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에서의 통일상념

권두수상

2007-05-23     관리자

 최근 백두산에 올랐었다. 지난 10월10일이었다.  중국을 통해 연변 자치주에서 조선족 동포들을 만나고 천지호텔에서 하루를 묵은 다음 오전 9시 등반길에 올랐다.  내년 북경에서 열릴 아시안게임에 맞춰 확장하고 있는 백두산길을 지프를 빌어 풍구 못 미쳐까지 다다랐다.  이미 쌓은 눈이 깊어 지프 마저도 올라 갈 수 없었다. 풍구(風口)는 이름 그대로 바람구멍 날씨가 좋았기 망정이지 겨울 산행에는 조심해야 할 곳이다.  하지만 풍구에 천지 폭포를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어 그냥 지나갈 수 없는 곳이라 몰아치는 바람을 무릅쓰고 풍구전망대에 올라 증명사진을 한장 찍었다.  지름길을 택해 전망대에서 위로 오를 수도 있었으나 때때로 휘몰아 얼굴을 때리는 풍구바람이 어떻게 센지 도로 내려와 차길을 따라 갔다.  차를 타고 지나온 침엽수림대를 돌아보니 말 그대로 수해(樹海)다. 백두산의 너그러운 풍모가 산자락부터 배어 있다.  그러나 자연은 너그러운 것만은 아니다.  그 엄격함이 그지 없다.  그렇게 늘픔스럽게 펼쳐져 있던 침엽수림대가 칼로 자른 듯 줄을 서 한 치도 앞으로 나서질 못한다.  해발 2천미터. 부석부석한 알카리 조면암(祖面岩)이 토양을 이룬 고산지대에는 키작은 식물들이 초원을 이루고 그 위에 하얀 눈이 바람에 날려 장년처럼 반백의 묘한 어울림을 보여주고 있다.

 16개 연봉(連峰)이 서로 감싼 천지                                                                                                              

 한자락이라도 놓칠세라 눈여겨 보며 도로를 따라 오르기 2시간이여.  중국천지 기상대를 거쳐 천벽봉에 올랐다.  낮 12시가 채 안되어 있었다. 서울서 준비해간 망원경을 꺼내 천지를 둘러쌓고 있는 연봉들을 돌아보았다.  압록강 수원을 감추고 있는 백두봉(百頭峰), 관면(冠冕), 삼기봉(三奇峰)이 눈 앞에 잡혔다. 북한측의 관측소인듯 안테나도 망원경 안으로 들어왔다.  천지는 와호(臥虎), 제운(梯雲), 옥주(玉柱), 백운(白雲), 지반(芝盤), 금병(錦屛), 관일(觀日), 용문(龍門), 천활(天豁), 철벽(鐵璧), 화개(華蓋), 자하(紫霞), 고준봉(孤準峰)이 감싸고 있다. 개중에는 장군봉이나 천문봉으로, 다른 이름이나 별명을 가지고 있는 봉우리들도 있다. 천지를 연화대로 모셔 16나한(羅漢)이 시립한 것처럼 경건하면서도 그 자애스런 분위기가 천지를 덮고 있다. 등반한 날의 날씨가 좋았기 때문에 이런 감상에 젖었는지도 모른다. 일년 열두달 가운데 아홉달이 눈에 덮혀있고 그나마도 하루의 기상변화도 예측하기 어렵다는 백두산이 이렇게 환하게 위용을 드러내 보여주니 고맙기 그지 없다. 백두산 연봉들은 가를 수도 없고 갈라서도 안될 영산이었다. 어느 한 봉우리라도 떼어낸다면 천지가 와락 넘쳐 아름다운 자태가 사라질 것이다. 용문봉과 천활봉 사이를 타고 절묘하게 흐르는 천지폭포가 성산과 세속을 잇는 가느다란 줄일 뿐 그 성스러움은 오히려 구름 속에 담겨 있을 때 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언뜻 스쳤다.

