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역의 대전법자 불도징(佛圖澄)

■ 중국불교의 奇僧 ①

2009-07-06     관리자

[1]구자라는 나라

  구자(亀慈 )는  중국과 인도 사이를 잇는 교통의 요충인 천산남로(天山南路)에 있는 중국 신강(新疆) 제 2의 도시가 구차(厙車)이다.  이 나라는 고대 실크로드가 번창하고 있을 때 구자국(亀慈國)이라 불리었고 서역지방 최대의 도시였다.  이 오아시스 도시는 교통의 요지일 뿐만 아니라 땅이 비옥하여 고대부터 기마민족과 중국왕조와의 쟁탈의 대상이 되었다.  지금도 교외에 실크로드 제2의 석굴사원인 키즈루천불동굽트라천불동과 그밖에 사원 유적들이 남아있다.

  고대의 구자국에는 절이 대단히 많았고 절은 아름답게 장식되었다.  구작국에는 달모람사(達募藍寺)를 비롯한 4사가 있어 350명의 스님이 있었다.  구자의 절에는 비구스니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비구니가 되는 것은 왕후 귀족들의 딸이었다.  비구니는 500개의 계율을 지키고 엄중히 통제되었다.  외출할 때에는 비구니 3사람이 아니면 외출하지 못하고 스승없이 외출하면 규탄당하였다고 한다

  진서(晋書) 제97권에는 구자국의 상황에 대하여 이렇게 적고 있다.

  「구자국은 낙양(洛陽)에서 서쪽으로 8,280리에 있다.  성곽이 있는데 그 성은 3겹이다.  가운데에는 불탑과 절이 일천 곳이 있다.  사람들은 농사와 목축을 업으로 삼는다.  남녀 모두 머리카락을 잘랐는데 목까지 드리웠다.  왕궁이 장엄하고 화려하기는 천궁과 같다.」

  성안에 불탑이나 절이 천개나 되었다니 대단하다.  나도 들판에 있는 고창(高昌)의 옛절과 교하성(交河城)에 가 본적이 있는데, 외성 서남 모퉁이에 거대한 사찰유적이 있었다.  문, 광장, 법당, 탑, 불감 등이 남아 있었다.  교화성의 최대의 건축물은 불교사원인 것을 생각해 볼 때 구자국성에도 화려한 불탑과 사원이 있었던 것은 틀림없다.

  이 구자국 출신자로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대역경가인 구마라습(俱摩罷拾)삼장이지만 라습삼장이 중국 장안(長安)에서 죽은 해로부터 약180년 전에 태어난 이가 화북불교의 대전법자(大傳法者)였던 불도징(232~348)이다.

[2]물속에서 청련화가 나다

  구자에서 태어나 거기서 성장한 불도징은 후한시대에 조성된 기지루석굴사의 화려한 부처님을 예배하였으리라.  불도징은 서진(西晋)말엽인 영가(永嘉)4년(310)에 중국 낙양에 왔다.  구자에서 천산남로를 통하여 고창(高昌)을 거쳐 돈황(敦煌)에들어와 거기서 중국어를 배우고 그리고서 낙양에 왔을 것이다.  그대가 79세였다.  79세라 하면 오늘날로 말하면 120-30세에 상당하리라.  그때까지 불도징이 구자나 돈황에서 무엇을 하였는가는 전혀 알일이 없다.  80세가 다 된 노사문이 낙양에 모습을 나타내어 117세가 될 때까지 동난이 심한 화북(華北)에서 석씨(石氏)일족에게 신앙을 받으면서 포교 활동을 계속한 것이 불도징이다.

  호족(胡族)출신인 후조왕(後趙王) 석륵(石勒)은 무자비한 살육을 일삼아 무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이런 포악한 군주를 가까이 하여 그를 교화하고자 한 불도징은 석륵의 신뢰를 얻기 위하여 예언의 힘을 사용하였다.  우선 전쟁을 하기 앞서 승패를 미리 알려 주는것이다.  아마도 불도징은 자신을 여능자로서의 직감에 의하여 싸움의 길흉을 미리 점칠 수 있었을 것이나, 한편에 불도징은 정보수집에 탁월한 힘을 발휘하였는지도 모른다.  정보원을 사방에 보내어 적의 정세를 사어세히 파악하고 그를 토대로 싸움의 길흉을 점쳐 길하면 전진을 권하고 흉하면 싸움을 중지시켰을 것이다.

