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과 성도

성도일을 맞이하여

2009-06-27     관리자

 인간은 육근의 노예가 아니다.

 사람은 참마음으로 되돌아 가야한다. 그 참마음은 하나의 마음이 되는 것이다. 옛부터 사람들은 하나가 바로 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사람들은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낡아가는 바위가 되어 가고 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바위는 점점 비바람에 삭아지듯이 오늘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 마음이 자꾸만 낡아가고 줄어들고 있다.

 바위가 풍화작용에 못이겨 모래와 흙으로 변멸되어 그 우람한 인간성이 날이 가면 갈수록 물욕과 향락에 혼신의 정열을 쏟고 있으니 이 무슨 일인가.

 마음을 앞세우고 살아도 될까 말까 한 일에도 몸뚱이를 앞세우고 좁디 좁은 공간을 사악한 몸뚱이로 가득 채우려고 한다. 그리하여 몸이 편하면 일체가 안온하게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하여 향락의 물줄기를 온 몸에다 붙이고 살고 있다. 눈, 귀, 코, 혀, 몸 등에 온갖 유혹물을 전입시키면서 흥청스럽게 살려고 한다.

 인간은 육근의 노예가 아니다. 육근을 정복하는 의지력을 길러야 한다.

 싯다르타가 출가 고행시에 인간의 의지를 최상의 것으로 승화시키기 위하여 온갖 고난을 몸소 겪는 것을 원시경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바라문교의 선인들을 찾아가서 수정주의의 행법을 닦아 무소유처정과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도 수행하였다. 그러나 그 수행법이 싯다르타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 것을 초기경전에서 살필 수 있다.

 그리하여 보살은 고행림에서 육체의 고행이 곧 열반을 증득한다는 인도의 일반적 수행도 해냈다. 그러나 육신이 괴로울 뿐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싯다르타의 수행법, 아니 성도의 단계에 이르는 과정은 숫다니파타(425~449)에서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육체의 고통은 인간을 죽음으로 내닫게 한다. 그리하여 보살은 끊임없는 정신세계의 정진만이 성도 하는 길이라 하였다. 우리들 마음속에 내재하여 있는 욕망, 협오, 기갈, 애착, 권태, 수면, 공포, 의혹, 아집 등의 묵은 때를 털어내고 벗겨내지 아니하면 마음의 본체를 찾아낼 수 없다고 하였다.

 성불의 과정

 우리는 숫타니파타의 경문을 함께 읽어보도록 하자.

 네란자라아강 기슭에서 평안을 얻기 위해 힘써 닦고 명상하는 나에게 악마〈나무치〉는 위로의 말을 건네며 다가왔다.

『당신은 야위었고 안색이 나쁩니다. 당신은 죽음에 임박해 있습니다. 당신이 죽지 않고 살 가망은 천에 하나입니다.

 당신은 살아야 합니다. 생명이 있어야 만 모든 착한일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당신이 베에다를 배우는 사람으로써 청정한 행을 하고 성화(聖火)에 제물을 올리는 고행을 쌓는다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애써 정진하는 길은 가기 힘들고 행하기 힘들며 도달하기도 어렵습니다.』

 이 같은 시를 읊으면서 악마는 눈뜬 분 곁에 섰다. 악마가 이렇게 말하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게으름뱅이의 친척이여, 악한자여, 그대는 세상의 선업을 구해서 여기에 왔지만, 내게는 세상의 선업을 찾아야 할 필요는 털끝만큼도 없다.

 악마는 선업의 공덕을 구하는 자에게 가서 말하라. 내게는 믿음이 있고, 노력이 있고, 지혜가 있다. 이처럼 전심하는 나에게 너는 어찌하여 생명의 보전을 묻는가. 힘써 정진하는 데서 일어나는 이 바람은 강물도 마르게 할 것이다.

 오로지 수도에만 정진하는 내 몸의 피가 어찌 마르지 않겠는가. 몸의 피가 마르면 쓸개도 가래침도 마를 것이다. 살이 빠지면 마음은 더욱 밝아지리라. 내 생각과 지혜와 순일한 마음은 더욱더 편안하게 될 것이다.


인간은 육근의 노예가 아니다. 우리들 마음속에 내재해 있는 욕망, 기갈, 애착, 수면, 공포,
권태, 의혹, 아집등의 묵은 때를 벗어내지 않으면 마음의 본체를 찾아낼 수가 없다
.

 나는 이토록 편안히 살고 가장 큰 고통을 받고 있으므로 내 마음은 모든 욕망을 돌아볼 수가 없다. 보라! 이 마음과 몸의 깨끗함을

 너의 첫째 군대는 욕망이고, 둘째 군대는 협오이며, 셋째 군대는 기갈, 네째 군대는 애착이다. 다섯째 군대는 권태와 수면, 여섯째 군대는 공포, 일곱째 군대는 의혹, 여덟째 군대는 겉치레와 고집이다. 잘못 얻은 이득과 명성과 존경과 명예와 또한 자기를 칭찬하고 남을 경멸하는 것이다.

