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동불교의 개조 태산승랑 (泰山僧朗)스님

중국불교의 異僧 ③

2009-07-06     관리자

 1 낭공석과 낭공탑

 중국 4대 명찰의 하나인 산동성 (山東省) · 장청현(長淸縣)의 영암사는 북위 때 (520~525) 법정(法定)스님이 지었는데 그 전신은 유명한 동진(東晉)의 태산 승랑스님이 설법한 자리에 세운 것이다.

 영암사는 동악 태산(泰山)의 한 봉우리인 영암사에 세운 절인대 주위는 깊은 산으로 둘러싸인 산골이었다. 거기에는 샘물이 넘쳐 흐르고 솔로 덮여 한적한 곳이다. 저 옛날 승랑스님이 태산의 북암 아래서 설법을 했는데 청중이 천 명이 되었다 하고 돌마저도 머리를 숙였다고 한다. 이 돌은 지금도 절 동쪽에 있는 낭공산 위에 솟아 있는데 그 모양이 노승을 닮아서 낭공석이라 불리우고 있다.

 승랑스님은 태산 서북에 있는 곤륜산에 절을 지었는데 이것이 신통사(神通寺)의 옛터다. 거기에는 현재도 사문탑(四門塔)과 천불애(千佛崖)와 낭공탑(朗公塔)이 있다. 낭공탑은 탑신에 용과 호랑이가 새겨있어 용호탑이라고도 한다. 높이는 10.8m가 된다. 탑신에는 화엽모양이 새겨진 가운데 용호, 라한, 역사, 악사, 비천상 등이 부조되어 있다.

 이 용호탑에서 한 골짜기를 건너서 사문탑이 있다. 수(隋) 7년(611)에 세워진 이 탑은 중국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탑 중의 하나다. 높이는 15.04m이다. 사문탑 언덕 배후에 천불애가 있다. 천불애에는 지금도 불상 210이상이 새겨져 남아있다. 이 정적한 산 기운에 싸인 신통사 자리에 산동불교를 열은 승랑스님이 살고 있었다.

 2 영지를 먹다

 불도징스님의 가르침을 받은 한 사람이 태산 승랑스님이다. 태산에서 전진의 부견과 후진의 요흥(姚興)에게 존승되고 백여인의 제자를 교화하고 숲 속에 숨어 살던 승랑스님도 중국불교에 기초를 배운 도안(道安)과 함께 불도징의 제자였다.

 승랑스님의 전기를 고승전(高僧傳)에 보인다. 어려서부터 제방을 두루 다니다가 뒤에 장안에서 방광반야경(放光般若經)의 연구와 강의에 힘썼다. 그러나 스님은 한낱 학자는 아니였다. 항상 소식, 포위(包圍)로 살았고 뜻은 사람 밖에 있었다고 이르듯 채, 소식을 지키고 뜻은 세속 밖에 있었다.

 도회의 생활에 만족하지 않고 산중에 뜻이 깊었다. 전진(前秦) 부견왕의 황시원면 (351)스님은 태산으로 옮겼다. 태산에 간 것은 장충(張忠)이 있었기 때문이다. 장충은 도술에 뛰어난 도사였다. 장충은 「영가(永嘉)의 난」때에 태산으로 숨었다. 항상 호흡이 고르고 우주의 연기를 빨아들이는 복기법(服氣法)을 행하였다. 또한 나무에 기생하는 영지와 깊은 산에 자생하는 석장생(石長生)을 먹기도 했다.

 장충의 주거는 심산 유곡에 있었다. 땅을 파고 석굴을 만들어 거기 살았다. 제자들도 스승과 같이 좀 떨어진 곳에 석굴을 파고 살았다. 석굴은 겨울에 따뜻하고 여름에 시원하며 바깥 소리가 끊이여 한결같이 좌선이나 명상을 할 수 있었다.

 제자들은 5일에 한 번 장충이 있는 석굴로 가르침을 받으러 갔다. 장충은 결코 말을 하지는 않았다. 무언(無言)의 설교였다. 석굴 안에는 도단이 놓여 있고 장충은 매일 아침 거기에 예배했다. 장충의 생활은 산림에 숨어 사는 은자의 생활이었다.

 이 산림의 성자 장충의 생활을 그대로 불교도로서 실천한 것이 승랑의 생활이었다. 승랑에게 준 장충의 영향은 대단히 크다. 승랑에게 한 권의 저서도 없는 것 역시 장충의 영향이리라.

