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날의 참회

남지심 연작소설

2009-07-03     관리자

집안 결혼식에 참석한 강여사는 거기서 오래간만에 고종사촌 오빠를 만났다. 사촌이라면 부모들 사이는 형제간이니 가까운 사이로치면 더할 수 없이 가까운 사이지만 실은 그렇지가 못해서 강여사가 고종사촌 오빠를 만난 것은 햇수로 치면 10년도 더 된듯 싶었다. 그렇다고 해서 두사람 사이에 특별한 감정대립이 있었던건 아니다.

'그냥 살다보니'라는 말이 가장 적합한 이유가 될 성싶은데 정말 그냥 살다보니 서로 그렇게 지내오게 되었다. 집안 친척들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는 기회는 무엇인가 행사가 있을 때다. 결혼식이든 환갑이든 하다못해 장례의식이라도 치러야 멀고 가까운 친척들이 한자리에 모여 서로 얼굴이라도 보게 된다. 그렇지 않고서는 요즈음처럼 바쁜 생활속에서 친척이라는 유대관계 하나만으로 서로를 찾아다니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고 말았다.

결혼식이 끝나자 식에 참석했던 하객들은 한자리에 모여 식사를 하면서 환담들을 나눴다. 하객이란 거의 친척들이었고 친척도 어린시절을 함께 보낸 공동의 추억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야기를 하다보면 자연히 과거의 추억들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러한 것은 오로지 친척들 끼리만이 나눌 수 있는 재미이기도하다.

강여사도 오래간만에 만난 친척들과 어린시절의 추억들을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그때 옆에 앉았던 고종이 '얼마 전에 규환이를 만났는데 네 안부를 묻더라'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강여사는 강한 충격이 느껴져 고종 얼굴을 가만히 올려다 보았다. 그녀 자신도 규환이가 어떻게 지내는가 안부를 묻고 싶었지만 전에 들은 말이 있었기 때문에 선뜻 그의 안부를 물을 수가 없었다. "규환이를 언제 봤는데?" 강여사 앞에 앉았던 사촌 올케가 강여사의 궁금함을 대신 묻듯 규환이 안부를 물었다.

"한 일 년 됐을 거예요. 고향에 갔더니 마침 규환이도 거기에 와 있더군요." "요즈음은 뭘 하는데?" "가끔 미국을 갔다 오는 모양인데 아직 자리를 못 잡고 있나봐요." "자리를 못 잡고 있다니, 어떻게 지내는데?"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강여사는 고종을 향해 이렇게 물었다. "그냥 하는 일 없이 왔다 갔다 하는 모양이야." "......." 강여사는 입을 다물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10여년전에 들은 이야기와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새로 여자를 얻었다더니 그 여자 하고도 같이 안산데?" "그 여자 하고도 벌써 헤어졌나봐요." "그럼 아이는?" "아이는 규환이가 맡았겠지요." 고종도 아이문제는 확실히 모르는 듯 자기 짐작으로 대답했다. "아니 그럼 배다른 아이 셋을 규환이 혼자서 키우고 있다는거야?" 올케가 다시 물었다. "두번째 여자는 나중에 와서 아이를 데리고 갔데요." "사람 팔자를 모른다곤 하지만 그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살고있지....."

사촌 올케는 혀라도 찰것 같은 어투로 이렇게 말했고 화제는 곧이어 다른쪽으로 옮겨졌다. 규환이라는 이름이 화제에 오른 이후 강여사는 마음이 착잡해져서 다른 대화에는 끼어들 수가 없었다. 강여사가 규환이를 처음 안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여름방학을 하면 연중행사처럼 고향을 다녀왔던 그녀는 그해 여름에도 방학을 하자마자 고향으로 내려갔다

고향에는 조부모님과 백모님 그리고 사촌오빠 내외가 살고 있었는데 어린시절 강여사가 큰댁이라고 불렀던 그 집은 푸른 대나무가 에워싸고 있었고 사랑채 마당가에는 큰 목백일홍 나무가 한그루 서 있어서 강여사가 머무는 여름내내 붉은 꽃송이를 아련하게 피우고 있었다. 강여사가 큰댁에 갔을 때 고종사촌 오빠가 강여사를 데리러왔고 강여사는 오빠를 따라 고모님댁을 방문하러 갔다. 고모님댁은 차에서 내려 재 하나를 넘고도 오리쯤 더 걸어 들어가야 하는 산골이었는데 그마을로 들어가려면 징검다리가 놓여있는 개울물을 건너야 했다.

강여사가 오빠 뒤를 따라 개울물을 건너고 있을 때 마을 청년들이 징검다리 중간쯤 마주 건너와서 두 사람을 가로막고는 건너가지 못하게 방해를 했다. 낯선 여학생이 마을로 들어서자 그들은 슬그머니 장난을 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러자 고종은 고종대로 모처럼 서울서 온 누이동생 앞에서 위신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던지 상대방 청년들한테 도로 건너가 달라고 요구했다. 쌍방이 서로 마주서서 옥신각신 싸우고 있을 때 돌담이 쳐진 골목길에서 한 청년이 걸어오다가 그 광경을 보고는 마을 청년들한테 양보를 하라고 권했다.