  불도징의 시니령한 느아력을 직접 자기 눈으로 확인하고자 하였던 석륵은 하루는 자기 면전에서 도술을 행하여 보라고 하였다.  이에 불도징은 발우에 물을 가득 담고 향을 사루면서 주믄을 외웠더니 물 속에 눈부신 빛을 발하면서 푸른 연꽃이 솟아 올랐다.  이것을 본 석륵은 놀래어 불도징에게 심복하게 되었다.  이로써 불도징은 석륵의 고문이 되어 적의 존재를 미리 가르치기도 하고 싸움의 길흉을 점쳐 주었다.  석륵이 후조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불도징의 힘이었기 때문에 석륵은 불도징을 대화상이라고 칭하여 존경하였다.

[3]술의 비를 내리다

  건평(建平) 4년(333) 7월 석륵이 죽었다.  그의 아들이 즉위하였으나 광폭한 석호(石虎)에게 자리를 빼앗기고 석호가 왕이 되었다.  석호의 성질은 잔학했다.  석호는 부하를 자칫하면 죽였다.  그때마다 불도징은 석호에 대하여 경계를 주었지만, 석호는 듣지 않았고 그의 아들 석신마저도 반역심을 품고 있다 하여 죽였다.

  이런 무도한 석호가 불도징을 섬긴 것은 오직 불도징의 영능력 때문이다.  한번은 불도징이 「유주(幽州)에ㅐ 불이 났다.」 하면서 술을 뿌렸다.  그리고서 이제 불은 껏다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석호는 급히 서둘러 유주에 사자를 보내어 알아본즉 불도징이 예언한 그날 유주성 4문에서 화재가 났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서남쪽에서 별안간 검은 구름이 솟아 오르더니 억수같이 비를 퍼부었으므로 부을 끌 수 있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말하기는 그 빗물에 술기가 있었다고 하였다 한다.  불도징의 이와 같은 영능력을 분명하게 본 석호는 더욱 존경하고 심복하게 되었다.

[4]탁월한 투시능력

  때에 볼도징은 나이 100세를 넘고 있었다.  아마도 머리에 백발이 휘날리고 있었으리라.  지팡이고 짚고 사방을 둘러보는 눈은 번쩍이고 있었으리라.  그의 모습은 옛 신선으로 보였으리라.  불도징의 녕능력은 군사고문으로서 정세를 정확하게 아는 능력이 있었다는 점은 정보원을 통한 정보수집 방법에도 있었을 것이나, 그 보다도 불도징 자신이 천하의 변사를 예감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  그는 항상 제자를 서역으로 보내어 향을 사오게 하였다.  중국에는 좋은 향이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서역의 향을 주술에 사용하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한번은 제자가 서역으로 출발하여 길가는 도중에 도적의 습격을 받았다.  불도징은 자신의 손바닥을 지그시 보고 있었다.  손바닥 가운데 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것은 제자가 도적의 습격을 받아 죽음을 당하게 디는 모습이었다.  불도징의 손바닥을 보고 제자들도 놀랬다.  이것 큰일이라고 떠들어댔다.  그러나 불도징은 지그시 손바닥을 들여다 보면서 향을 사루고 주문을 외었다.  이상하게도 순바닥에 비치고 그림자는 지운듯이 사라졌다.

  얼마가 지나 향을 사러간 제자가 돌아왔다.  제자는 불도징에게 말했다.

  『이번 길에 도중에서 도적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막 죽게 되었는데, 별안간 향의 냄새를 느꼈습니다.  그랬더니 도적은 아무 일도 없었는대도 노래어 적병이 나타났다 하면서 저르르버리고 달아났습니다. 』라고 보고했다.

  불도징이 향을 사룬 영능력을 발휘한 것은 후조의 도읍인 업(鄴)에 서의 일이다.  제자는 아마도 구자로 향을 구하러 갔을 것이다.  멀리 떨어진 곳에 일어난 위험을 손바닥에 비추어 내는 능력은 보통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5]장부를 씻다

  영능자 불도징의 전기는 여러 고전에 나온다.  그는 역경승도 아니고 경전 해석가도 아니었다.  그는 탁월한 신이력(神異力)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배에는 옆으로 구멍이 있었다.  밤에 독서할 때 막은 솜을 빼면 구멍에서 빛을 발하여 실내를 밝혔다고 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는 독특한 힘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아침밥을 먹기 전에 일찌기 개울에 나가 배의 구멍에서 오장육부를 꺼내어 물로 씩고 다시 배안에 넣었다고 진서에는 적혀 있다.  117세까지 산 불도징은 내장을 청결하게 하는 방법을 알고 이었던 것일까.  아침 일찌기 무엇인가 체술을 내장에 행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한 것같다.  청각도 또한 보통이 아니었다.  먼데 소리를 잘 들었고 특히 방울소리를 들어 길훙을 점치는 능력은 탁월했다.

