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고통하라, 그리고 일어서라

특집 I / 고난의 극복

2009-07-01     강은교

다가올지도 모르는 병 싸움에의 예감 고문에의 근심. 노예의 상태 굶주림의 상태에의 두려움, 그런 것들. 그러나 사실 이 때의 고백은 이 거창한 문명세계에서 얼마나 어리석고 황당무개하게 들릴 것인가?



또 이빨이 아프기 시작한다.
이빨은 처음엔 그저 젓가락에 어떻게 잘못 건드리거나, 생선가시같은 것이 잘못 끼어들 때 조금 뜨금, 하는 감각이 일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본격적으로 쑤시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그저 뜨금거리는 것이 아니라, 쿵쿵, 거기서 내 전신의 맥박이 울려나오기도 하는 듯 지끈지끈 머릿속을 울리며 고통하기 시작한다.
아마도 이번엔 어금니인 모양이라고, 나의 말초신경들은 공포에 떨며 몸 곳곳에서 수군거려대고 안면 근육은 할 수 있는 한 팽팽히 부풀어 오른다. 그 동안 꽤 잘 견뎌온 내 이빨의 위기— .
서서히 완성되기 시작하는 고름주머니와 썩어가는 피들의 아우성을 위하여 우선 나는 내가 익혀온 방법대로 정결하게 칫솔을 닦고 어느 때보다 치약을 풍성히 묻혀 고통하는 입 속에 들이민다. 또 소금물도 한 컵 준비 한다.
그리고 침략자들을—생선가시와 더러운 음식 찌꺼기들과 기타 균들을 씻어내고 소독한다.
그러나 아픔은 그리 쉽게 멎지 않는다. 내가 가진 어떤 방법으로도 쓰러뜨릴 수 없어 균들은 이미 자라버린 모양으로 고름주머니의 껍질도 단단해진 모양으로.
나는 할 수 없이 마지막 수단을 나의 말초 신경들에게 내놓는다.
그것은 <참는 것>이다. 고통을 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으로 나를 집어넣는 것이다. 고통과 나는, 싸우는 二인이 아니라 一인이 된다. 그리하여 고통과 나는 은밀히 화해한다.
내 이론으로는, 그렇게 해서 거름주머니가 아주 단단해져 보다 쉽게 핀셋으로 집어낼 수 있을 때까지 내 이빨의 침입자들에게 잠시 시간을 주는 것이다.
드디어 어느 순간 고통이 멎는다. 나의 신경들은 고통에, 말하자면 마비되어 더 이상 아우성치지 않고 잠잠해진다.
나는 마비돼 누워있는 내 신경들을 데리고 이윽고 병원으로 간다. 그리고 의사에게 그것들을 넘겨준다.
마취약으로 희미해진 네 눈앞에 의사는 걷 고름주머니를 핀셋에 꿰어내어 흔들며 말한다.
“아유, 어떻게 이렇게 잘 참으셨습니까! 기가 막히군요. 이 고름주머니를 좀 보세요. 건드리자마자 집혀내지는데요!”
의사는 연신 머리를 흔들며 고름주머니와 나의 무식과 자기의 재능에 감탄한다.
나는 그러면 좀 거만해져서 중얼거린다.
“이제 됐지요? 새 이발을 하나 해 주세요. 튼튼한 것으로 말예요”

이빨 얘기는 이것으로 그만두자. 서른 개나 되는 이빨 때문에 끊임없이 당해오면서도 아직 나는 그것들의 위협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와지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질 때까지 내 몸의 기관들은 그 무엇보다 강력하게 나를 위협할 것은 분명하다.
다가올지도 모르는 병, 사움에의 예감, 고문에의 근심, 노예의 상태, 굶주림의 상태에의 두려움 그런 것들
그러나 사실 이따위 고백은 이 거창한 문명세계에서 얼마나 어리석고 황당무계하게 들릴 것인가. 그보다 애처롭게 들릴 것인가.
아마도 나의 <어리석은 참음>에 대한 순박한 이는 분노를 일으킬지도 모른다. 아니 분노를 일으켜야 한다. 왜 당신은 그렇게 참고 있었느냐고, 그런 결과가 오기 전에 재빨리 피하지 못했느냐고.
그리고 백금으로 한편을 땜질한 자기의 썩어가는 이빨을 내보이며 자기는 고통만은 참지 못한다고 호들갑스럽게 자랑할지 모른다.
무수한 고통이 오고 있다. 이빨의 고통 같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 자체를 무의미하게 하는 보다 본질적인 고통들이, 내가 아니라 하더라도, 내 옆의 사람들에게, 보이는 사람들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가난과 속박과, 허황한 꿈의 고통이 온다.
어떻게 이길 것인가. 누가 이 무수한 고름주머니를 떼어내 줄 수 있을 것인가.

한 여자가 아까부터 사진 속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나의 거죽옷이 아니라, 내 눈 속, 목구멍 속, 털구멍 속을.
그 여자의 얼굴은 마르고, 흑백사진 속에서도, 창백하게 그늘져 잇고, 어깨는 조금 비틀어진 채 남루한 옷을 걸치고 있다.
그 여자의 주위에도 똑같이 후줄그레하고, 몸매는 비틀어져 있으며 가난한 차림의 마른 얼굴들이 생선뼈같은 초라한 냄새를 풍기며 서있었다.
그 여자의 이름은 시몬느 베이유다. 고통 속으로 눈물없이 뛰든 여자, 그리하여 고통과 하나가 되어 드디어 극복한 여자. 그렇게 할 수 있는가, 너는?
그 여자는 모든 영광과 지성을 집어던지고, 아니 그것을 들고 고통하는 무리들 속으로 뛰어내렸다. 그 여자는 여직공이 되어서 순결한 폐 속에 먼지와 실밥과, 아마도 문명이 만들어낸 균들을 받아들였다. 펜에 절은 손마디는 노동으로 굵혔고, 폐결핵에 걸렸고, 땅에 묻혔다. 지복(至福)의 하늘이 아니라 고난의 땅에, 승천한 것이 아니라 대지에 따뜻이 누운 것이다.
문제는 이거다 어떻게 고통으로부터 도망가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고통 속으로 완벽히 자기를 틈입(闖入)시키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고난 속에 있지만 결코 모두 고통하려 하지는 않고 있다. 스스로 고통하고 그런 다음 새 이빨로써 일어설 수 있게 되기를.
 


★ 사람의 가치는 신념에서 결정된다.

★ 신심은 불보살이 던져주는 힘이다.

★ 지금의 시시각각이 천재일우의 기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