 태산 골짜기에서 승랑 등 제자와 함께 선인생활을 보내고 있던 장충은 이윽고 부견(符堅)의 청을 받아 태산을 떠났다. 그러나 장충은 권력자 측이 되어 도시 생활을 할 수 없었다. 화산(華山)으로 들어가 거기서 죽었다.

 장충과 헤어진 승랑스님은 태산서북 금여곡(金輿谷)에 있는 곤륜산(崑崙山)에 따로 정사를 짓고 거기서 살았다. 금여곡은 험준한 봉우리가 솟았고 바위 사이에 물이 흘렀다. 승랑을 따라 거기에 수행 온 사람들을 위하여 방실을 지었다. 찾아온 사람이 100여 인이 되었다고 하는데 승랑은 부지런히 수행자를 가르쳐 지칠 줄을 몰랐다.

 3 여인 금제의 도량

 금여곡 곤륜산에 정사를 지은 것으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곤륜산이란, 중국 서쪽에 있다고 생각되는 영산(靈山)의 이름이다. 황하가 이곳에서 시작되었다고 하고 서왕모(西王母)가 사는 낙토라고 일러온 산이다. 곤륜산이라는 이름을 골짝 이름에 붙인 것처럼 승랑도 또한 도술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수경주(水經注)」에 다음과 같이 적고있다.

「사문 승랑은 젊어서 불도징에게 배웠다. 크게 배워 깊이 통하고 특히 귀이(氣緯)에 밝았다. 이 골짜기에 숨었으므로 낭공곡(朗公谷)이라 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방광반야경」에 통한 승랑은 석학이라고 할만 하지만 그 위에 「특히 기위에 밝았다」라 한 것처럼 길흉 점험에 통하여 길흉을 예언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승랑이 머물고 있던 금여곡에는 자주 호랑이가 출몰했다. 사람들은 혼자서 산을 거닐 수가 없어 반드시 지팡이를 들고 무리를 지어 다녀야 했다. 그러나 승랑이 이 골짝에 살면서부터 호랑이가 사람에게 위험을 주지 않게 되어 밤에도 무사히 통행할 수 있었다. 그래서 백성들은 승랑의 덕을 칭송하여 금여곡을 낭공곡이라 부르게 되었다.

 뛰어난 신통을 나타낸 스님들에게 호랑이가 따른 것은 고승전에 자주 보인다. 예를 들면 박승광(雹僧光)이 석성산(石城山)에서 호랑이 떼가 울부짖는 속에서 좌선을 하여 마침내 호랑이를 항복받았다 하였고 담유(曇猷)는 적성산(赤城山)에서 독경하고 있으면 수심 두의 맹호가 그 앞에 웅크려 머리를 숙이고 경을 들었다고 한다.

 승랑스님에 대하여 신승감통록(神僧感通錄)에 다음과 같이 보인다. 「그전에 그 골짜기에 호랑이가 많았다. 스님이 거기에 살면서부터 집개와 같게 되었다. 샘에 이상한 일이 있었다. 여인이 거기에 나타나면 곧 말랐다. 스님이 축원하면 다시 물이 찼다.」 그래서 금여곡의 정사에는 여인 금제의 수행 집단의 정사가 되고 개율을 엄격히 지키는 도량이 됐다.

 4 국왕의 부름에 불응하다

 전진왕 부견은 앞서 장충을 초청해 갔으나 장충은 이윽고 화산에 숨었다. 그래서 부견은 승랑스님을 부르려 하였다. 장충에게서 스님의 타고난 예언 능력과 길흉 점험의 능력을 들어서 알았을 것이다. 부견은 승랑스님에게 깊은존경을 담은 편지를 보냈다. 부견은 승랑스님과 만나고자 하여 사자와 수레를 보내어 도읍에 맞고자 하였다. 선물로 자금(紫金) 몇 근과 금불상, 그리고 비단 30필을 보냈다. 이에 대하여 스님은 몸이 쇠약해진 이유로 부견의 청을 사절하였다. 부견은 뒷날 불교 교단을 숙청하게 되었는데, 스님이 있는 낭공곡 정사는 계율을 엄정히 지키고 있으므로 숙청 대상에서 제외했다. 스님은 다시 호족의 군주인 척발계(拓跋桂 386~409재위)에게서도 존숭을 받았다. 척발계는 불도징스님처럼 군사고문으로 스님을 맞으려 하였다.

