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불교미술(5)

불교미술의 이해

2009-07-01     관리자

북위 태무제에 의한 전대미문의 대법난(446 A.D)의 폭풍이 지난 북위 불교교단은 다시는 이러한 법난을 만나서는 안 된다는 자성의 소리와 함께 문성제(文成帝)의 복불(復佛)조칙 발표(452 A.D)와 함께 새로운 불교상 정립과 인도로부터 새로운 불교수용으로 불교 중흥운동이 열화같이 일어났다.

불교중흥의 기반을 다지는 데는 당시 교단을 대표하던 2대 사문통 담요(曇曜)가 크게 기여하게 된다. 초대 사문통이었던 법과(法果)의 논리대로 '황제 즉 여래' 북조의 불교적 성격을 되살리는 듯 담요는 국가 권력과 불교의 밀착이야말로 다시는 법난 없는 시대로 이어져 나가리라는 자구책으로 여기면서 종교와 정치유착의 기념비적 조형물인 운강석굴을 개착한다. 담요는 문성제 화평(和平) 원년(460 A.D)에서 헌문제(獻文帝)· 효문제(孝文帝)에 이르는 3대 30년을, 황제의 측근에 있으면서 운강석굴의 발원자일 뿐만 아니라 그 재정 및 노동이 기반인 승기호(僧祈戶)와 불도호(佛圖戶)를 설립하여 사원경제의 기반을 다지면서 불교교단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운강석굴의 현황

당시 교단의 총수인 담요는 문성제의 깊은 불심에 힘입어 산서성(山西省) 대동(大同) 서쪽 약12km 무주산(武州山) 남쪽 석회암 절벽에 태조 도무제로부터 태종 명원제, 세조 태무제, 공종 경목제, 현재 문성제까지 5대 제왕에 대한 추선보리(追善菩理), 참회멸죄(讖悔滅罪)를 위하여 다섯 분의 부처님을 봉안하는 석굴사원의 조영을 시작하였다. 현재 16동에서 20동에 이르는 주존(主尊)의 다섯 부처님들은 17m에서 13m에 이르는 대불(大佛)들이다. 이 5대궁의 개착은 앞서 잠깐 언급한 승기호나 불도호의 경제적 지원 및 노동력 활용이 석굴개착의 추진력이 되었고, 황실을 비롯한 지배계층의 신심과 원력 등 국가적 차원의 지원에 힘입은 바 크다.

헌무제와 효문제 때에도 석굴을 개착하여 태화(太和) 18년(494 A.D) 평성에서 낙양으로 도읍을 옮기기까지 약 35년에 걸쳐 대규모적인 조성이 있었고, 낙양천도 이후에는 낙양부근의 용문(龍門)석굴 개착으로 국가적인 추진력은 잃었다 해도 옛 수도의 유력자의 도움으로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수· 당(隋· 唐)을 거쳐 요(遼)대까지 이어졌다. 그리하여 운강석굴은 중국 불상조강의 보고(寶庫)로서 그 원류는 중앙아시아에서 멀리 아프카니스탄과 서남인도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중국미술사의 우뚝 선 기념물일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역의 불상조각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즉 운강석굴로부터 용문, 공현, 천요안을 비롯한 각지의 여러 석굴들이 파생되었기 때문에 운강석굴은 동아시아 불상조각의 모체라 하겠다.

그 후 역사의 변동을 경험하면서 특히 금세기초 역사의 격동기를 거치면서 무관심과 파괴 그리고 도굴을 당하면서 현존하는 석굴은 53굴에 이르며, 불상의 수는 대소를 합하여 5만 여존에 이른다. 운강석굴의 불상조각을 제외하고 중국조각사를 논할 수 없기에 그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침이 없다 하겠다.

제16동에서 20동으로 이어지는 담요5굴의 대체적인 형식은 존상굴(尊像窟)식의 평면 차원형으로 되어 있다. 굴안은 본존상이 거대한 규모로 조상되어 다른 조상들과 공간족으로 여유가 없어 답답함을 느끼게 한다. 불상의 형식에 있어서는 인도적인 영향이 농후하여 간다라와 마투라불상의 조형적인 색채와 함께 중국적인 조형요소도 읽을 수 있는데 특히 법의양식에 있어서 중국적 법의라 할 수 있는 도포복(道抱服)양식의 출현(제16동 본존불)과 불상배치에 있어서 주존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의 3존불 형식 등으로 설명될 수 있다.

담요5국에 이어지는 석굴은 효문제 때 건립된 제5국에서 13굴로 용문, 공현석굴의 건립연대가 비슷하다. 이곳 불상들은 양식적으로 중국화가 무르익어 초기에 얼굴이나 신체의 팽팽한 긴장감과 법의의 도식적 표현에서 탈피하여 자연스러우며 양감이 넘치는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형태에서 오는 힘과 강건함은 초기보다 감소된 반면, 선(線)의 장식성과 율동미의 강조로 유연하고 경쾌함마저 느끼게 한다. 대표적으로 6굴, 5굴, 13굴 등 여러벽의 불상군을 들 수 있겠다.

