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찍한 기왓장 런던 박물관

세계불교여행기 (1)

2009-07-10     관리자

 
  입국도장을 받을 때 나라가 ‘왜 왔어’ ‘박물관에서 내 고향 물건을 조사 할란다.’니 잠시 훑어보다가 통과시켰다.
  영국 박물관인지 세계 약탈장인지 어마어마한 규모를 보겠다고 자판기에 동전을 넣었던지 그대로 나왔다. 수위가 그냥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공짜로 보여주는 요일인 즉 기계는 쉬는 날, 일층 입구 화살표를 따랐다. 개관 당시의 도서관엔 각 분야 저술가들의 진귀한 육필이 나 따위는 감히 방부를 드릴 수 없는 악필을 과시했다. 음악가의 악보초고도 있고 자본론을 썼던 가난한 나그네의 글씨도 보였다. 나도 여기에 틀어 박혀 잉크병에 거미를 넣었다가 종이 위에 방생하거나 직립원인을 타자기에 지나가게 하면 희망이 있겠지.
  스핑크스의 코가 수집됐고 로제타돌도 있고 그것을 선심 썼던 나폴레옹의 창자도 박물관 근방에 있다. 2층 계단을 꺽어도는 벽에 대구 근방의 사천왕 탱화가 걸렸고 다보탑 사자는 짙은 풀색 도장으로 땀구멍이 막혀 있다. 또 내가 살던 집 명문이 선명한 기와가 진열장 속에서 반들거리며 나를 반사한다. 지붕의 풀을 뽑는 운력 때면 기와를 떨구더라도 안고 떨어지라던 어른 생각이 스친다. 돌려 달라고 실없는 소리를 할 것이 아니라 호릿꾼 걱정, 깨질 걱정, 지붕 위에서 이끼 낄 염려도 없으니 보관료를 듬뿍 내야 할 판이다. 뒤틀어진 사념 때문에 딴 것들은 건성으로 돌로 나왔건만 북국의 하늘은 벌써 어두워져 얼굴 뜨거운 감정을 얼버무리기에 알맞았다.
  불교회에 들렸다. 호주가 고향인 친구가 방콕에서 언제 쫓아 왔는지 뒤통수에 대고 이름만 달랑 불렀다. 회장이 부재중이니 태국절이나 가자고 앞장섰다. 알만한 얼굴들이 반갑다고 영국말로 안내를 해줬다. 왕궁의 내원당 옥불상은 철따라 가사를 갈면서 이 곳의 대불에겐 떠나올 때 고향 옷 그대로다.
  스리랑카 절도 찾아 갔다. 주지화상과는 그의 고향에서 알던 사이다. 마침 고향음식이라며 잘 왔다고. 식객 중에 어느 코리아인지도 모르고 북충남돌한는 등싯한 배와 히피털을 흔드는 괴물에게 주인이 경고, ‘말할 때는 먹지 말고 먹을 때는 말하지 말 것’ 내가 오신채를 가려내자 또 시비 ‘고혈압에 마늘이 최고’ 제발 마늘즙에 목욕재계하고 그 다혈질이나 고쳐 보지
  세상은 참말 좁다. 다시 간 불교회에는 태국북쪽에서 세미나를 함께했던 독일 노보살이 깜짝 놀라서 가슴을 쓸고 섰다. 그 때 중국대표에게 할을 먹인 노파다. 방거사 딸이 아버지보다 이레 먼저 떠나더니 서양에 환생하여 활약중이다. 회장도 나타나더니 짚신짝 타고 왔냐고.
  열일곱 살 되던 해 헌 책방에서 불교서적을 읽고 가부좌부터 익혔다는 노신사는 동경전범재판에 변호사로 참석했었고 그의 남북방불교통일안은 잘 알려진 탁견이다. 법당 선방 간당 도서실 정재소 정광까지 손수 안내하고 차담을 내놨다. 회관을 더 넓힐 계획까지 자상하게 설명하고 나의 의견은 어떠냐고 물었다. 대단합니다. 신간 서적을 고르란다. 바로 옆에 서서 구경하는 독일 노보살의 역서 한 권을 집었더니 회장이 그럴 줄 알았다고 노파가 그것보다 딴 책을 갖으라고 해서 회장이 집필한 영국불교사를 뽑았다. 이번엔 노파가 그럴 줄 알았다. 해서 모두 웃었다. 책값으로 서울을 복주머니를 선사하며 빈 것이 꽉 찼다고 하니 커다란 손바닥에 얹어놓고 무겁다는 몸짓.
  영국은 공자를 제외한 성인들의 고향 땅을 모두 털어 보았다. 그러다 보니 어문연구가 필수적일 수밖에 없었다. 범어사전이 2백 년 전에 나왔고 18세기 초에 불경번역이 시작되었다. 중국불교편람은 백 년 전에 출간되었고 한문 영문 불교사전은 50여 년 전에 출간되었다. 괴테가 쓴 희곡도 인도에 살던 스코틀랜드인의 책에서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19세기 원년 전기기사의 아들이 부처님과 같은 나이에 버마로 가서 첫 출가인이 된 다음은 스카치맨이 두 번째로 수계했고 그는 구라파 불교가 남북방 형태를 선탈하여 신승(나와야나)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쇼카 비문도 영국이 판독했고 법현의 불국기를 번역해서 고대인도와 중국의 교통을 검토한 사람은 해군목사였다. 버마에서 종군했던 대령이 대영박물관 근방에 불교서점을 차리고 남전장경 구라파 불서, 한문전적, 일본의 영문책자, 뒤에 발족한 영국불교회지도 팔면서 공원마다 돌며 ‘부처님 말씀은 진리다. 영원하다’는 포장을 둘치고 포교하였다.
