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만나던 때] 나날을 부처님의 가피로

2009-07-01     금불국생

처녀시절까지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제가 불교 가정에 중매로 시집온 것은 여학교를 갖나왔던 18세의 6월 달입니다. 시어머님이 대단하신 불자였다는 것을 알았었건만 불교가 어떤 것인지는 전혀 모르고 지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시어머님께서 저를 앉혀 놓으시고 “오늘은 네게 꼭 일러둘 말이라기보다 유언이라고 들어라.” 전하시면서 “이 집에 시집와서는 이 집 전통을 이어야 한다. 우리 집은 누구도 개종할 수 없는 엄연한 불교집안이니 명심하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시어머니는 그로부터 2년 뒤가 되는 79세에 별세 하셨습니다.

저는 처음으로 시댁 식구와 같이 절에 갔었지만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습니다. 김씨댁 식구가 되려고 동서들을 따라 다니기는 했지만 그저 아무것도 모르고 스님 뒤쪽에 서서 다리가 아프도록 절만하는 불자였던 저에게 이 세상 모든 것이 새롭게 비치는 대사건이 생겼습니다.

저의 여학교 동창 한 분이 주인을 잃은 후 아주 불교에 투신하여 열심히 공부하는 분이 있었는데 그가 돌연히 우리 집에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아무말없이 책 두 권(오도의 길과 육조단경)을 내밀고는 가버렸습니다. 그게 바로 지금부터 9년 전입니다. 저도 <절에만 가는 것이 불교가 아닐 것이다. 불교가 무엇인지 알아야지…>하고 몹시 갈망하던 때였기에 두고간 책을 열심히 읽었습니다. 공부할 시절 인연이 무르익었는지 너무도 즐겁고 재미있고 신비롭고 해서 온통 저를 사로잡고 말았습니다. 그 후부터 화엄경 열반경 능엄경…… 불교 서적이라면 잡지에 이르기까지 무엇이든지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매일 독서와 독경 염불을 하루도 빼지 않고 하고 있으며 외국에 가서도 불교 서적은 꼭 향과 염주와 더불어 지니고 다녔습니다. 아직도 미숙하여 성불의 길은 멀기도 합니다. 일상생활이 나에게는 도를 행하는 마당이요. 부처님의 귀하신 가르침이라 알고 참회하고 염원하는 일과가 이젠 몸에 밴듯합니다.

70년 10월 하순 강원도 가는 길 진부 가까이에서 차사고가 났을때 이마가 깨어져 피가 수돗물처럼 흐르는 순간 제 눈앞엔 남편과 아이들 모습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귀중히 여기고 닦으려 했는데도 내가 업장이 두터워 거리의 귀신이 되다니……. 하는 생각이 잠깐 지나쳤습니다. 그리고는 금강경에 모든 집착을 여의라고 하셨으니 이젠 모든 착을 여의고 불자답게 조용히 가자는 생각으로 그저 <관세음보살>염불만을 계속하였습니다. 4시간이 지나 병원에서 수술 후 밤늦게 깨어났을 때 의사선생님의 말씀이"머리를 다쳐가지고 사는 수가 백에 하나 될까 말까 한데 그저 이상하다"고만 합니다.

“왜요?“ 했더니 머리의 바로 뇌막 위까지 유리 파편이 꽂혀있는데 뇌막을 뚫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는 것이었습니다. ”4시간이나 피를 흘리게 되어 이마를 손으로 누르고 닦고 하다보면 뇌막이 뚫리게 마련인데……“합니다.

저는 그저 부처님의 가피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저 때의 경황에서 몸부림도 치지 않고 그대로 피를 흘리며 조용히 염불만 한 것은 오직 모든 상과 착을 여의라는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려 한 것뿐입니다. 차속에 기대서 입으론 염불을 했는데 이와 같은 이적이 나타났다는 것은 부처님의 막중하신 가피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로부터 저는 시간만 있으면 참선 공부하려고 힘써왔습니다. 그 덕분에 성급한 제가 얼마간 참을성이 생긴 것 같고 톡톡 잘 쏘아붙이던 말씨도 이젠 누그러지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이렇게 해서 공부하는 날이 지날수록 저의마음은 사뭇 기쁨이 차오는 것입니다. 참으로 한 생각 깨치면 고를 여의고 낙을 얻는다는 말씀이 알아지는 것 같습니다. 작년에 30년간 고락을 같이 한 주인을 여의고도 이렇게 정신적으로 지탱해 나가고 있고 앞으로 제 갈 길을 세우고 한발 한발 디디고 있는 요사이의 저에게는 부처님의 가피를 빼고는 아무것도 없는 생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