운강석굴의 초기불상

운강석굴의 개착은 북위 석굴조각의 시작으로 볼 수 있으며 그중 제20굴은 초기 5대굴(담요5굴)중에서도 맨 먼저 조성되었다. 20굴 주존(도판1 참고)은 높이 14.33m의 황백색 사암으로 이루어진 대석불이다. 무릎 아래는 강물의 침식으로 마멸이 심하여 형태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이며 선정인을한 두 손도 마멸이 심하여 그 형태를 가늠해 볼 뿐이다. 그러나 상체는 온전하여 장대한 불신(佛身)과 뛰어난 용모에서 당당하고 외외한 모습에 압도당한다.

이 불상은 북위의 건국자 태조 도무제(386-408) 모습을 본뜬 초상조각이라 할 수 있다. 육계는 크고 머리카락은 얇은 부조의 음각선으로 처리하여 소발(素髮)처럼 보인다. 두 귀는 매우 크며 면으로 처리하여 양어깨의 법의에 닿아 있으며, 두 눈은 튀어나온 행인(杏仁)형이며 콧날은 오뚝하며 입가에는 엷은 미소를 볼 수 있다. 한마디로 이목구비가 명확하여 양감이 넘치는 모습이다.

왼쪽 어깨를 넘어가는 가사자락의 겹쳐진 모습이 톱니모양으로 처리 하였으며 옷자락도 양각의 융기선에 음각선은 넣고 다시 융기선 사이에도 음각선을 넣어 어깨는 부동의 산을 보듯 강건하고 양감이 넘쳐 제왕으로서의 위엄과 기운이 서려있는 듯하다. 법의는 얇아 신체의 굴곡이 드러나 있고 형식적으로는 편단우견(偏袒友肩)으로 오른쪽 어깨를 약간 덮고 있는 반단식(半袒式)도 특이하다. 옷주름이 톱니모양과 양각의 융기선과 음각선의 대비, 수직에 가까운 선의 집중과 흩어짐 등에도 장대한 불신에서 오는 위엄, 힘과 무관하지 않음도 유의해야 하겠다.

광배는 화염문으로 윤곽선을 부조로 처리하고 그 안은 화불(化佛)로 장식하고 그 밖은 공양천중(供養天衆)의 무리로 장식하였으며, 머리를 중심으로 두광도 화염문의 띠와 그 안에 화불이 새겨져 있다. 이러한 광배의 장식적 조각형식은 인도의 굽타불의 영향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 주존불의 좌우에는 두 분의 보살상이 협시하여 삼존불의 형식을 갖추었으나, 우협시보살상은 훼손되어 텅빈 공간으로 남아 있으며 좌협시만 현존하고 있다. 협시보살 역시 화염문의 두광과 화불이 장식되어 있다.

운강석굴 말기 불상

운강석굴 제5동과 6동은 효문제갈 비명에 간 부왕 헌무제를 위해 추선공양(追善供養) 및 참회멸죄(문성제의 황후인 문명황태후로서는 참회멸죄하는)를 목적으로 조영 되었다고 한다. 이 굴은 초기 담요5굴의 조영후 거기에서 연마한 원숙한 기량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북위 천도 직전의 불상이다(도판 2참조).

얼굴은 둥글고 넓어지면서 양감이 충만하고 유계는 앞시대에 비해 작아졌으며, 머리카락은 전통적 중국의 태극무늬 비슷한 와권문(渦券文) 같이 표현하여 초기의 소발에 가까운 단조로움에서 장식과 세련됨을 더한 표면적 변화를 가져왔다. 눈은 행인형으로 반개(半開)하고 입가에는 미소를 띠면서 이목구비가 분명하다. 목은 가늘며, 불신은 초기의 강건하고 장대한 신체에 비해 왜소하며, 그것도 세련된 법의에 감싸여 인체의 표현은 거의 나타나 있지 않고 있다. 손은 시무외인과 여원인을 하고 있는데, 손의 방향에서 긴장과 이완을 함께 한 유기적인 공간을 간직한 듯 하다.

그리고 가장 특징적인 것이 법의인데 중국 불상법의 양식인 포복불(袍服佛) 양식을 완전하게 표현한 대표적인 예일 뿐만 아니라, 중국적인 아름다움이라 하는 균제, 대칭 및 표면처리의 완벽성이 돋보이는 예라 하겠다. 단계적인 평도법(平刀法)을 사용하여 선과 면을 교차 시키면서 법의를 새의 날개처럼 표현하면서, 마치 천상에서 부처님이 금방 내려 앉은듯(현현한듯) 옷자락이 유동하며 비상하는 듯한 감각을 잘 표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통일과 균제가 잘 이루어지고 있다.

법의도 대의(僧伽梨), 내의(僧祇支), 하당(尼桓僧)의 부분적 표현이 전체적인 균형속에 잘 이루어져 있다. 좌우 협시보살이 보좌하고 있으며 법의의 표현이 양어깨를 덮고 허벅지 사이에서 X자로 교차되는 모습을 취하고 있다. 두 보살상은 철저하게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으나 회중(會衆)의 나머지 인물들은 자유로운 모습을 하고 있다. 보수형의 하염문의 신광(身光) 및 두광(頭光) 그리고 화불 등 빈틈없이 장식하고 있다.

운강초기에서 보았던 긴장되고 탄력적인 양감이 아닌 세련되고, 유연한 양감 그리고 인물, 인체표현에서도 유약하면서 세련되긴 하나 양식화의 기미가 보이면서 강견한 정신은 사라지고 우미하고 세련된 형식화의 늪으로 빠져가고 있음은 당시 북위의 운명을 상징한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