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꿈 밝은 길] 지심귀명례의 의미와 기쁨

푸른 꿈 밝은 길

2007-05-24     도법스님

  요즈음 공감폭이 넓게 형성되어진 용어중의 하나가 '일상속의 작은  기쁨, 작은 아름다움' 이라는 표현이다. 

  언제 들어도 잔잔하고 따뜻한 정감으로 다가온다.  그런 의미에서 간혹 삶이 행복하다는 사람을 만난다.  아름다운 미래의 꿈과 넘치는 기쁨에 젖어있는 듯한 표정은 보는 이로 하여금 흐뭇하게 한다.

  그래서 그런지 라디오, 텔레비젼, 책의 내용들도 일상속의 직은 기쁨과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일이 중요함을 강조하는 경향들이다.   이와는반대로 대부분의 사람들마다 삶이 고달프고 불행하다고 한다.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은 고통의 아우성들이다.  죽지못해 산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심지어는 행복에 겨워한다.  사람들도 어느날 행복의 조건이 비뀌어지면 못살겠다는 소리를 스스럼없이 늘어 놓는다.

  사실, 매일 보도되는 내용이나 이웃들의 일상적 모습에서 보게되는 현상도 고통과 불행의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들은 살아오면서 가끔 불행해 못살겠다고 엄살부리던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행복의 꿈에 푹신빠져있는 전혀 다른 모습의 사람을 만난다.

  그런가하면 천년만년 행복하게 살것처럼 확신하던 사람이 괴로워 더이상 살 의욕이 없다며 처절하게 절망하는경우를 보기도 한다.  이와 같은 현상을 경험할 때 마다 행복과 불행은 과연 있는 것인가, 있다면 어디에 어떻게 있는 것인가 하고 의심하게 된다.

  이럴 때 들뜬 감정을 가라앉히고 냉정하고도 담담한 시선으로 삶을 관조해 보면 확실한 하나 의 진실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우리가 매달려 울고 웃는 행복과 불행의 실체는 그어디에도 있지않다는 사실이다.  

  실은 행. 불행 뿐 아니라 세상의 어떤 것들도 조건 (인연) 에 의하여 형성되어진 하나의 상태가 순간순간 있는 것처럼 보여지고 있을 따름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불행의 절망감에 빠져 한탄하는 자와 행복의 꿈에 부풀어 우쭐대는 자 모두가 있지도 않은 허망한 꿈에 속고 있기는 매 한가지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엄연한 진실 (法)임을 누구도 부정할 수가 없다.  진실의 세계엔 인정 (人情)이 통하지 않는다.  법[진실] 의 세계에도 사정이 있는 것처럼 여기는 착각은 하루 빨리 깨어 나는 것이 좋다.

  우리가 진정 행복하고 자유로워질수 있는 길은 이 사실을 당연 (영원 )한 진리로 자각하고 믿을 때 열려오게 되어 있음을 알아야 하겠다.

  따라서 크고 작은 행. 불행이 영화의 화면처럼 매순간 지속되어지고 있는 허상일 뿐임을 궤뚫어 보는 일이 우선되지 않는 한 일생을 속고 지내는결과를 낳게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허상을 깨고 뛰쳐나오도록 이끌어 주지 못하는 한 그 무엇도 정당한 가치를 부여할 수 없는 것이며,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유와 행복의 길도 열려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할 일이다. 

  이런 입장을 굳건하게 지켜가시고 그길을 크게 열어 보이셨던 부처님의 가르침을 몇 가지 상기해보자.

  "오온(五蘊)이 개공(皆空)임을 조견(照見)하라.  한 걸음에 일체의 고통과 액난의 바다를 훌쩍 건너 뛰게된다.

  " 세존께서는 허상임을 꿰뚫어 볼때 비로소 실상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허상이 바로 실상의 현현임을 체득하는 순간 비로소 푸른 꿈 밝은 길이 목전에 펼쳐진다고 고구정녕하게 말씀하셨다.

  세존 당시 외아들을 잃은 홀어머니의 이야기는유명하다.  아들을 잃고 슬픔에 빠진 어머니가 석존께 찾아와 아들을 살려준다면 자기 목숨이라도 내놓겠다며 애원했다.  세존께서는 '정말 아들을 살리기 위해 시키는 대로 하겠느냐' 고 다짐을 받은 다음 지금 곧장 마을로 돌아가서 사람 죽은 적이 없는 일곱 집을 찾아가 겨자씨 일곱 알만 얻어오면 아들을 사려준다고했다.