[6]죽어서 모래밭을 걸어가다

  불도징은 만년에 자기의 행동을 돌이켜 보고, 출가한지 109년이 된 것을 회상하였다.  그것은 죽음의 직전이었다.

  『술은 이를 넘지 않았고, 낮을 지나고 먹지 않았고, 계가 아니면 행하지 않았고, 욕심없고 구하는바 없다.』고 스스로 말한 것처럼 술을 마시지 않았고 정오가 지나면 식사를 하지않는 계율을 엄하게 지켰다.  그것은 영능력을 발휘하는 큰바탕이 되어 있었다.  엄하게 자기 규제를 하지 않고서 영능력이 있을리 만무하다.  거기에 욕심없는 마음이 더욱 영롱투철한 심경이 되어 신통한 힘이 깃들게 하였다.

  불도징이 행각할 때는 수백명이 그의 뒤를 따랐다.  제자가 일만명이 가까왔다고 한다.  석륵이나 석호와 같은 국왕이 사사하고 존경하였으므로 그의 가신이나 서민도 또한 불도징을 부처님처럼 숭배했을 것이다.

  불도징은 893개소에 절을 지었다.  이것이 79세에서 117세에 이르는 약 40년간의 일이다.  혼자서 이만한 절을 세운 것은 중국불교사를 통하여 불도징 외에는 없다.  그의 경이적인 인심 파악 능력은 계율과 영능력에 의했던 것이다.

  서기 348년 불도징은 석호가 멸망할 것을 예언하고 죽었는데 석호는 그 다음해에 죽었다.  불도징이 죽자 석호는 시맥(柴陌)에 장사지냈다.  석호는 불도징을 관에 넣으면서 생존에 사용하던 석장(錫杖)과 발우를 그 속에 넣었다.  뒷날 관을 열어보니 바우와 석장만이 남았고 시체는 없었다.  그무렵 이런 말이 유행되고 있었다.  「불도징이 죽던 날 서역의 사막길을 걷고 있는 불도징을 보았다.」는 소문이다.  이것은 뒷날 달마대사의 경우와 똑같은 이야기다.

  불도징은 축법호(竺法護)나 구마라습처럼 경전을 번역한 것도 아니고, 도안(道安)처럼 경전을 주석한 것도 아니다.  다만 한결같이 영능자로서 특수능력을 발휘하여 많은 사람들을 교화하였다.  국왕에서 시민에 이르는 많은 사람들이 위대한 전법자로서 불도징을 맞이했다.  호족인 석륵, 석호를 교화하여 조금이라도 잔학행위를 줄이게 하고 부처님의 자비의 가르침을 살벌한 전국시대의 사람들 마음에 심어 주었다.  불도징 자신은 경전에 주석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제자 도안이야말로 중국불교의 교의의 기초를 확립한 사람이다.

  불도징의 위대한 감화력은 멀리 천축에서 중앙아시아의 강거국(康居國)까지 떨쳤다.  불조(佛調)수보리(須菩提)등 수십신의 승들은천축이나 강거에서부터 수만리의 길을 멀다하지 않고 다쿠라마칸사막의 유사(流砂)를 넘어서 불도징이있던 업도를 찾아왔다.  이 한 가지만 보더라도 불도징이 위대한 선교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79세에 와서117세에 죽을 때까지 교화자로서의 대활약은 참으로 범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불도징의 영능력의 감화력은 참으로 컸다.  민중 속에 불교의 가르침을 전하고 교화한 것은 그 영능력에 의한 경우가 많다.  종래 중국불교사를 볼 때 구마라습이나 현장같은 위대한 역경삼장이나 화엄종의 현수(賢首)대사, 법상종의 자은(慈恩)대사,삼론종의 가상 (嘉祥)대사 등 교학의 조직자를 중심으로 볼때 민중 속에 불교를 침투시키며 민중의 우러름을 받은 불교자들은 신이(神異)와 감동을 나타난 사람들이다.

  민중이나 권력저의 마으미을 사로잡은 뛰어난 영능자야말로 참된 교화자이고 선교자라 할 수 있다.

(이글은 일본, 大法輪 제54권 제1호의 전역이다.)  (佛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