 말을 할 수 없다. 한번 그렇게 하기로 말했으면 파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팔기로 된 것입니다. 그때 기타 태자가 생각하기를 도대체 부처님이 어떤 분이시기에 만금을 아끼지 않고 산을 사려는가 생각했습니다. 땅을 팔기로 한 것이니까 파는 것으로 하고 나무는 기타 태자가 대는 것으로 하였습니다. 결국 기타 태자와 급고독 장자가 합심해서 기수급고독원이라는 부처님의 전법 도량이 마련된 것입니다.

부처님께 절을 헌공하다

그런데 이 두 절을 지은 사람이 서로 처남 매부간입니다. 가란타 장자의 처남이 급고독(수달타) 장자입니다. 급고독 장자란, 고독한 사람 가난한 사람 어려운 사람을 즐겨 잘 돕는다 해서 그 사람의 덕망에 따라서 붙인 이름이고, 원래의 이름은 수달타입니다.  수달타 장자가 자기 매형이 사는 왕사성엘 갔습니다. 왕사성에 갔을 때 다른 때 같으면 자기 매형이 나와서 반갑게 맞았을 터인데 그날은 어떻게 된 일인지 금방 나오지도 않고 손수 하인을 부리고 바쁘게 일을 하다가 한참만에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마음이 좀 불편해 있던 수달타 장자는 "오늘은 웬일이십니까? 장가라도 드십니까? 아니면 왕이라도 모십니까?" 속이 덜 좋아서 좀 비꼬는 말입니다. 자기를 소홀히 생각하고 금방 맞아주지 않았다는 표현입니다. 가란타 장자의 대답이 "임금님도 아니고 장가가는 것도 아니요, 부처님을 내일 모십니다." 그랬습니다. 그때가 죽림정사를 완공하고 부처님께 헌공하는 때였습니다. 부처님이란 처음 듣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누구시냐" 고 물었습니다. 부처님은 가비라국 정반왕의 태자로서 출가하여 도를 닦아 무상의 대도를 성취하신 분이다. 이 부처님이 왕사성에 계셔서 내가 모시게 되었다는 내력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는, 아마 숙세의 인연일 것입니다. 수달타 장자가 기쁜 마음이 나서 "어떻게 부처님을 뵈올수 없을까요" 했습니다. "오늘은 이미 늦었고 하루만 기다리시오. 내일은 뵈올 수 있습니다" 했지만 수달타 장자는 너무 좋아서 잠도 잘 이루지 못했다고 합니다. 수달타 장자는 잠도 안 오고 해서 밤중에 밖으로 뛰쳐 나왔습니다. 캄캄한 밤이었는데 분명히 공중에서 말하는 소리가 들려 오더랍니다. "수달타여 앞으로 나아가라. 코끼리 백 마리, 말 백 필, 보배를 가득 실은 수레 백대보다도 부처님을 향해서 한 걸음 나아가라." "이것으로 너는 현세에 안락하고 내생에 길이 안락하리라." 이런 소리가 귀에 분명히 들려오더랍니다. 밝으면 갈까 하고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서 앞으로 갔더니 눈앞이 확 밝아졌답니다.

이것이 수달타 장자가 왕사성에 갔다가 부처님을 처음 뵈러 갔던 때의 상황을 말하는 장면입니다. 수달타 장자는 그 길로 가서 새벽에 부처님을 뵈옵고 부처님 법문을 듣습니다.

 "보시를 하라. 애착을 끊어라. 그리고 청정한 계행을 가지면 천상에 나리라. 탐착이라는 것, 애욕이라는 것은 마침내 괴로움을 가져온다." 이렇게 해서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성제 법문을 듣습니다. 그때 수달타 장자는 부처님의 큰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부처님을 우리나라에도 모시자 생각하고, 절 지을 것을 작정하고 돌아왔습니다.