 나무치여, 이것들은 너의 병력이다.

 검은 악마의 공격군인 것이다. 용감한 사람이 아니면 그를 이겨낼 수가 없다. 용자는 이겨서 즐거움을 얻는다.

 내가 어찌 문자 풀을 입에 물 것 같은가.

 이 세상의 생은 달갑지 않다. 나는 패해서 사는 것 보다는 싸워서 죽는 편이 오히려 낫겠다.

 어떤 수행자나 바라문들은 너의 군대에 패해 버리고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덕 있는 사람들의 갈길 조차 알지 못한다.

 병력이 사방을 포위하고 악마가 코끼리를 탄 것을 보았으니 나는 그들을 맞아 싸우리라. 나로 하여금 이곳에서 물러나지 않게 하라.

 신들도 세상 사람도 너의 병력을 꺾을 수 없지만 나는 지혜를 가지고 그것을 깨뜨린다. 마치 굽지 않은 흙단지를 돌로 깨뜨려 버리듯이 생각대로 사유를 하면서 신념을 굳게 하고 이 나라 저 나라로 편력할 것이다. 여러 제자들을 거느리고.

 그들은 내 가르침을 실행하면서 게으르지 않게 노력하고 있다. 그곳에 가면 근심할 것이 없고 욕망이 없는 경지에 그들은 도달하리라.

 악마는 말했다.

『우리들은 7년 동안이나 그를 한발 한 발 따라 다녔다. 그러나 항상 조심하고 있는 성각자에게는 뛰어들 틈이 없었다. 까마귀가 기름 빛깔을 한 바위의 둘레를 빙 돌며 이곳에서 말랑말랑한 것을 얻을 수 없을까 하며 날아다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먹을 것은 없었다. 그곳에서 맛있는 것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까마귀는 날아가 버렸다. 바위에 가까이 가 본 그 까마귀처럼 우리는 지쳐서 고오타마를 떠나간다. 근심에 잠긴 악마의 옆구리에서 비파가 뚝 떨어졌다.

 그만 그 야차는 기운 없이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인간 평등의 선언

 위의 글은 싯다르타가 성불의 과정을 설명한 것이다. 많은 악마가 괴로움과 공포를 안겨 주었다고 하는 것은 외형적 악마라 하기보다 내면세계의 번뇌의 작희로 망상의 번개 불인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나약한 현실성이다. 현실이 편안하고 안락하면 고통을 감내하지 않는다.
현실적 자아가 어떻게 편안한 것을 발견하였다면 그것으로 만족하려고 하는 것이다.

 번뇌는 무명이란 말로써 표현된다.

 무명는 탐, 진, 치 삼독으로 뒤엉킨 마음의 쇠사슬이다. 이 쇠사슬이 우리의 의식세계를 단단하게 휘감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휘감긴 쇠사슬을 푸는 힘은 참다움에 향진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싯다르타가 보리수하에서 정진하는 마음은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종국적으로 완성한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나약한 현실성이다. 현실이 조금 편안하고 안락하다면 고통을 감내하지 않는다. 현실적 자아가 어떻게 편안한 것을 발견하였다면 그것으로 만족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싯다르타는 6년의 긴 고행기간도 인도적 수행법으로 최상의 것으로 증득된 것이 많았지만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지고무상의 깨달음인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려 한 것이다.

 그것은 물질에 연기하는 것도 아니고 마음에 연기하는 것도 아닌 바로 여여(如如)가 자리하는 참 자리를 깨달아내려고 한 것이다.

 싯다르타가 정복한 수미산은 깨달음의 산이므로 원적산(圓寂山)이라고 한다. 이것은 해발의 높이를 초월한 불가사의한 무등등산(無等等山)이다.

 이 산에서 내려다보면 모든 생명은 하나같이 사랑스러운 것이요. 자애로운 햇살을 받아 함초롬하게 성장하여야 할 생명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지고무등등산(至高無等等山)에 올라온 분을 우리는 불타(佛陀)라고 불러마지않는 것이다.

 그런데 불타는 우리에게 평등일여의 사자후로서 우리를 깨우쳐 준다.

『이 진리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도 있었고, 내가 멸한 이후에도 있는 것이다. 깨달음을 성취하면 모두가 이 높고 평등한 산정에 오를 수 있고 아래로 평등한 생명을 하나같이 어여쁘게 보게 될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정말 그 수행에 있어 인간 최후의 고행자임에 틀림없으나 깨친 이후 설파한 법문은 더욱 우리 인간에게 무한한 희망을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成道)로 다함께 성불하여야 한다는 사상을 내어놓게 되었고 더 나아가서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이란 평등성으로 자비가 드리워진 것이다.

 불교, 이것은 인간이 처음으로 체험하여야 할 깨달음의 마음이며 마지막으로 불타와 함께 생활하는 불교인이 되어야 함을 무한히 밝히고 있는 인간평등의 한 선언이 아닐 수 없다. 【佛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