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가 있는 사찰 기행] 영광 불갑산 불갑사

아무도 가지 않은 길, 그 곳에 진리의 빛이 …

2007-05-23     양동민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다. 부처 ‘불(佛)’, 천간지지의 첫째 ‘갑(甲)’을 쓴 불갑사(佛甲寺)! 백제 침류왕 원년(384년)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 존자에 의해 백제에 불교가 처음 전해지면서 최초로 세워진 으뜸도량이다. 부처님 오신 날에 앞서, 백제불교 최초 도래지로서 신령스런 빛이 충만한 영광(靈光) 땅으로 향했다. 햇살 따사로운 봄날, 남도에 이르니 눈이 바빠진다. 보리밭과 파밭의 싱그러운 물결에 눈을 씻고 나니, 금빛 유채꽃밭과 연분홍 벚꽃터널이 현란하게 펼쳐진다.

 

담기고 싶은 아름다운 풍경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을 겪으며 크게 쇠락한 불갑사는 1990년대 중반부터 현재까지 옛 사격(寺格)을 되찾기 위해 복원불사 중이다. 고려 말 각진국사(覺眞國師)가 주석할 당시에는 전각 70여 동 500여 칸, 31암자에 수행승 1,000여 명이 머무르고, 사전(寺田)이 10리 밖까지 있었다니 그 위세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3~4년 후면 가람 복원과 4만 평에 이르는 도량 주변을 정비하는 대작불사가 드디어 완성을 맞을 예정이다.

보현봉(199m)에 올라 밑을 내려다보니, 불갑저수지와 함께 불갑산 기슭에 아늑하게 자리잡은 불갑사 전경이 호흡을 멈추게 한다. 어서 내려가 한곳에 담기고 싶은 아름다운 풍경이다. 그래도 혹 머리 속에서 지워질세라, 오래도록 바라보고 또 바라본다.

산을 내려와 세심정(洗心亭)에서 목을 축인 후, 문창살에 꽃문양이 수려하게 조각되어 있는 대웅전(보물 제830호)에 들어가니 잠시 어리둥절하다. 여느 사찰과는 달리 불단이 좌측에 조성되어, 정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불상의 오른쪽 옆모습이 보인다. 대웅전 안에서는 한 비구니스님이 절 삼매에 빠져있다. 스님의 절하는 모습을 잠시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정갈해진다.
혹시 마라난타 존자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을까 해서 경내를 유심히 둘러보지만, 1,600여 년의 세월이 아득하기만 하다. 다만 대웅전 용마루 위 중앙에 얹은 인도 스투파 양식의 보주(寶珠)가 이색적이다.

▲ 불갑저수지 너머로 보이는 불갑사 전각의 지붕들

 

일어나는 생각을 산 아래 부려놓고

불갑저수지는 수심이 깊고 움직임이 거의 없다. 간혹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에 잔잔한 물결이 일며 햇빛을 잘게 부순다. 지극히 평온한 한때다. 저수지를 따라 유유자적 산책을 하다가, 내친 김에 해불암(海佛庵)까지 오르기로 한다.

난대림과 온대림이 만나는 불갑산은 참식나무(천연기념물 제112호) 자생 북한(北限)지대로, 비자나무를 비롯한 총 52과 186종이나 되는 나무들이 자생하는 생태계의 보고(寶庫)이다. 또한 옛 산이름이 ‘악(岳)’자가 들어가는 모악산(母岳山)인 만큼, 바위가 많고 산세가 험하다.

‘바다에서 들어온 부처님’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가진 해불암은 불갑사 5대 암자 중 하나로서, 역대로 고승들이 많이 주석하여 참선 도량으로 이름이 높았다. 해불암 뜨락에 앉아, 부질없이 일어나는 생각을 모두 산 아래 부려놓고 그저 내리쬐는 햇볕에 몸을 널어 말려본다. 이대로 좋다.

26년간 해불암을 지키고 있는 초로의 스님께 합장 인사를 하니, 와서 차 한 잔 들고 가란다. 이어질 듯 끊어지며, 끊어질 듯 이어지는 말들이 허공 속에 머물다 가슴에 쏙쏙 들어박힌다. 어느덧 두어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다. 비워낸 찻잔도 수십 잔은 되리라.

성인이 불법을 전래한 포구

돌아오는 길에 영광 법성포 좌우두에 들렀다. 이곳은 불교성역화의 일환으로 지난 해 7년간의 공사를 마치고 조성된 ‘백제불교 최초 도래지’로서, 사면대불상(높이 23.7m, 4면에 아미타불·관음보살·세지보살·마라난타 존자 배치), 탑원(塔園, 마라난타 존자의 출신지인 간다라 사원 양식의 대표적인 모습), 부용루(참배 및 서해 조망용 누각), 간다라유물관 등이 있다.

법성포는 마라난타 존자가 불법을 전하기 위해,인도에서 중국 동진을 거치고 서해를 건너 이 땅에 처음 닻을 내린 곳이다. 굴비로 유명한 법성포(法聖浦)는 ‘성인이 불법을 전래한 포구’라는 뜻으로, 불연(佛緣)이 매우 깊은 곳이다.
『해동고승전』에서는 마라난타 존자에 대해 “신통한 힘을 지녀 온갖 일을 해내는데, 그 능력을 헤아릴 수 없었다. 불교를 전파하는 데 뜻을 두어 어느 한 곳에 머무르지 않았으며, 교화의 인연이 닿는 곳이면 아무리 먼 곳이라도 나서서 갔다.”라고 전해지고 있다.

 

▲ 백제 불교 최초의 도래지, 마라난타 존자가 저 바다 건너에서 법성포로 들어왔다.

 

멀리 법성포 앞바다를 내다보며, 낯선 이국 땅 방방곡곡에 진리의 빛을 퍼뜨리며 걸어가는 마라난타 존자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그는 왜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선택하였을까, 홀로 외롭고 두렵진 않았을까? 아마도 전법에 대한 열정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부처님 오신 날이 다가온다. 나는 어떠한 일에 열정을 쏟아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볼 때다.


전남 영광 불갑산 불갑사 www.bulgapsa.org  061)352-80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