뜻이 견고하면 그 소리가 들릴 것이다

수달타 장자 귀에 들려온 이 목소리는 우리가 법회에 나갈까 말까 하고 주저할 때 법회에 나가기 어려운 유혹이나 장애가 있을 때, 우리 마음속에 들려오는 목소리가 아니겠는가 생각됩니다. 그때의 수달타 장자에게도 그 소리가 들려왔을 것이고 지금 우리들 마음속에도 들려올 것입니다. 우리의 뜻이 견고하면 분명히 그 소리를 들을 것이고 그렇지 아니하면 그런 소리가 들려도 의식하지 못할 것 입니다.

부처님의 법문은 법성생명을 키운다고 말을 합니다. 법성생명이란 죽지 아니하는 생(生)과 사(死)가 상관없는 생각 저 너머에 있는 참 생명을 말합니다. 내 삶이 물거품이라면 물거품이 아닌 바다와 같은 진실한 나의 생명, 생겼다 꺼졌다 하는 물거품을 초월해서 유유한 바다로서 무진장한 생명으로 넘치고 있는 그런 본래 생명, 이것이 법성생명입니다. 부처님 법문을 믿고 가까이 하고 닦아가는 것은 바로 법성생명을 키우는 것이고, 해태하고 향락에 빠져드는 것은 물거품이 조금 커지려고 노력하는 것과 같고, 현세의 물질 생명, 육체 생명에 대한 탐착 봉사입니다.

우리는 육체 생명 물질 생명을 지탱하기 위해서, 이 요구에 따라 오늘은 편히 쉴까, 또는 이 일이 더 중하지 하면서 게으르게 되고 육체가 요구하는 유혹에 따르기가 쉽습니다. 이러할 때 우리 마음에 의연한 결심이 딱 박혀 있으면 "수달타여 부처님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라" 하고 저 때에 수달타 장자에게 들려오던 소리가 우리에게도 들려올 것입니다.

용기를 내어 나아갈 때 환희하고 격려하는 성현이 함께 한다

이 이야기는 막연히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실지로 뜻을 견고히 세우고 일심으로 염불하거나 기원하면 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경계가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포기하고 주저앉아 잠들고 싶을 때, 그것을 무릎쓰고 힘을 내어 정진하면 그 사람만이 아는 경계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하면 허황한 말이라고 그러실런지 몰라도 허황한 말이라고 그러실런지 몰라도 허황하든지 말든지 제가 실지로 체험한 일입니다.

그때가 아마 제가 27~8세 무렵이라고 생각됩니다만 한 해 여름에 용맹정진을 하는데 (이때는 7일간 잠을 안자고 정진하는 때였습니다) 어떻게 되었는지 등골이 몹시 아팠습니다. 그때는 용맹정진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프거나 말거나 동참을 했습니다. 그런데 5일짼가 6일짼가 되는 밤엔 등골이 도끼로 패는 것처럼 아팠습니다. 그때 아프려면 아파라 하고 한결같이 좌선을 하고 뻗어 나갔습니다. 그때 나도 모르게 스스로 알아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런 것을 공중석상에서 말하기는 미안합니다만 어쨌든 제가 체험한 사실의 이야기입니다.

한결같이 화두에 마음의 눈을 두고 나아가는데 제 뒤에 어떤 사람이 서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손이 뒤에 닿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불덩어리같이 화끈하게 느껴졌습니다. 누가 들으면 요사스럽다고 할지 모르지만 요사하든지 말든지 제가 느낀 대로의 토로입니다. 그러더니 그렇게 뻐개지는 것같이 아프던 등골이 금방 시원해졌습니다. 단번에 나아버렸습니다. 저는 이 비슷한 경험을 여러 차례 겪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내가 하나의 목표를 향해서 한결같이 지어 나아가고 있을때 내가 어려움을 딛고 굳세게 나아가는 데는 지켜보면서 박수를 보내는 성현들이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노력하고 어려움을 이겨나가고 있으면 같이 거들고 지켜보면서 기뻐하는 사람이 또 있는 것입니다. 육체의 눈으론 볼 수 없어도 같은 중생이지만 육체를 생명으로 하는 우리와는 다른 별개 차원의 중생이 있어서, 우리와 더불어 부처님 법을 닦는데 환희심을 내고 도와주고 격려해주는 그런 중생이 있습니다.

