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앞에서 모두가 평등한가

대중문화산책 / <더 리더-책 읽어 주는 남자(The Reader)>

2009-07-02     관리자
반세기가 지났지만 히틀러의 유태인 학살은 여전히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한 사건으로 회자되고 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악의 학살 - 그 속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는 분명 있었고 2차 세계대전 후 전범재판에서 가해자로 판명된 이들은 모두 ‘대가’를 치렀다. 그렇다면 가해자는 순전히 가해자이고 피해자는 순전히 피해자일 뿐일까. 무슨 권리로 그렇게 했느냐를 묻는 것은 지금에 와서는 어떠한 소용도 없는 질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심판자의 입장에서 ‘나쁜 짓’을 한 가해자에게 정의의 잣대를 들이대려 한다.
<더 리더-책 읽어 주는 남자>(이하 <더 리더>)는 1950년 독일을 배경으로, 15세 소년과 34세 여자의 사랑을 통해 마땅히 말해졌어야 하지만 결코 말해지지 못했던 또 다른 진실을 이야기한다. 역사의 스포트라이트가 비추는 가해자들의 삶은 피해자의 그것과는 달랐어야 하지만 선택된 객관성이 범하는 오류는 불행히도 공평성을 담보하지 못한다. 결국 역사의 비극은 개인의 삶을 처참하게 만들고야 말지만 역사가 평가한 그들은 가해자이기에 속사정이야 어찌되었든 법의 심판을 받아야 했다. <더 리더>의 한나는 이런 비극과 억울함을 토로하기보다 운명의 굴레에 자신을 순순히 내어준다. 그리고 이를 통해 원작과 영화는 묻는다. 과연, 누가 가해자인가?

그는 읽고, 그녀는 듣다
1950년 독일, 15세 소년 마이클은 길을 걷던 중 갑자기 심한 구토를 일으킨다. 마침 그 앞을 지나던 30대 여인 한나는 그를 도와주고 두 사람은 곧 깊은 관계를 맺는다. 어느 날 한나는 사랑을 나누기 전 마이클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부탁하는데, 이후 책읽기는 두 사람의 만남 속에 하나의 의식처럼 자리 잡는다. 한편, 둘의 비밀스러운 사랑만큼이나 불안한 건 마이클에 대한 한나의 태도. 이유 없이 화를 내고 그를 몰아세우는 한나의 변덕에 슬슬 지쳐갈 즈음, 그녀는 아무런 말도 없이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몇 년 후, 법대생이 된 소년은 2차 세계대전의 전범 재판장에서 그녀와 다시 만난다. 사라졌던 시간 동안 한나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크라카우 근교의 수용소에서 일한 죄목으로 기소되었다. 재판을 지켜보는 동안, 마이클은 그녀와 보냈던 시간을 떠올리며 괴로워하고 한나가 문맹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알 수 없는 그녀의 히스테리와 갑작스러운 사라짐, 그건 모두 한나가 문맹이었기 때문이었다. 성실한 근무 태도로 사무직에 추천받지만 글을 모르는 한나는 결국 수용소의 감시원에 지원한다. 근무 당시, 수용소에 화재사건이 발생했는데 한나는 재판 과정에서 자신의 문맹이 발각될까 두려워한 나머지 모든 사건의 주동자임을 인정, 무기징역을 선고 받게 된다.
역사의 진실, 그리고 개인의 진실-진실과 존중, 그리고 자발성의 문제는 여기서부터 발생한다. 마이클은 한나의 비밀을 알고 있고 그것이 그녀의 무죄를 입증하는 결정적 증거임에도 불구하고 결국 끝까지 침묵한다. 물론, 그는 고민한다. 그리고 그 고민은 감독과 관객 모두의 고민이 된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자신을 추궁하는 재판장에게 한나는 이처럼 되묻는다. 이 또한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질문이다. 역사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한 사람의 개인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수용소 감시원이라는 한나의 선택은 그녀의 정치적 신념이나 이데올로기와는 거의 상관이 없어 보인다. 문맹이었던 한나는 그저 자신의 치부를 들키는 것을 두려워했을 뿐이다. 수용소 감시원이라고 해서 나치에 찬성하고 독재를 지지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녀는 그저 먹고 살기 위해 ‘그 직업’을 택한 순진무구한 노동자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한나의 문맹이 정치적 순진함으로 드러나는 순간 날선 비판은 유보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마이클은 그녀의 선택을 존중하고 그녀에게 다시금 책을 읽어준다. 원작, 그리고 영화는 이 치열한 논쟁거리를 앞에 두고 어떠한 채근도 하지 않고 다만 조용히 묻는다. “과연,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인간이 존중받는 역사를 꿈꾸며

폴커 슐렌도르프의 <양철북> 이후 가장 성공한 작품으로 평가받는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더 리더>는 소설을 각색한 영화들의 운명을 피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일단, 전후 독일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미권 감독과 배우가 참여하는 이유로 대사는 독일어가 아닌 영어로 쓰여졌다. 2차 대전, 그것도 나치를 소재로 한 많은 영화들이 영어 대사로 만들어진 예가 드문 것은 아니지만, <더 리더>의 경우 읽는 행위가 중요한 만큼 배우들의 ‘읽기’가 독일어가 아니라는 점은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러나, 오스카 트로피를 거머쥔 케이트 윈슬렛, 정사 장면 촬영이 법적으로 허용되는 나이인 18세까지 3년을 기다린 데이비드 크로스, 부드러움과 차가움의 양면성을 가진 랄프 파인즈, 이 세 배우의 조합만으로 영화는 인물 개개인의 감정은 물론 서로간의 심리적 긴장과 변화를 탁월하게 묘사해냄으로써 연기 하나만으로도 큰 울림을 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너무나도 쉽게 잘못한 일에 대해 ‘그랬어야만 했다’라고 말할 때가 많다. 그러면서도 자신만큼은 언제나 예외에 놓는다. 사람의 선택이 항상 도덕적이고 올바를 수는 없다. 나중에 그 일이 평생의 수치로 남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인간이기에 그렇게 인간적으로 실수를 하고 그르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다만, 우리가 조금 더 인간다운 인간이라면 잘못을 한 인간에 대한 인간적인 용서와 관용의 시선을 베풀 줄 알아야 한다. <더 리더>의 한나가 무지함 때문에 갖지 못한 책임의식이나 부채의식의 부재를 당연시 할 수는 없겠지만, 천편일률적이고 무자비한 역사의 잣대를 개인의 특별한 역사에 들이대는 것이 때로는 더욱 무자비한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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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균민 _ 동국대학교 영화과 대학원 수료, 영화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스포츠서울, The DVD, K-bench, 무비위크 등에 영화칼럼을 기고해왔고, 현재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램 콘텐츠 팀장으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