 승랑스님에게 서한을 보낸 것은 그뿐만이 아니다. 부견의 대군을 파한 동진의 효무제(孝武帝)도서한을 보냈다. 그는 군사나 국정에 스님을 참여시키고자 한 것이 아니고 정신계에 군림하는 스님에게 깊은 경의를 표한 것이다. 그 밖에 남연왕(南燕王)인 묘용덕(墓容德)은 사자를 보내어 승랑스님에게 동제왕(東濟王)이라는 칭호와 산동성 태안부와 장청현 2현을 하사 하려 하였다. 스님은 동제왕의 호는 사퇴하고 2현의 조세만을 받아 사탑의 건립에 썻다.

 이처럼 국왕들에게서 많은 초청을 받았지만 스님은 낭공곡에서 한걸음도 밖에 나아가지 않고 한결같이좌선과 독경으로 밤낮을 이었다.

 5 선자의 모형

 호랑이의 재난을 없애고 길흉에 밝은 승랑스님은 선자의 모형이기도 하다. 스님의 사상은 분명하지 않으나 그의 행실에는 앞서 본 바와 같이 장충의 감화가 있었다. 장충은 거문고나 서책을 배우지 않고 경전도 읽지 않으며 다만 지도허무(至道虛無)를 근본으로 하여 사람들에게 가르칠 뿐이였다. 오직 실천할 것을 가르쳤다. 그것도 무언의 설법이었다. 이 장충의 감화를 받은 승랑스님도 행(行)의 사람이었다.

 장충은 말로 설명하지 않았다. 형상으로써 가르침을 보이고 태도로써 그것을 보였다. 바로 이것은 후대 선종의 교외별전(敎外別件) 불립문자(不立文字)였다. 장충이야말로 불립문자의 실천자였고 그 방법은 그대로 승랑스님에게 전해졌다. 스님이야말로 바로 선자의 소형(素型)이다.

 당대(當代)에 와서 승랑스님을 잇는 선자가 나타났다. 그는 항마장(降魔藏)이라는 선자였다. 그는 7세부터 혼자서 방에서 좌선했다. 혼자 황야에 있어도 두려움을 몰랐다. 그 후 여러 영적과 영산을 찾아다녔다. 어느 날 북종선(北宗禪)이 성하다는 말을 듣고 신수(神秀) 스님을 찾아 문답했다. 항마장이란 이름에서 보이는 것처럼 악마와 싸워 굴복시킨 항마장이었으므로 악마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신수는 항마장에게 당신은 태산과 깊은 인연이 있다고 일렀다. 그래서 항마장은 도읍을 떠나 멀리 산동성 태산으로 갔다. 그는 금여곡에 들어갔다.

 거기는 승랑스님의 신통자 자리였다. 거기서 수년 수행하고 있으니 많은 수행자가 모였다. 이윽고 신통사가 재건되고 왕년에 성관을 회복했다. 항마장은 훌륭하게 승랑스님을 재승한 선자였다.

 항마장이 금여곡에 왔을 때 신통자 정사는 황폐되어 있었다. 항마장은 승랑스님을 목표로 하여 좌선했다. 불립문자 교외별전의 가르침은 몸으로 체득할 뿐이다. 기력이 쇠하면 영암산사 낭공석에게로 갔다. 항마장은 낭공석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그러면 낭공석에게서 승랑스님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항마장은 승랑스님의 격려의 말을 듣고 산을 내려와 또 다시 전력을 기울여 수도에 힘썼다.

 여인이 가까이 가면 물이 말랐다는 샘이 있는 신통사의 여인 금제의 법도는 항마장에 와서도 조금도 변치 않았다.

 말없는 행으로써 가르침을 보인 장충은 도사(道士)였으나 승랑은 불자였고 항마장은 선자였다.표면적으로는 좀 다르게 보이지만 근본정신에는 공통된 피가 흐르고 있었다. 현소와 권력이 우굴대는 도회를 버리고 산림 영지에서 수행했다. 산곡의 영기를 받아 그것을 정신의 자양으로 한 것이었다.

 현재 신통사 가람은 찾을 길 없고 다만 초석이 발견될 뿐이지만 낭공탑과 사면탑은 하늘 높이 솟아 있다. 그 골짜기는 산면이 산에 둘려있고 깊은 숲이 덮혀 있다. 개울물이 흐르는 것을 보며 고요한 골짜기를 걸으면서 승랑스님과 항마장스님을 생각했다. 참된 수행을 하자면 산골에 들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산골에 숨어 산다는 것은 어렵지만 스스로 정신을 산골로 삼아 청정계행을 지키며 한결같이 도의 길을 걸어가야 할 것이다. 
 <이글은 일본 大法輪 제 54권 제 4호의 초역이다. 一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