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아닌 곳이 저절로 풍류로다

내 마음의 법구

2009-07-02     관리자
약 15년 전 송광사의 은사스님으로부터 무(無)자 화두를 받고 정신없이 몰두하던 시절이 나름대로 한 매듭지었던 때, 유발상좌로서 여산(如山)이라는 법명도 받아 비로소 여러 경전을 읽어도 무방하다는 허락이 있었다. 불가의 대표적 몇몇 경전과 선어록을 읽으면서 예전에는 그토록 비논리적이고 어렵던 경전과 선어록이 어찌 그리 자세한 설명이자 아름다운 시(詩)였는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말씀 하나하나가 모두 마음에 와 닿는 내용들이었지만, 그 중에도 너무도 좋은 표현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금강경오가해』 중에 있던 야보도천(冶父道川) 선사의 선시들이다.
야보 선사의 선시는 어느 것 하나 요절(要節)을 꿰뚫지 아니한 것이 없어 읽는 이로 하여금 참으로 즐거움을 맛보게 하지만, 특히 다음 시의 구절은 공감의 차원을 넘어 항상 내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있다.

한가히 노니는 곳에 또한 한가함이 있고,                    得優遊處且優遊
구름은 스스로 높고 물은 저절로 흐른다.                    雲自高飛水自流
물속의 얼굴 잡고 거울에서 찾으며                            水中捉鏡裏尋頭
빠진 칼 찾으려 배를 새겨 소에 앉아 소를 찾으니         刻舟求劍騎牛覓牛
허공 꽃 아지랑이 꿈과 같은 물거품이네.                    空花陽焰夢幻遊池
모두가 한 붓끝에 있어 쉬고 싶으면 곧 쉬나니             一筆句下要休便休
천한 노래와 술자리 시골 즐거움에                            巴歌社酒村田樂
풍류 아닌 곳이 저절로 풍류로다.                              不風流處自風流

특히 당시 내 마음에 와 닿은 구절은 ‘천한 노래와 술자리 시골 즐거움에, 풍류 아닌 곳이 저절로 풍류(巴歌社酒村田樂 不風流處自風流)’라는 마지막 구절이다. 여기서 풍류(風流)라는 표현은 지금은 그 뜻이 많이 변했지만 원래의 뜻은 부처님의 깨달은 경지를 말한다. 『유마경』 「불국품」에서 우리의 직심(直心)에 따라 사바세계가 불국토 됨을 설한 대목도 이와 같고, 운문 선사의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이라는 표현도 있듯이 희로애락의 범사로 가득 찬 우리의 일상 그 자체가 그대로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정토됨을 간단명료하면서도 아름답게 표현해주고 있지 아니한가. 이와 유사한 선시로서 고려 말의 나옹혜근 선사의 게송도 기억에 남는다.

철장 가로 매고 휴휴암에 왔더니                              鐵錫橫飛到休休
쉬고 쉴 곳 얻어 곧 쉬었노라                                   得休休處便休休
지금 이 휴휴암을 떠나니                                        如今捨却休休去
사해오호를 마음대로 노니네                                   四海五湖任意遊

휴휴암은 나옹 선사가 여름 안거를 지낸 도량이었다. 사상(四相)만이 아니라 공상(空相)이나 법상(法相)마저 버리고 송곳 찌를 곳마저 없는 가난한 화엄의 사사무애(事事無碍) 경지가 아니런가. 필자도 야보 선사의 쉬고 싶으면 곧 쉬는[要休便休] 경지를 본받고자 감히 본인의 서재를 휴휴재(休休齋)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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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희종 _ 서울대 수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일본 동경대에서 생명약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펜실베이니아대 의과대학 박사 후연구원, 미국 하버드대 의과대학 강사, 보스턴대 의과대학 조교수를 거쳐 현재 서울대 수의과대학 교수로 있으며, 중앙승가대에서 불교생명생태학을 강의하고 있다. 또한 현재 조계종 불교생명윤리위원회 연구위원과 정심여자정보산업학교 종교지도위원 등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생명과학과 선』, 『불교생명윤리 이론과 실천』(공저), 『욕망; 삶의 동력인가 괴로움의 뿌리인가』(공저), 『나; 찾을 것인가 버릴 것인가』(공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