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이 울고 있다

김춘식의 행복한 시 읽기

2009-07-02     관리자
황혼이 울고 있다

                                                                              김. 광. 섭.

백도(白桃) 하얀 꽃송이들이 백옥(白玉)같이
눈부시게 조롱조롱 피더니
얼굴을 맞대고 서로 비쳐서

한 송이가 백(百) 송이의 웃음을 웃고 갔다
그것은 덧없는 인생의 가지가지
슬픔에 대한 한 토막 이야기다

저녁 등불 아래 앉아서
어느 마지막 잔 같은 차를 마신다

나는 무심히 내 주변을 살펴본다
나의 청춘의 모든 것도 다 그렇게 작별되었다
지금 다시 눈에 보이고 생각나는 것은 모두
그 작별(作別)의 짤막한 유서(遺書)들이다
그러니 황혼이 울고 있다


김광섭 _ 시인, 호는 이산(怡山). 1905년 함경북도 경성에서 태어나 일본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창씨개명 반대로 3년 8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으며, ‘해외문학’, ‘극예술연구회’ 동인으로 활동했다. 광복 후 대통령 공보비서관, 자유문인협회장, 세계일보 사장, 경희대 교수 등을 역임했으며, 1977년 별세했다. 시집으로 『동경(憧憬)』, 『마음』 ,『해바라기』 ,『성북동 비둘기』, 『반응』, 『김광섭 시 전집』, 『겨울날』 등이 있으며, 1989년 문학과지성사에서 그의 문학과 삶을 기려 이산문학상을 제정하여 매년 시상하고 있다.


시 . 평 .

이 시는 황혼의 시, 즉 인생의 저녁에 관한 작품이다. 지나고 나면 모든 삶이 찰나요, 별 것 아니었다고 노인들은 말한다. 때로는 긴 꿈을 꾼 것과도 같은 삶이었다고. 이런 회고담은 그 담담한 침묵 혹은 깊은 내면 속에 격동치는 과거의 기억을 감추고 있기 때문에, 또한 가슴이 아픈, 묵직한 통증의 미학을 우리에게 전달한다.
“그것은 덧없는 인생의 가지가지/슬픔에 대한 한 토막 이야기이다.” 결국 인생이란 덧없는 한 토막 이야기이고, 그 이야기 속에 그가 맺은 모든 인연이 서로 비쳐서 “한 송이가 백 송이의 웃음을 웃고 가는” 가지가지의 슬픔이 된다. 그 슬픔의 상징이 바로 처연하게 저녁의 하늘을 수놓으며 울고 있는 황혼이 아닌가.
오래 전 낯선 외국의 기숙사에서 먼 바다를 바라보던 저녁의 한 때, 어느 순간 갑자기 방안 가득 밀려들어오던 붉은 저녁의 햇살에 관한 기억을 나는 잊을 수 없다. 참으로 처연한 슬픔, 방안 전체가 붉게 타올라 마치 온몸이 격정 속에 연소되어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불안, 고독, 외로움에 가슴이 무너지던, 한 순간의 체험에 대해서, 나는 지금도 결코 쉽게 글을 쓸 수가 없다. 아직도 그 느낌의 정체를 정확히 알 수 없기에 내 앞에 놓인 삶은 여전히 길 위에 놓여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끔 할 뿐.
앞에서 소개한 이 시 속에는 내가 알 수 없었던 그 당시 그 느낌의 정체가 어렴풋이 담겨 있다. 하지만 “지금 다시 눈에 보이고 생각나는 것은 모두/그 작별(作別)의 짤막한 유서(遺書)들이다”라는 시인의 말이 하나의 깊은 인식이라면, 나는 단지 그 작별에 대한 ‘예감’을 얻었을 뿐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모든 삶이 결국 저녁 등불 아래서 마지막 차를 마시듯이, 자신을 거쳐 간 모든 작별에 대해 유서를 쓰는 것이라는 쓸쓸하고 겸허한 생각 속에서 가슴은 무겁게 가라앉고 황혼은 슬픈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그 절대적인 슬픔의 정수와 고독이 온몸을 감싸 안을 즈음에 나는 왠지 모를 피로와 불안감으로 그 황혼을 더 이상 직시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 지는 저 황혼의 반대편 지구 저 쪽에서는 또 다른 태양이 떠오르고 있다는 생각 속에 ‘나’라는 존재는 더욱 한없이 작아만 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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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식 _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1992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현재 동국대 국문과 교수, 계간 「시작」 편집위원이며, 평론집으로 『불온한 정신』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