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참선으로 지혜와 용기를 얻어내자

특집 I / 고난의 극복

2009-07-01     김두식

지나간 60평생을 돌이켜 생각하니 나의 생애는 사뭇 평화하고 담담했던 것같이 생각된다. 커다란 풍파 없이 이렇다 할 실패 없이 나는 지난 생애를 걸어온 것이다. 재산을 얻은 것도, 명예를 얻은 것도 없다.
 

󰊱 나의 생애를 끌어온 힘

권세를 잡았거나 뭐 남에게 이렇다 할 도움 될 일은 크게 못하였어도 그래도 내 생애에 실패도 없었던 것 같다. 물론 고난이 없을 리는 만무하다. 내 나름대로의 위험도 고난도 많이도 겪었다. 하지만 나는 그 모두를 담담한 심정으로 극복하였고 지금껏 나의 마음은 평화할 뿐이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나는 나름대로 행운아였는가 한다. 나는 부처님을 믿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함으로써 어떤 고난도 위험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부처님을 믿는 힘 이것이 내 생애의 전부인가 한다.

󰊲 몇 가지 사례

첫째 잊을 수 없는 것은 6.25때 일이다. 6.25 사뭇 전부터 나는 당시의 수도경찰청에 근무하고 있었다. 과장이라는 직책이었지만 그 당시 조선정판사 사건이라든가 교통부 사건등 수많은 공산당의 조직적인 대사건들의 한복판 속에 있었다. 6.25당시 최후로 수도 서울을 빠져 나왔던 나로서는 그로부터 첩첩이 앞에 놓인 위험의 고비를 넘어서면서 다시 서울 수복에 선두로 돌아왔다. 당시 겪었던 일들을 다 말할 구는 없고 우선 서울탈출 당시의 일을 생각해 본다. 성북서로 공산군이 밀려왔고 시내에는 공산군 탱크가 밀려 닥쳐오고 있을 때 나는 수도경찰청 최후의 일원이 되어 한강에 달려왔다. 그 날이 6월 28일 새벽 3시다. 인도교는 이미 2시에 폭파되었고 발을 끊긴 시민들이 몰려들어 그야말로 아비규환이다. 나는 후퇴하지 못한 경찰동료를 수습하고 보니 150명이 가깝다. 백방으로 뛰고 살펴서 동녘하늘이 훤히 밝을 무렵 보오트 한 척을 구할 수 있었다. 이것으로 수십 차례를 왕복하면서 나는 낙오되었던 경찰 후진 그 모두를 안전하게 건넬 수 있었다. 그 때 나는 부처님 힘을 믿고 있었다. 여기서 빠져 나갈 길은 분명히 있다. 부처님께서는 나를 도우신다하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한강변에서 인원을 평성하면서 이미 적의 수중에 들어간 서울시를 등에 두고 차분히 일진이진 배를 태우고 노를 저을 사람을 선택하며 강가에 서서 격류 속을 띄어 보낸 보오트를 지켜보며 서있었다. 그때 나의 마음속은 오직 부처님 힘을 믿는 것뿐이었다. 이래서 영등포에 도착한 것이 열시다. 그 후에 적의 수중에 들어있던 포항시가를 출입하면서 통신망을 정비하던 일이든가 낮에는 대한민국 밤이면 공산국이라 이르던 전투지역을 수 없이 누비고 다녔고 서울을 수복하면서도 최선봉이 되어 서울로 돌아왔다. 적탄이 교차되는 거리를 오직 나의 임무만을 생각에 두고 직선으로 뛰어다녔던 것이다. 그 사이의 일을 고난이라 하여야 할지 나는 아직 말을 모른다.
또 하나 내가 고난과 맞붙은 일 중의 하나로 들 수 있는 것은 1968년도 당시의 국토건설단의 사업이다. 국토건설단은 당시 폭력배, 소매치기 그 박에 범죄우범자로서 국가사회에 누를 끼치던 사람들을 국토건설에 차명케 함으로써 그 죄과를 씻게 하는 시책 사업이었다. 당시 제주도 경찰국을 맡아있던 나에게는 그중 전국에서 뽑힌 A급 500명이 배당되었다. 처음에는 분위기가 참으로 살벌하였다. 싸움 부상이 그칠 날이 없었다. 어떠한 훈유도 거부되었다. 나는 이들을 맡아 놓고 선정에 들었다. 이들을 어떻게 교계하여 선량한 사람으로 회복시키며 부과된 사업을 성취할 것인가? 그 때 나의 머리에 번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옳지! 이것이다." 나의 신념은 굳어진 것이다. 다름이 아니라 관세음보살이 500명의 산적떼를 교화하여 500아라한을 만들었다는 가르침이다. 나는 신념을 가지고 저들 속에 뛰어들었다. 함께 먹고 함께 일하며 함께 뛰어다녔다. 그리고 저들과 이야기하고 웃었다. 저들이 요구하는 것이라면 철조망도 철거하고 운동기구도 만들어 주고 매점도 우체통도 전기도 위로시설도 다 만들어 주었다. 저들 정신에 안정을 주고, 저들에게 미더움을 주었다. 결코 깎지 않으려던 저들의 장발도 내가 앞장서서 단발차림을 하고 나서며 함께 일을 하고 함께 물에 뛰어드니 저들도 나에게 따라 주었다. 새벽에는 기도하고 한 사람 한 사람 대화하였다. 저들의 장부다운 기상을 인정하고 키워주는 데 정성을 다했다. 이래서 마침내 사고하나 없이 어려웠던 수로개발 사업은 끝내었고 저들은 가볍고 기쁜 마음으로 고향에 돌아갔다. 처음 저들 속에 뛰어들려는 나를 말리던 동료를 대하면서 나는 이렇게 뇌까렸던 것이 지금도 생생하다."좋다. 저들 500명에게 이익이 된다면 나 하나쯤 희생되어도 좋다."

󰊳 고난에서 얻어진 것들

내가 겪었던 어려움을 여기서 다 말할 수는 없다. 그런 것들을 당해서 나는 어떻게 대치하였던가를 돌이켜 보자. 첫째는 어려움을 당했을 때는 기도하고 참선하는 것이다. "부처님, 저는 일을 당하였습니다. 나라와 중생을 위하여 이 일을 해결할 지혜를 주십시오. 힘을 주십시오." 하고는 참선하였다. 그러노라면 어느 듯 나의 머리에는 번개같이 해답이 번뜩였고 나는 자신과 용기를 가지고 일에 맞붙고자 일어섰던 것이다. 다음에는 자기 마음에 부끄러움 없이 살겠다는 것이다. 나라와 동료를 위하는 것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았다. 결코 욕심 부리지 않고 결코 나를 내세우려 하지 않았다. 또 하나는 나의 사생활이나 공적 일이나 어떤 일이든 나의 최선을 다하고 판단의 기준을 부처님 가르침 속에서 구하였다. 솔직히 나는 나의 생활 속에서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고자 염원하고 있는 것이다. 실천을 떠난 불교의 지식화를 엄격히 경계하였다. 부처님 가르침은 결코 글도 말도 아니라고 생각된다. 자비라 하지만 그 가르침은 자비의 실천을 통해서 가르침의 의미가 알아지는 것이고 인욕도 또한 마찬가지라는 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