  여인은 마을 집집을 돌았지만 겨자씨 한 알도 얻을 수가 없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할 수 없는 마음상태로 돌아다니던 어느날 섬광처럼 뇌리를 스쳐가는 빛을 발견했다.

   "태어난 자는 반드시 죽는다.  이것은 영원한 진리이다."

  여인은 빈손으로 다시 세존을 찾아 뵙고 그 발 아래 예배올렸다.  "세존이시여 진실로 감사합니다."  여인의 표정 어디에도 슬픔과 비탄은 보이지 않았다.  맑고 평온함이 잔잔하게 흐르고 있을 뿐이었다.  세존은 결코 환상적인 꿈으로 여인 을 위로하려고 하지 않았다.  있는 사실을 바르게 보고 그 사실을 바르게 인식함으로 써, 환상의 꿈 허상의 집착에서 깨어나도록 했을  뿐이다.  또 무엇이 더 있단 말인가.

  불교인들이 해야할 일,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입장은 사실을 사실로써 일깨워주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도록 돕는 것이다. 

  왜 그래야만 하는가.  길이 그 길하나뿐이기 때문이다.  간경, 지계, 염불,  참선, 참회, 발원, 전법 그 무엇도 무방하다.  오로지 하나의 길, 허상이 허상임을  꿰뚫어보게 하는 일이면 된다.

  이와 같은 기본입장을 지키고 살려내지 못하는 한 부처님을 머리에 모시고 다닌다 해도 이미 불교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그 길은 어디에 어떤 모양으로 있는가.  절집에 옛부터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아침저녁 예불과 대중공양과 운력을 빠지지 않으면 중노릇 잘하는 것이다.'    노스님들께 이 말을 들었던 어린 시절에는 그말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이해되기는 켜녕 오히려 자신들의 무사안일한 수행태도를 적당히 합리화하려는 구차한 변명처럼 들렸다.

  30여년이 지난 오늘 뒤돌아 볼 때 얼마나 경박한 생각이었는지 얼굴이 붉어진다. 사실 그동안의 경험에 의하면 아침저녁 예불과 대중공양과 운력을 함께하는 일은 결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이기적이고, 사적이며, 편안하고자 하는 마음을 단단하게 다스리지못하는 한 실천되지 않는다. 자아중심의 이기적 사고를 내던지려는 결단이 없고선 불가능한 것임을 깨달은 것은 철이 들었다 싶은 요즈음에 와서이다'

  "지극한 마음으로 목숨바쳐 돌아가  예배하나이다 (至心歸命禮)."  지심귀명례라는 이 한마디 이 하나의 실천속엔 허상을 꿰뚫어보고 존재의  실상을 드러내는 불교의 진수가 온전히 담겨져 있다.  자아의식의 허상들을 내던지고 실상의 본래면목을 치부하기 위한 사무치는 외침, 구체적인 실천이 귀명례인 것이다.

  오릇한 한마음 한뜻으로 지심귀명례를 실천한는 행위밖에 왜곡된 자아 의식의 뿌리를 절단하는 금강보검, 왜곡된 자아의식의 허상을 타파하는 지혜의 칼이 따로있지않다. 

  선(禪)의 길, 보살행의 길도 결국삼보(三寶)를 향한 믿음으로 자신을 바치는 삼업(三業)의 창조적 활동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이렇게 볼때 우리는 이미 바르고 참된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할수 있다.

  환상의 꿈에 현혹된 행복이나 허상의 질곡에 빠지는 불행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큰길, 허상을 허상으로 궤뚫어 보고 허상이 바로 실상의 현현임을 체득하는 큰 길인 지심귀명례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값진 일이며 이보다 더한 기쁨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 뜻에서 우리가 가는 길에 대한 바른 인식의 토대 위에서 자부와 긍지를 갖는 것은 결코 주저 할 일이 아님을 확신해도 좋을 것으로 사료되어진다.

  "오롯한 한마음 한뜻으로 목숨바쳐 삼보전에 귀명례하나이다."

 

도법 스님
전북 금산사에서 출가하여 제방선원과. 강원에서 정진 하였으며 금산사 부주지를 역임하였고 지금은 수덕사 정해사에서 '선우도량' 결사를 주도하며 새로운 불교수행을 창출하기에 바쁜 소임을 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