갈라 가질 수 없는 성산(聖山)

 백두산은 동북아 대륙에서 제일 높은 산이다. 물론 섬나라 일본에 이보다 높은 후지산이 있으나 그것은 대륙의 밖이다. 그 옛날 여러 중족이 시베리아와 만주에 활거하고 있을 때 백두산은 그 높음이나 개마고원과 장백산 줄기를 거느린 풍족한 살림터로 가장 숭앙받는 성산이다. 어느 종족이건 이 산을 탐내지 않았을 리 없다. 오늘에 오른 백두산도 그런 위용을 분명히 자증(自證)하고  있었다. 비록 일부를 중국의 영토로 넘겨준 상태이지만 그 옛날 백두산은 모두를 빼앗기면 빼앗겼고 빼앗으면 빼앗았지 나누어 가질 그런 산이 아니었다. 백두산에서 이런 상념에 젖어 있던 나는 현재로는 갈 수 없는 땅 그 동쪽을 보면서 분단의 아픔을 되씹어야 했다. 우리의 선조들은 우리의 땅 우리의 산을 하나의 생명체로 파악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태백산맥 차령산맥 소백산맥으로 나누지 않았다. 백두산을 머리로 인체의 척추처럼 우리의 산맥을 백두대간이라 불렀고 그 지류를 지간으로 불렀다. 도저히 나눌 수 없고 나눠서도 안되는 한 생명체의 땅이었다. 못난 후손들이 그 머리의 일부를 중국에 넘겨주고 허리 마저 동강낸 채 민족의 땅을 병화에 물들게 하고 있다. 조선족 동포의 말이다. "올해 북선(北鮮)이 연변에 영사관을 설치하려다가 실패했습니다. 조국은 비록 동강났지만 우리 연변의 조선족 마저 분단될 수는 없다고 조선족들이 단결하여 반대한 것이지요." 북한이 영사관을 설치하지 못한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모처럼 중국과 한국의 교류로 기회를 뺏앗길 수 없다는 우리 조선족들의 한결같은 생각도 큰 이유였을 것이다.  "올림픽 때 텔레비전으로 본 서울의 모습에 얼마나 기뻐 울었는지 모릅니다." 한 동포는 남쪽을 다녀온 동포들이 서울이야기를 하니까 친척방문온 북한사람들이 믿지 않다가 놀라기만 하더라고 말했다.

"우리보고 귀족같이 산다고 그래요." 나는 깜짝 놀랐다.

 "중국보다 북한이 더 잘산다던데요.?"

"잘 못 알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북선을 방문할 때 쌀등 먹을 것은 필수품이고 이것저것 가져가지 않으면 갈 수가 없어요. 북선에서는 돈가지고도 살 것이 없거든요."

통일 후 도울 것 준비들

 이들 북한동포들과 언제든 통일을 해서 함께 살아야 한다. 우리쪽의 통일열기는 사실상 북한을 압도하고 있다.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고 밀입북한 목사와 신부, 그리고 대학생까지 있다. 북한은 일부의 지도자들이 통일을 외치지만 평화통일에는 자신이 없는 인상이다. 그러나 우리는 평화통일을 해야 한다. 무조건 입북만 할 것이 아니라 국민 모두의 뜻을 모아 통일을 준비할 때다. 어느 젊은 철학자가 '중매결혼하듯 날을 잡아 통일하고 살면서 더불어 사는 방법을 배워가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지만 그것은 어려운 일일 것이다. 스스로 살아본이들이라면 젊은 철학자에게 이상은 좋지만 나부터 그렇게는 어렵다고 말할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중국에 사는 교포들을 보면서 특히 사회주의 국가의 종교에 대해서는 회의를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사회주의 논리, 특히 북한에서의 종교정책은 종교육성일 수가 없는 것이다. 공산주의 내지 사회주의 폐기를 선언하기 전에 그들의 종교선전은 믿을 것이 못 되기 때문이다. 중국에도 성직자나 신자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없는 것이다. "똑같이 먹고 똑같이 산다고 자랑하는 우리들에게 왜 종교가 필요합니까." 비웃듯 이렇게 반문하는 동포 청년에게 할 말을 잊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고 이들 우리동포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 내 것을 나눠주고 보살과 같이 살 수 있는 정신으로 이들을 맞으려는 통일 후의 준비가 먼저 이루어져야 그 때 통일도 가능할 것이다. 佛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