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세계의 보물 고려 대장경

특별기획

2009-06-29     성담

우리의 선조가 우리에게 남겨주신 문화재 가운데 가장 으뜸이 되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고려대장경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는 대장경의 가치를 논하기 보다는 어떻게 해서 고려대장경이 만들어졌으며, 어떤 경로로 오늘날 해인사에 봉안되었는가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

대장경의 첫 번째 조조는 고려 현종 2녕(1011년)에 시작하여 선종4녕(1087년)까지 6대 76년의 장구한 시간에 걸쳐 진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011년, 고려 현종2년 정울에 거란병이 서울 송도에 침입하였다 현종은 나주로 피난하여 여러 신하와 더불어 대장경판 새기기를 발원하였다. 그러자 거란병은 스스로 물러가고 말았다고 한다.
그렇게 하여 시작된 이 크나큰 불사는 선종4년에 완성을 보게 되었다. 이것이 초조대장경인데 규모는 570질, 5914권에 달했다고 한다.
이 초조대장경판은 고종19년(1234년) 팔공산 부인사에서 몽고병의 방화로 불타 버리고 말았다.

󰊲 의천 대각국사의 속장경(續藏經)

고려 문종의 넷째 아들 의천은 출가한 후 경(經),율(律),논(論) 삼장(삼장)의 연구문헌을 집대성하는데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송나라에 들어가 많은 문헌을 수집하고 귀국한 그는 계속해서 요, 일본 등지로부터 서적을 구입하였다. 국내의 문헌도 모으고 해서 이들을 결집하여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을 편찬하였다. 그 수는 1010부,4740여 권에 달했다고 한다.
의천은 흥왕사에 교장도감을 두고 입적하기2년전까지(1100)0년) 9년 동안에 걸쳐<신편제종교장총록>을 대장경판으로 새기게 했던 것이다. 이것이 의천의 <속장경 >이다. 이 속장경판은 어디에 봉안되었다가 어디에서 잃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이 속장경판은 고종의 제2차 고려대장경 조조 때까지는 그대로 남아있어서 <제2차 조조 고려대장경> 즉 현재의 대장경을 만드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었으리라 믿어진다.

󰊳 재조 고려대장경 (再雕高麗大藏經)

초조장경은 고종19년(1234) 부인사에서 몽고병의 방화로 불타 버리고 말았다. 부인사의 경판이 불타 없어진 후 5년이 지나서 임금과 태자와 문무백관은 다시 대장경판 새기기를 부처님께 발원하였다. 이규보가 지은 그 기고문에는

