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계인간

이남덕 칼럼

2009-07-10     관리자
    入山前· 봄농사
  말구리(馬嗚里)집은 산기슭의 황무지와 같은 땅을 일구어 터를 마련하여 지은 집이라 이른 봄부터 앞· 뒤뜰에 나무를 심고 텃밭을 만들어서 씨를 부리는 일로 봄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냈다. 돌자갈 밭이기 때문에 생흙 몇 차를 사다가 가토를 해서 밭을 다시 만들다시피 하였으니 땅이 너무 차져서 이른 봄에 심은 상치· 아욱· 쑥갓· 시금치 등속은 단단한 땅을 뚫고 나오는데 시간이 걸려 잘 자라지 못했으나 늦봄에 모종을 심은 가지· 토마토· 고추 등속은 싱싱해 보였다. 그 중간에 심은 무우· 배추는 그런대로 파랗게 자라서 솎음으로 된장국을 끓여 먹게 되었고 빈 땅을 찾아서 맨 나중으로 콩· 들깨· 옥수수씨 등속을 다 심고 났을 때, 나는 하룻밤 묵고 올 예정으로 전라도 어느 산사에 가자는 동행인의 권유를 다라 집을 나섰던 것이다. 절이름도 잘 모르고 법문하시는 큰 스님의 이름도 모르고 무작정 나선 이 하루나들이 ‘해프닝’에 그처럼 큰 축복이 있을 줄이야! 다음과 같은 요지의 편지를 아들내외에게 띄우고 나는 하안거(夏安居)가 끝나는 날까지 두 달 남짓한 동안을 전라남도 곡성군 태안사에 묵었다.
  “하루만 묵어가려던 곳인데 와 보니 쉽게 오기도 어려운 길이오. 비른 주룩주룩 오고하여 며칠 더 묵어갈 생각이었다. 이제 비는 개었다. 마땅히 집에 돌아가야 할 마땅히 집에 돌아가야 할 차비를 차려야 할 참인데 이삼일 지내는 동안에 그 생각도 달라졌다. 내게는 금생에 꼭 해결해야 할 구도(求道)의 숙제가 있고, 지금 여기가 그 숙제를 풀기 위한 가장 적당한 시기, 적당한 장소임을 알게 되었다. 일단 집에 돌아가서 속옷가지라도 준비하고 올까도 생각했으나 공연히 오고가고 정신만 산란하고 내 숙제의 긴급함에 비하면 모든 일이 그리 중요하지 않게 생각되어 이대로 여기 머무르기도 했다. 갑자기 결정한 느낌이 없지 않으나 무슨 일이든 때가 있고 인연이 있는 법, 나로서는 필연적인 동기를 가진 행동이니 너희는 이해하기 바란다.”

    하산 후· 고추밭에서
  금년에 6월에 윤달이 들어서 하안거가 윤 6월 보름날(양 8월 9일) 해제되었다. 곡성에서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차창 밖의 들 풍경을 보면서 과연 집에 심어놓은 밭곡식들이 어떻게나 되었을지 궁금하였다. 올해는 장마피해가 컸으므로 곳곳에 전답을 휩쓸고 간 큰물 흔적을 창밖으로 볼 수가 있었다.
  씨만 뿌리고 떠난 콩과 들깨 옥수수가 콩을 주렁주렁 푸른 열매를 달았고 들깨 잎은 밥반찬에 오를 만큼 깨끗하게 자랐고 올 강냉이 옥수수는 벌써 한차례 쪄먹었다는 얘기를 들으니 이것이 마치 철없는 자식 버리고 간 어미가 다 장성한 자식 만나는 기분이 이럴까 싶도록 감개무량했다. 그중에서도 고추가 잘 된 것은 동네 중 제일이라니 대견하기 한량없다. 포기도 실하고 큼직큼직한 발간 열매는 보기에 소담스럽다. 고추는 농약을 가장 많이 주는 밭작물인데 우리 고주는 한번도 농약을 주지 않았다는 데는 더욱 놀랐다. 네 번 다섯 번씩 농약을 준 동네 고추는 다 탄저병(炭疽病)으로 검은 반점이 생기고 아니면 약간 상해가지고 말라서 희끗희끗 흰 마리가 되어 금년 고추 농사는 흉년이라는 말을 들으니 그 원인은 우리 밭이 올봄에 생흙을 가토했다는 데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생각이 이에 미치자 나는 놀라움을 지나서 우리나라 전국 국토의 피폐함을 생각하고 몸서리가 쳐졌다. 참으로 자연은 정직한 것이다. 그리고 에누리 없고 가차없는 것이다. 말없는 땅이라고 해마다 철마다 살충제다 제초제다 있는 대로 뿌려서 완전히 생산력을 고갈시켜 놓고도 또 내년 봄이면 퇴비하나 없이 금비만 뿌리고 농사지을 것이 분명하다. 말없는 땅이지만 자연의 법칙은 엄숙하다. 내가 만일, 집 떠나지 않고 매일 채마밭을 돌보았다면 우리 집 풍성한 고추농사의 공은 나 자신에게 돌렸을지 모른다. 고추모만 세우고 땅을 비닐종이로 덮었기 때문에 풀을 매줄 필요도 없었으니 별로 가꾸어주는 사람 없이도 땅이 오염되지 않았기에 고추는 자연의 법칙에 따라서 혼자서 무성하게 자랐던 것이다. 그리고 때가 되어 풍성한 열매를 맺은 것이다. 나는 요즘 하루에도 몇 번씩 고추밭머리에 서서 자연을 생각하고 또 식물(植物)과 인간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오염과 정화