  1960년 불교회가 거래하는 은행에서 40년간 간직했던 서류함을 돌려 줬다. 그 속에서 1907년부터 7년간의 회원명부, 회의록 출납장 편지 등이 고스란히 있었다. 편지 중에는 뉴질랜드 이웃이 영국불교회원이란 인연으로 통성명을 했다는 사연도 나왔고 태국 시킴 버마 스리랑카의 후원 자료도 있었다.
  대전 중에는 회원들 집으로 다니며 법회를 계속하다가 젊은이들은 참전했고 제대 후 출가한 사람들이 늘었다. 이제는 초파일 행사가 중계방송도 되고 불교식 다비도 유행한다. 스리랑카 절은 코끼리에 부처님 사리를 모시고 런던 시대를 활보했고 고향을 잃은 티베트도 조그마한 사원을 차렸다. 학교와 지역마다 법회가 있고 불교회지 ‘중도’ 승가회지 ‘승자’는 알찬 내용이다. 간디가 영국에서 처음 읽은 책이 불교책이라고 술회했다면 군말이 필요 없다. 바로 ‘아세아의 빛’이란 부처님 일생이고 에드윈 아놀드라는 걸물이 썼다.
  아놀드는 선조 중에 작위를 거절한 가풍에서 선원인 아버지와 이태리계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다. 해양서적보다는 희랍문법책을 고서점에서 구해다가 얼마나 탐독했던지 학교의 담당선생보다 실력이 앞섰다. 접시 닦는 당번에 걸려도 대신 숙제를 해 주며 책에만 매달려 테니슨이 훌륭한 사인이 되리라 촉망했다. 사회생활을 선생으로 시작했다. 학생에게 매질을 못 하고 ‘나를 때려가’며 체벌을 없앴다. 의연금 갹출에는 멋진 모연문을 써서 술선 수범하였다.
  스물다섯 살에 인도로 옮겼으나 원주민의 반영독립운동에 휘말려 총상을 입고 사흘간 인사불성에서 살아났고 현상금이 붙었으니 신변보호를 해 준다는 것도 ‘나는 사람을 키우는 직업’이라고 거절했었다. 그러나 졸도한 원주민 여인에게 물동이를 빼앗아 회생시켰다가 야만인이 브라만 여자 소유물에 손을 댔다고 시위를 당하고 농성하는 거지에게 수박을 던졌다가 고소를 당해서 벌금까지 물자 낙심 끝에 귀국하고 말았다.
신문사에 취직하려니 입사 시험 출제가 장미와 강철에 대하여 쓰라. 사랑과 산업을 주제로 신문사를 각성시켰고 신문사는 영국을 정신 차리게 했고 영국은 세계를 뒤흔들었다. 템스가 유유히 흐름을 내려다보며 기차시간표, 봉투, 신문지, 식당 메뉴, 옷소매에 펜과 연필과 숯동강으로 시상을 옮겼다. 2백 페이지 못되는 책에 4만 단어가 좀 넘는 ‘아세아의 빛’이 세상을 눈부시게 한 때는 그가 마흔 일곱 살이던 1879년이다.
  영국에서 60판, 미국에서 80판, 독일, 불란서, 체코, 스웨덴, 에스페란토까지 즉각 쏟아졌고 해적판은 단속할 재간이 없었다. 미국은 연극, 가극, 활동사진을 만드느라 코끼리, 말, 낙타를 수입했다. 미국 대통령, 일본, 태국, 이란, 터키 그리고 자기 나라 왕들이 이 사람을 청해서 식사를 대접하는 차례를 기다렸다. 왕 노릇은 자기 영토 안에서만 뽐내지만 시인은 대접을 안 받는 곳이 없었고, 새로운 성경이 나왔다고 열광했다. 옥스퍼드는 이 책을 주제로 불교 시를 쓴 학생에게 장원급제를 주었다.
  아놀드의 강연에는 청중이 어찌나 쇄도하는지 먼 쪽에서도 말이 들리는지 신호하는 사람을 세웠다. 단상에서 보자니 쉬지 않고 손수건을 움직였다. 위대한 시인은 자꾸 고성으로 떠들었다. 영문을 모르는 앞줄은 연사가 갑자기 실성 했나 놀랐지만 본인은 인파 속에서 땀을 닦는 모습을 안 들린다고 성화를 부리는 줄로 알았었다.
  불이 난 배에서는 진화될 때까지 승객을 붙들어 놓고 몰아경에 파묻히게 해 줘서 선원들이 고맙다고 고맙다고 되풀이 했다. 공교롭게도 연제는 ‘죽음과 그 다음’
  투철한 자비행은 자신의 배에 기어오른 도마뱀을 살던 곳에 놔주라고 회항을 시켰다.
  말년에는 몸의 반을 움직이지 못하고 실명을 했어도 구술로 ‘내가 죽는가 보다’까지 끝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