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행복수업’ 끝마쳤습니다

풍경소리

2007-05-23     관리자

초저녁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새벽이 되어도 그칠 줄 모르고 줄기차게 내립니다. 내리지 말아야 할 비입니다. 내리더라도 적어도 며칠 더 기다렸다가 내리면 좋을 비입니다. 왜냐고요? 제가 지금 몸 얹혀사는 공동체에서 어제 들보를 올렸습니다. 그것도 하나만 올린 게 아닙니다. 동시에 두 채나 되는 집에 ‘상량’을 했습니다. 흙벽돌을 찍어 지은 집들입니다. 오래 기다렸다 올 봄에야 겨우 틈을 내서 쌓아올린 집이지요.
공동체에 들어와 산 지 열두 해가 넘었습니다. 제가 맨 먼저 들어와 아직까지 버티고 있는데, 정작 저에게는 제 집이 없습니다. 방을 옮겨 다니면서 더부살이한 집만 헤아려도 예닐곱 채나 됩니다. 공동체에는 살림집이 여러 채 있습니다. 새로 지은 것만 해도 두 채이고 방을 들인 것을 합치면 여남은 채 됩니다. 그래도 저는 붙박이로 있을 곳이 아직 없습니다. 홀몸이다 보니 그렇습니다. 늘 흐르고 구르는 신세입니다.
어제 막 들보를 얹은 집들은 살림집들이 아닙니다. 하나는 그릇 빚는 곳(도자기 성형실)이고, 또 하나는 효소를 발효시키고 메주를 띄울 발효실과 메주방을 함께 들일 곳입니다. 이미 지어놓은 목공실, 대장간과 함께 아이들 교육에도, 우리 공동체 살림에도 꼭 필요한 공간들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속절없이 밤새 비가 내리는 겁니다.
흙벽돌은 비에 약한데, 미처 지붕에 비 가림도 못한 채 ‘조금 오다 그치려니’ 느긋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는데, 추녀 끝에서 떨어지는 비가 흐르는 냇물소리처럼 들리니 근심걱정이 ‘가슴’을 옥죌 수밖에요.
왜 ‘기복불교’가 생겼는지 알겠습니다. ‘극락’과 ‘지옥’이 어떻게 생겨먹은 건지도 알겠습니다. 샨티데바의 『행복수업』을 읽으면서 ‘그래, 맞아’, ‘그러면 그렇지’, ‘그렇고 말고’ 맞장구를 치면서 행복해 했던 게 엊그제 일인데 말짱 도루묵입니다. ‘부처님, 제발 비 좀 그치게 해주세요. 새벽 닭이 홰를 친 지도 오래고, 이제 배고픈 새들이 목청 돋우어 울고 있는 아침이 되었는데 줄창 비가 내리니, 애써 지은 집 죄다 허물어져 내리게 생겼네요.’
날이 환해져서 방금 방문을 열고 들보를 올린 집들을 먼발치에서 보고 있는데, 아직은 내려앉지 않아서 다시 방바닥에 엎드려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행복수업』을 번역한 김영로 군은 오래 사귄 제 벗입니다. 일자리 없는 저에게 밥벌이할 곳을 마련해주어 먹고살 걱정을 덜어준 고마운 사람이지요.
그 친구가 어느 날 느닷없이 전화를 했어요. 『행복수업』을 보았느냐고 물어서 아직 못 보았노라고 무슨 책이냐고 되물었지요. 그랬더니 우리 공동체에 그 책 여러 권 보냈는데, 아직 받아보지 못했느냐고 다시 확인하데요. ‘원, 실없는 친구 같으니라고. 우리 공동체 식구들이 죄다 불행해보였던 모양이지.’ 속으로 꿍얼거리면서, “다시 농사철이 시작되어서 이리저리 휘둘리다 보니 챙기는 걸 깜빡 잊었나보지 뭐.” 하고 심드렁하게 대꾸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렵쇼 저더러 서평을 쓰라는 겁니다. ‘아니, 이런 태평한 친구가 있나. 행복은커녕 불행할 겨를조차 없는 중생에게 행복하게 살 업을 닦으라니, ‘행복수업’받다가 불행해지기 십상이겠다.’ 싶어 ‘그럴 시간 없어!’ 하는 매몰찬 소리가 입 밖에 나오려는 찰나, ‘그래, 이 친구가 한 때 내가 굶지 않게 밥 빌어먹을 곳을 마련해 준 적이 있지.’ 하는 생각이 문득 떠올라 그러자고 했는데, 그 순간부터 행복 끝, 불행 시작입니다. 인연의 고리란 이렇게 질긴가봅니다.
어라, 어느 틈에 빗발이 성글어졌나봅니다. 추녀 끝 낙숫물 소리가 고즈넉해지고 산새들 울음소리가 맑아지기 시작하네요. ‘부처님, 고맙습니다. 비가 그치니 참 좋네요. 제 마음 행복해지네요.’
“경멸과 욕설과 / 불쾌한 말은 / 우리의 몸에 해를 끼치지 않는데 / 어째서 마음이여, 그대는 화를 내리는가?”
“수행에 방해가 된다고 주장하며 / 그들에게 화를 내서는 안 됩니다. / 그들을 통해서 우리는 인욕을 수행하는데, / 인욕보다 더 좋은 수행은 없기 때문입니다.”
좋고, 좋고! 참 마음에 드는 말이네. 그런데 왜 성철 스님은 살아생전에 그렇게 걸핏하면 화를 냈다지?
제 별명이 ‘쉰 숙주’이고, ‘밴댕이’입니다. 제 ‘술 제자’들이 붙여준 겁니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데다, 소가지가 좁아서 벌컥벌컥 화를 잘 내는 바람에 얻은 ‘경멸’, ‘욕설’, ‘불쾌한 말’이지요. 화내지 말라고 해도 저는 성철 스님 화내는 모습이 좋습니다. 밴댕이인 저에게 ‘봐라, 성철 스님도 화를 낸다’는 위안과 거기에 따르는 행복을 주거든요. ‘행복수업’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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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구병 | 1943년 전남 함평생. 충북대 철학과 교수 및 「뿌리 깊은 나무」 초대 편집장 역임. 현재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운산리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생활 및 학교 공동체 운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