[미란다왕문경]을 읽어보면 거기에 미란도로스왕과의 문답에 나가세나라고 하는 스님이 출가해서 공부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스님이 공부를 해서 수다원과 사다함과 아나함과의 마음의 문이 차차 열려가는데 열려 갈 때마다 범천이 박수를 치고 꽃비를 내렸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런 현상들을 우리는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보다 맑은 마음, 삼매에 든 눈으로는 그런 경계를 다 보고 아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의 그런 세계로서의 현실인데 우리는 그 현실을 보지 못하고 감각의 자극을 통해서 알아질 수 있는 이런 둔탁한 물질세계 육체세계 차원의 경계밖에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부처님의 진실을 닦기 위해서 어려움에 굴하지 아니하고 굳세게 나아갈 때, 나 자신의 진실한 생명을 회복하기 위해서 용기를 내어 나아갈 때, 그때는 나 혼자가 아니란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지켜보시면서 환희하시고 박수를 보내시는 성현들이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절대로 허황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뜻을 세우고 노력해야 한다

법회에 나올 때 어려움이 있거나, 부처님 앞에 한 걸음 나아가려고 할 때 무엇인가 반대되는 유혹이 작용해 올 때, 우리는 용기를 내어야 하겠습니다. 마음으로 진실한 길을 향해 나아가서 나의 영원한 진실생명을 키우고자 하는 이 노력의 길은 나 혼자의 외로운 길이 아닙니다. 많은 성현들이 지켜보시고 가호하시는 가운데에 내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무슨 일이든 편안하게 내맡겨두면 흘러갑니다. 죽음을 향해서 흘러갑니다. 늙어가고 허물어져서 마침내는 무(無)를 실현합니다. 이 흐름을 거슬러서 흘러가지 아니하는 진실 본분으로 돌아가고자 하면 노력을 해야 합니다. 먼저 뜻을 굳게 세우고 견고한 마음으로 결단력 있게 나아가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수일 전에 출가하겠다고 저를 찾아온 분이 몇 분 있었습니다. 저는 그분들을 출가의 길로 보내면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이 길은 부처님이 가셨고 또 부처님의 일가 왕족들이 이 길로 가는 것을 승인하셨다. 만약 이 길이 인생을 그르치는 길이고, 이 길이 진리와 어긋나는 길이고, 이 길이 역사와 사회와 국토를 어지럽히는 길이었다면 부처님이 감히 당신뿐만 아니라 당신의 왕국이 망할 정도로 많은 왕족들이 출가하고자 했을 때 그것을 막으셨을 것이다. 나는 이 사실을 보고 출가에 대해서 남다른 생각을 한다." 그런 말을 했습니다.

"그런만큼 이 길은 뜻이 견고하고 용기있고 그리고 지혜 앞에 순수한 그런 사람이 갈 수 있는 길이지 적당히 안이하게 타협하고 지내는 얕은 머리 가지고는 이 길은 갈 수 없는 길이다. 지금 낸 용기가 마침내 큰 길에 도착할 수 있는 힘이 되어서 성공하기를 바란다." 그런 말을 반복해서 했습니다. 이것은 짧은 기간을 두고 정진하거나, 일상의 수행과제로 정하고 일과를 지켜가는 경우나, 또는 특별한 어려움이 따르는 수행에 있어서나 마음자세는 같다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지혜에 따라 진실에 복귀하고자 하는 용감한 선택과 철저한 행동이 뒤따르지 않으면 이 길은 나아가기 어려운 것입니다. 겁약한 사람이 안이한 타협을 통해서 고요하게 갈 수 있는 길은 아닙니다. 오직 진리 앞에 순수하고 진실하고 용기있고 지혜있고 결단력있는 그런 사람이 갈 수 있는 길입니다. 그러한 수행의 기본자세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합니다. 어느 때 어떤 수행 어떤 기도를 하든지 우리는 그런 자세로 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