  태안사 선방에서 알게 된 역사철학을 전공하는 한 청년 거사한테서 편지가 왔다. 그의 여자친구는 임학(林學)을 전공한다 했는데 그의 식물예찬은 애인예찬의 여파일 것이나 여기 인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 같다.
  “식물은 동물처럼 생명을 지키기 위해 이러 저리 뛰어다니지 않고도 줄 것은 주고받을 것은 받으면서 완벽하게 그 생명을 이어나갑니다. 식물은 그 자리를 지키면서 자연 안에 있는 빛과 물과 공기 따뜻함을 받고 온갖 생명의 힘을 만들어냅니다.
  식물의 사랑은 먼 데서 바라만 보아도 아니 볼 수 없을 만큼 멀리 떨어져 있어도 자연과의 조화 속에서 꽃피고 열매 맺습니다. 그러나 동물의 사랑은 상대방을 잡으려하고 정보하려하고 이해하기보다는 이해받기를 원하고 그래서 상대방을 자신의 영역 안에 끌어들여야만 안심하게 되지요.
  스스로 만물의 영장이라는 말을 만들어 내서 그 칭호를 높게 달고 다니는 인간은 살기 위하여 종일토록 뛰어다녀야 하고 심지어 다른 생명까지도 빼앗아야 합니다.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자유의 심볼인 것으로 기뻐하고 자랑하지만 우리는 움직이지 않고는 살 수 없기 때문에 그만큼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죽음을 통해서만 대자연의 품 안에 자신을 내맡길 수 있게 됩니다. 제 생각으로는 사실 참선이란 어떻게 보면 동물인 인간이 식물적 생명방식에 이르는 과정이 아닐까요? ...”
  동물과 식물과는 각각의 삶의 방식대로 다르게 살고 있지만 만물을 공통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대자연의 법칙이다. 확실히 욕계 인간은 가장 고통이 많은 존재다. 색계(色界)는 음(婬)· 식(食) 두 욕을 주로하는 여러 욕망을 여의었다는 의미에서 식물이 속하는 색계는 욕계보다 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하면 가장 고통이 많다는 점이 바로 욕계 인간의 이점(利點)이라고도 볼 수 있다. 고통을 미끼삼아 고통의 한 가운데서 커다란 승화· 변신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욕계인간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욕계인간의 가장 큰 위험성은 욕망에 너무나 눈이 어두운 나머지 대자연의 법칙을 어기고 자신의 의사로 살고 있다고 착각하는 무명에 있는 것이 아닐까.
  욕계인간의 무지 즉 그 오만은 땅과 물과 공기를 오염시켜 스스로 살 수 없을 뿐 아니라 생태계를 파괴하여 모든 생물을 살 수 없을 지경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 오염되지 않은 땅에서 농작물이 잘 자라듯이 인간은 끊임없는 자기정화(淨化) 작업에 의해서 의식의 오염, 즉 업장(業障)을 소멸하고 성숙한 차원으로 도달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것이 바로 참선의 길이며 대자연의 법칙, 즉 우주진리 생명과 인간(자기) 근원 생명의 일치를 그 출발에 있어서 믿음과 깨달음으로 확신하지 않으면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그 진리 안에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