"국왕ㅇㅇ은 태자와 공후(公侯)와 문무백관들과 더불어 목욕재계하옵고 허공계에 가득한 시방의 한량없는 부처님과 제석천왕과 33천 모든 호법영관께 비옵나이다. 달단(몽고병)의 환란은 몹시 가혹하여이다. 그들의 잔인하고 흉악한 본성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어리석고 어둠이 짐승보다 더 심하오니, 천하에 가장 소중한 불법이 있는 줄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므로 그 더러운 발꿈치 지내가는 곳에 불상과 경전을 모조리 불살라 버리오매, 부인사에 모셔 두었던 대장경판본도 마침내 불타고 말았나이다. 수십 년 공적이 하루아침에 재가 되어 나라의 큰 보배가 없어졌사오니 모든 불보살과 여러 천왕의 대자대비하신 마음으로 참을만 할지 모르나 그 누가 쉬 이를 참을수 있겠나이까.생각컨대 제자들의 지혜가 어둡고 무지하와 오랑케 방비할 계책을 미리 세우지 못하였압고, 불법을 큰 보배를 지킬 능력마저 없었사오니, 대장경판본을 잃게 된 변고는 실로 저희들의 잘못 탓인지라 후회한들 무엇 하오리까.⌋ 그러하오나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은 본래부터 이루어지고 무너짐이 있을 것이 아니옵고 법이 담겨져 잇는 것은 물질적 그릇일 따름이니 그릇이 이룩되고 망가지면 다시 만드는 것도 당연한 사실이옵나이다. 하물며 나라를 지니고 집을 가진 이로서 불법을 받드는 것은 본래 미적미적할 것이 아니온데 이미 이 큰 보배가 없어졌아온즉 공사의 거창할 것을 염려하여 다시 만듦을 어찌 꺼리겠습니까. 그리하여 지금 대소 재상과 문무백관들과 함께 큰 원을 세우고 주관하는 관청을 두어 한편으로 공사를 시작하였나이다.
처음 대장경을 판에 새기던 연유를 상고 하온즉, 현종 2년에 거란병이 침입하매 현종께서 남으로 피난하셨으나 거란병이 물러가지 않고 머물러 있으므로 그때의 임금과 신하가 큰 원을 세워 대장경을 판에 새기기를 서원하였삽더니 그 뒤에 거란병은 곧 스스로 물러갔나이다. 그러하온즉 그 때나 지금이나 같은 대장경이요, 판에 새기는 것도 다를 바 없으며, 임금과 신하가 함께 발원함도 도한 마찬가지오니 그 때의 거란병은 물러갔사온데 오늘의 몽고병인들 어찌 물러가지 아니하오리까. 다만 모든 부처님과 여러 하늘의 살피시기에 달렸으리라 믿나이다.
저희들의 오늘날 경성이 그대 군사들의 경성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사오니 바라옵건데 모든 부처님과 성현과 33천께서 저희들의 지극한 소원을 살피시고 신통한 묘력을 내리시사 모진 오랑캐로 하여금 더러운 발꿈치 돌려 멀리 달아나게 하고 다시는 우리의 국경을 침범치 못하게 하여지이다. 그리하여 전쟁이 쉬어 온 나라가 화평하고 모후와 태자의 목숨이 길며 나라의 운이 기리 만세에 태평케 하시오면 저희들이 마땅히 정성을 다하여 불법을 밖으로 두호하오며 부처님 은혜를 조금이라도 보답하려 하나이다. 저희들의 간곡한 소원을 굽어 살피옵소서."

고종 23년(1236)에 대장도감 본사를 강화에 그리고 분사를 진주 근방에 설치하여 대장경판은 새겨지기 시작한 것이다. 고종38년(1251)에 전장이 완성되었다. 16년이란 긴 세월이 걸린 셈이다. 이것을 재조고려대장경, 줄여서 재조장경이라 한다. 지금 해인사에 봉안되어 있는 대장경판이 바로 이것이다. 현재 국보 제32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존 경판의 종류는 1516종이요, 권수 6815권이며 경판의 수는 81254장이다.(이 안에는 후대에 새겨진 15종의 문헌도 포함되어 있다)
경판의 나무는 ⌈자작나무⌋인데 거제도 등지에서 벌채하여 판자를 만들고 다시 이것을 소금물에 삶아서 그늘에 말린 뒤에 대패질을 한 후 판에 새겼던 것이다. 그리고 두 끝에는 각목으로 마무리를 붙여 뒤틀리는 일이 없도록 하고, 또 옻칠을 하고 네 귀에 동판으로 장식을 달았다.
경판의 규모는, 장마다 길이 69.5㎝ 넓이23.9㎝ 두께 12㎝ 정도이다.
이 경판은 처음 새길 때 수기(수기)승통이 고려본, 거란본, 송나라본을 대조하면서 잘못된 것을 정밀하게 교정하여 착오가 없을 뿐 아니라 부류가 온전히 갖추어지고 체제도 잘 짜였으므로 동양에 남아 있는 30여종의 한역 장경 가운데서 가장 완전한 것이라 한다.
이 대장경판은 처음에 강화에 모셔두었던 것인데 이조 태조7년(1398) 오월 지천사로 옮겨졌다.
그 후 다시 지천사로부터 해인사로 옮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