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조로운 환경에서의 마음가짐

직장인의 불교신앙

2009-06-29     관리자


    우월한 지위와 재력
  지난달에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고난과 장애의 의미를 음미해 보았다. 달마스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그러한 어려움은 결코 내 밖에 있는 남이 나에게 해(害)를 끼쳤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전생부터 지어 온 악업의 결과가 나타난 것이니 모두 내 책임 하의 현상이고 그러한 것이 나타난 것은 곧 그 악업의 소멸되어지는 과정이므로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 근심, 걱정하거나 짜증 낼 것이 아니라 감사로이 이를 받아들여야 마땅하다고 하는 것을 알았다.
  이제 우리는 이와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사회생활을 하는 가운데에 남들보다 우월한 지위나 명예 또는 재력을 얻게 되었을 때 우리는 어떠한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 것인가?

    우월감의 해독(害毒)
  직장은 조직사회인 까닭에 상하(上下)의 위계(位階)가 마련된다. 말 할 것도 없이 윗사람은 권한을 가지고 있다. 특히 아랫사람에 대한 명령, 지시의 권한을 갖게 되고, 결재(決裁0를 통해서 자기의 의견을 강행할 권한까지 갖게 되므로 얼은 보기에는 윗사람이 아랫사람보다 어느 면으로 보던 잘 났다고 우월감 내지는 교만심을 갖기 쉽다.
  경제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큰 재산을 마련한 사람이 그러한 것은 자기의 출중(出衆)한 능력 및 인격의 당연한 성과인양 생각해서 자기 도치에 빠지는 것을 흔히 보게 된다.
  이러한 우월감과 교만심을 그 당자에게도 해롭고 그 주변사람들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오직 인연에 의해서
  이 문제에 대하여 달마스님의 법문을 듣기로 하자.
『수연행(隨緣行)이란 인연을 따른다는 것이다. 중생이라는 것이 원래로 「나(我)」라고 할 것이 없고, 모두가 인연과 업과(業果)의 소전(所轉)이라 괴롭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지만 모두 인연을 좇아 생기는 것이다. 어쩌다가 좋은 과보를 얻어 부귀영화를 누렸다하더라도 이것은 내가 과거 세상에 지어놓은 것을 받는 것이다. 지금은 있다 하지만 인연이 다하면 없어질 것을 뭐 그리 좋아하랴? 얻거나<得>, 잃거나<失>를 인연에 맡겨 두고 마음에는 더하고, 덜하고의 생각을 두지 말 것이다. 좋고 궂은 바람에 동하지 않으면 그대로 진리의 길과 합하게 될 것일세. 이것을 수연행 공「인연따라 사는 행」이라 하느니라.』
(달마대사 = 四入行論)

    중생은 「나」가 없다<衆生 無我>

  위의 법문에서 우리는 먼저 중생에게는 「나」가 없다는 것을 배운다. 우리들은 흔히 「나」와 「남」을 대립시켜서 이 세상을 온통 대립의 세계인양 생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나」가 「남」들보다 훌륭하고 잘났다고 생각해서 「남」들을 경멸히 보는 것이다. 자기에게 있는 성공(成功)이야말로 바로 이 「나」의 잘난 증거라고 믿는 것이다. 만약에 이러한 「나」가 참으로 있는 것이라면 그 「나」는 「남」들과의 끊임없는 경쟁과 투쟁으로 지새워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불법문중에서 법문을 듣고 보면 「나」는 본래부터 없다고 하는 것이다. 없는 「나」를 있는 줄 아는 것이 착각 곧 무명(無明)이고 이 「나」가 없는 것을 사무쳐 아는 것이 「깨달음」이다. 「깨달음」으로 우리는 모든 다툼질로부터 해방된다.
  그러나 깨쳤거나 깨치지 않았거나에 불구하고 「나」는 원래부터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잘남 능력이나 「나」의 훌륭한 인격이 지위(地位)와 재산을 마련할 수 있었다고 믿는 것은 곱빼기 착각인 것이다.

    모두가 인연과 업과(業果)

  우리가 경험하는 괴로움과 즐거움은 모두가 다만 인연 따라 나타나는 것뿐이다. 과거에 지은 인연으로 하여서 지금 수승한 경험을 맛보고 있지만 그 인연의 힘이 끊어지는 날이 수승한 과보는 소멸되어 버리는 것을 의심할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현재의 좋은 과보를 가지고 교만하지 말라는 것이다.