그의 권고가 있자 마을 청년들은 슬그머니 징검다리를 도로 건너갔고 그 덕분에 두 사람도 무사히 개울물을 건널 수가 있었다. 강여사가 오빠를 따라 언덕길을 오르고 있을 때 "S여고 학생이 여기까지 어떻게 왔지?"하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강여사는 자신의 교복을 보고 학교이름을 정확하게 대는 남학생이 산골마을에 있다는 것이 너무도 신기해서 "지금 말한 사람은 누구야?" 하고 옆에 있는 고종한테 물어 보았다. "규환이야. 조금 전에 길을 비켜주라고 하던 그 사람." "그런데 어떻게 우리학교 이름을 알지?"

"그 친구도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니까 K대학교 1학년이야." 그날 강여사는 고종을 통해 규환이가 K대학교 경영학과에 다닌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리고 그는 그의 부모가 딸 여섯을 낳은 후에 천신만고 끝에 얻은 귀한 아들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강여사 올케 친정과 규환네 집은 아래위집이고 고모댁과 올케 친정과는 친척간이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의 집안 내력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그 후 몇 년이 지나 강여사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 고종이 서울로 와 강여사집에서 반년 가까이 머물러 있었다. 그때 규환이는 친구를 찾아 강여사집을 방문하게 되었고 대학생으로 변한 강여사를 이성의 눈으로 새롭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규환이는 학생회 간부로, 불교 써클의 회장으로 적극적인 학교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이런 그의 적극성은 감정적인 면에도 그대로 방영돼 거의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강여사에게로 접근해 왔다. 그렇게 되자 강여사는 반사적으로 규환이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게 되었고, 강여사가 그를 만나 주려고 하지 않자 규환이는 마치 강여사를 만나는 일만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의 전부이기나 한 것처럼 아침 저녁으로 강여사가 다니는 길목을 지키고 서서 그녀를 기다리곤 했다.

그러면서부터 그의 얼굴은 미이라처럼 창백해져 갔고 그의 두 눈에는 적의가 번득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규환이는 강여사에게 있어선 완전히 공포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아침 일찍 학교에 갈 때에도 혹시 규환이가 길목을 지키고 있지 않나 해서 전전긍긍했고 밤늦게 귀가 할 때에는 가족 중 누군가가 나와서 그녀를 데리고 가야만 했다. 이런 생활은 1년 반쯤 지속되었고 자신의 감정에 지친 규환이는 학교에 휴학계를 내고 경기도에 있는 암자에 가서 몇 달을 있기까지 했다.

강여사가 3학년 겨울방학을 맞고 있을 때 규환이 친구가 찾아와서 규환이를 한번만 만나 달라고 간청을 했다. 그때 강여사로서도 규환이와의 관계를 어떻게든 매듭을 지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강여사는 규환이가 기다리고 있는 다방으로 나갔다. 강여사를 본 규환이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집에서 결혼을 시킬려고 하는데 혜임씨의 마음을 솔직하게 알려 주십시요"했다. "제 마음은 규환씨가 이미 알고 있잖아요?" "그럼 저하고는 결혼을 할 수 없다는 얘깁니까?" "네. 전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요." "....."

강여사 말을 들은 규환이는 한참동안 절망적인 얼굴로 강여사를 노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런 그의 두 눈에는 눈물이 핑 돌고 있었다. 그것이 강여사가 규환이를 본 마지막 얼굴이었다. 그 후 강여사는 규환이가 부모님이 권하는 대로 시골에서 국민하교만 나온 아가씨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결혼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뭔가 좀 안됐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신을 괴롭히던 난제가 완전히 매듭지어졌다는 생각 때문에 홀가분해지기도 했다.

그런 후 다시 10년쯤 세월이 지났을 때 강여사는 고종을 통해 규환이가 취직해 있던 재벌기업을 그만두고 모교인 K대학과 J대학에서 시간강사로 뛰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아내와의 사이에는 딸 하나를 두었는데 두 사람은 성격적인 조화를 이루지 못해 현재 별거중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강여사는 마음속으로 약간의 죄책감 같은 것을 느꼈지만 그러나 그 일은 그녀 앞에 다가온 현실이 아니었기 때문에 강여사는 규환이라는 이름을 잊은 채 다시 몇 년을 살았다.

고종의 말에 의하면 규환이는 첫 번째 부인과는 이혼을 하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은 70세 노모한테 맡겼다고 한다. 그 후 그는 심한 방황의 시기를 보냈고 그시기에 알게 된 모카페의 마담과 동거생활을 했지만 그녀와의 관계도 원만하지 못해 그는 두 번째로 만난 여자와도 헤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자 규환이는 자신의 감정도 정리할 겸 공부도 더 할 겸 겸사겸사해서 미국유학을 떠났지만 두 여자한테서 낳은 아이들에 대한 부담 때문에 공부도 마저 마치지 못하고 귀국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귀국 후 그의 방황은 더욱 심해졌고 이혼경력이 있는 여자와 세 번째 결혼을 했지만 그 결혼도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결혼식장에서 모처럼 고종을 만나 규환이 소식을 들은 강여사는 한편의 영화를 본 것처럼 그가 살아온 세월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때 나는 좀 더 현명할 수가 없었을까?" 강여사는 자기 자신을 향해 이렇게 반문해 보았다. 젊은시절 그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마음을 돌리게 할 수 있었다면 규환이는 지금쯤 좋은 여자를 만나 평범한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에게는 재능도 있고 적극성도 있고 진실성도 있었으므로........

자신이 지나온 20대의 터널을 돌이켜보던 강여사는 자기 자신의 지혜가 너무도 모자랐다는 생각을 속으로 하고 있었다. 먼 훗날 나는 지금 넘고 있는 이 40대의 고갯길을 회상하면서 또 어떤 후회를 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