    천상(天上)과 지옥(地獄)

  석가세존 재세시의 일이다. 석존의 이복(異腹)동생인 난타(難陀)는 본의 아니게 출가하게 되었다. 출가하여 부처님 회상(會上)에 머물기는 하였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오직 집에 두고 온 아릿다운 「손다리」에 대한 그리움뿐이었다.
  하루는 부처님께서 「난타」에게 물으셨다.
『너 천상을 구경해 볼래?』
『한 번 구경하고 싶습니다.』
  부처님은 신통력으로 「난타」를 데리고 천상에 올라가셨다. 천상세계를 보니 난타는 눈이 뒤집힐 지경이다. 이 지상에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향락의 조건이 두루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느 곳에 가보니 참으로 표현할 길 없이 아름다운 여인 하나가 남편 없이 쓸쓸하게 앉아 있는 것이다. 난타는 궁금해서 그 여인에게 가서 물어 보았다.
『모두 다 내외끼리 재미있게 지내고 있는데 당신은 어째서 혼자 쓸쓸하게 앉아 있소?』
『네 나는 앞으로 이곳에 올 남편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남편은 지금 저 지상에서 부처님 제자가 되어 있는 난타라는 분인데 그 분이 비록 엉터리이지만 출가생활을 하고 있으므로 그 인연으로 다음 생에는 하늘에 와서 낳게 되는데 그때에 저는 그이와 결혼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난타는 너무도 기뻐서 어찌할 바 모르고 형님이신 부처님에게 어서 돌아가자고 조른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손다리와 저 천상의 여인과 누가 더 아름다우냐?』
『비교도 안 됩니다. 천상사람들은 참으로 행복하군요. 어서 바삐 이 천상으로 올라와서 살고 싶군요.』
  이래서 난타는 지상에 내려와서 수도생활을 열심히 한다. 그러나 모두가 이 사람을 상대하지 않는 것이다. 그분들 말로는 『서로 가는 길이 다르다.』는 것이다. 궁금해서 난타는 부처님게 여쭈어 보았다.
『다른 도반들이 저를 상대해 주지 않아 그 이유를 물었더니 서로 가는 길이 다르다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너는 지옥 구경은 안 해 보았지?』
『네!』
  부처님은 신통력으로 난타를 지옥세계로 데리고 가셨다. 그곳 세계의 고통 받는 중생들의 아우성은 난타에게 소름끼치는 광경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느 기름 가마 앞에 가보니 옥졸이 가마에 불을 때고 있으나 죄인이 그곳에는 없는 것이었다.
  궁금한 난타는 그 옥졸에게 물었다.
『어째서 죄인도 없는데 기름 가마에 불을 때고 있소?』
『나는 지금 죄인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요. 그 죄인은 지금 석가세존 회상에서 가짜 스님 노릇을 하고 있는 난타라는 사람인데 그 사람은 지금 부처님 회상에서 지낸 인연으로 하늘세계에 가서 태어나지만 그 인연이 다하면 이곳으로 오게 되어 있소. 하늘세계에서 복을 받으면서 게으름 피우고 교만하고 도 음란해져서 그 죄를 이곳에서 받게 될 것이요.』
  난타는 얼른 지상으로 돌아와서 그 이후는 크게 발심하여 수도에 전력하였다 한다.
여기서 보는 거와 같이 소위「복(福)」이라고 하는 것은 전생에 지은 인연으로 그렇게 나타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인데 그 복을 누리는 과정에서 오히려 죄를 짓게 되면 그 복은 오직 지옥행의 한 과정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이 법문에서는 『좋고 궂은 바람에 동하지 마라』고 가르치고 계시니 우리가 어찌 명심하지 아니 할 수 있겠는가?

    모두를 수행의 과정으로 삼자

  사회생활이나 직장생활에서는 「선·악」의 경계에 부딪히게 마련인 것이다. 혹「악경계」를 만나면 「나는 왜 이렇게 복이 없나? 세상사람 모두 다 잘사는데 나만 못하는 것은 이것이 불공평한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하고 한숨짓기도 하고, 또는 남을 탓하면서 책임을 전가하기에 급급하게 되면서 원망과 미움으로 마음을 꽉 채우게 된다. 또 혹 「선경계」을 만나면 「나야말로 복을 잘 타고 났으니 나는 잘난 사람이야. 나는 능력 있는 사람, 성실한 사람이니 당연히 이만한 복을 누려야 해.」하면서 남들을 업신여기고 복을 낭비하게 되니 이 또한 마음속이 어둠으로 꽉 차는 것이다.
  그러나 그 복이 끊어지게 되는 날이 있을 것이니 그 때에는 그 책임이 조상에게 있다거나 국가, 사회에 있다거나 하면서 남들을 원망한다. 이렇게 되면 「선·악」간에 모두 죄 지으며 사는 것 밖에 안 된다. 어떠한 경계에 다다르더라도 그 경계에 흔들리지 아니하고 본래부터 불성 생명을 살고 있는 절대가치의 주인의 자리를 찾아 가는 마음 중부에 정진하여야 할 것이다. 그 때에는 어떠한 환경조건도 모두 나를 키워주는 고마운 은혜임을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