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새벽

한국 불교사 1

2009-06-26     관리자
 고대사회의 신앙

 만주지방 일대와 한반도를 무대로 삼고 터전을 일구어 삶을 이어 왔던 우리의 조상〈배달겨레〉들은 여는 원시민족들과 다름없는 자연신 숭배의 신앙을 갖고 있었다.

 까마득하고도 신비롭게 푸른창공과 거기에 낮 밤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고는 다시 나타나는 해와 달과 그리고 무수히 반짝이는 별들. 그 맑은 하늘을 흐리게 하는 구름과 때때로 내리는 비와 눈, 산과 바다와 강과 벌판, 나무와 바위 등 모든 것을 신(神)또는 그 화현(化現)으로 믿고 신봉하였었다.

 그래서 자연으로부터 받는 모든 재앙, 곧 가뭄과 홍수와 폭풍우와 벼락과 몹쓸 전염병 등을 모두 신의 노여움이나 벌(罰)로 보고, 또는 못된 신(惡神)의 장난으로 믿었기 때문에 그 신들에게 비위를 맞추고 비는 행사로서 자연의 재난을 극복하고자 하였었다.

 이같이 모든 재난을 극복하고 또 권위 있는 신들을 섬기는 신앙행사가 원시 및 상고대(上古代)의 사회에서는 매우 중요한 생활의 일부이면서 그들 신앙의 전부이기도 하였다.

 그러한 신앙행사 중에서도 5월 하종(下種)과 10월 추수 뒤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하늘과 모든 신에게 빌고 제사하는 행사〈祭天大會〉가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부여의 영고(迎鼓)와, 졸본부여의 동맹(東盟)과, 동예의 무천(舞天)은 그 대표되는 사례라고 할 것이다. 고구려와 백제 신라 및 가락 등의 나라들로 이루어져 내려오는 동안에도 우리의 조상들은 그처럼 원시적 자연신 숭배의 테두리를 벗어나질 못하였다.

 뿌리내린 불교

 말하자면 자연신 숭배의 신앙만 있었지 종교라고 할 만한 조직적이고도 체계화 된 신앙형태는 갖고 있지 못하였다 할 수가 있다. 그러한 때에 중국대륙으로부터 높은 수준의 문화를 수반한 불교라는 새로운 종교가 들어오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불교는 말할 것도 없이 외래종교이다. 그러나 불교는 그 자체가 배타성(排他性)이 없고 응동보화(應同普化)의 무애(無碍)한 역사적 원리성〈歷史性〉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언제나 외래종교인 채 그대로만 계속 머물러 있지는 않았다.

 종교를 갖지 못한 우리 민족에게 불교는 오래지 않아 우리의 종교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우리 것이 된 불교는 종교로서만이 아니라 민족의 문화요, 사상이요, 모든 애환을 순화(醇化)하는 정신적인 기둥이 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우리의 역사기록에서 불교를 제일먼저 받아들인 때를 고구려 제17대 소수림왕 2년(372)의 일로 본다.

 그때 고구려와 이웃한 전진(前秦)당시 5호(胡) 16국(國)중의 하나로 북쪽 중국을 차지하고 있었던 나라에서 부견왕(符堅王)이 사신과 순도(順道)스님을 보내어 불상과 경전을 전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은 그보다도 먼저 이 땅에 불교가 들어와 있었던 흔적이 보이고 있다.

 소수림왕 이전의 불교

 나라 때의 고승전(梁高僧傳) : 중국 최초의 고승전)과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 고려 때 覺訓(각훈)스님 지은 것)에서 그것을 전하고 있다. 거기에는 소수림왕 2년(372)보다 6년 전에 세상을 떠난 중국의 고승 지둔 도림(支遁道林, 314~ 366)이 고구려의 어느 스님(이름은 전해지지 않고 다만 고구려 도인이라 있음)에게 글을 보낸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어느 해에 그 글을 고구려의 스님에게 보냈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하지 않으나, 전진의 부견왕이 순도스님을 고구려에 보냈다는 그 해 (372년)보다는 훨씬 앞의 일이었음에는 틀림없다. 366에 세상으로
떠난 동진(東晋)의 고승 지둔 도림이 그의 생전에 보낸 글이였기 때문이다.

 중국의 불교 초기에는(우리나라에서도 3국 시대에는) 고승을 도인(道人)이라고 하였으므로 지둔 도림이 글을 보냈던 고구려 스님도 범용(凡庸)한 스님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한 고승이 고구려에 살고 있었다면 불교가 고구려에 알려진지도 상당히 오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정확한 년대는 알 수 없으나 소수림왕 2년(372)보다는 훨씬 이전의 일로 볼 수가 있다. 366년에 입적한 지둔 도림스님이 입적 10년전(356년)쯤에 고구려 스님에게 글을 보낸 것으로 계산한다면 고구려 스님의 득도(得度 , 出家)를 다시 한 30년 전(326)쯤으로 보고, 대략300년대(4세기)초 무렵 쯤에는 고구려에 불교가 들어왔던 것으로 추정할 수가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으로 들어온 것이 아무리 늦게 잡아도 소수림왕 2년(372)보다는 50~60년은 더 앞서 있었던 일로 볼 수가 있다고 하겠다.

 이때 처음으로 이 땅(고구려)에 전해졌던 불교는 물론 당시 중국에 들어와 있었던 그 불교였음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중국불교, 경전 번역 활발

 인도에서 비롯되었던 불교가 서역(西域)여러 지방을 거쳐서 중국에 들어온 것은 한(漢)의 말 후한(後漢)의 초(서기A.D초) 쯤의 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경전이 한문으로 번역되고 본격적인 활동이 전개 되었던 것은 후한 말 2세기 중엽 부터였다.

 서역의 스님이었던 안세고(安世高(안세고))와 지루가참(支樓迦讖) 이 중국에 와서 경전을 번역한 이후로 중국에는 소승(小乘)경전은 물론 율전(律典)과 논장(論藏)도 번역되어 있었다.

 4세기 초에 이르는 한 2백년 동안에 중국에는 상당히 많은 경전이 번역되었다. 이동안의 인물인 축법호(竺法護, 231~308)같은 고승은 혼자서 2백종(二百部)에 가까운 번역을 남겨 놓았었다.

 많은 삼장(三藏 : 經. 律. 論)의 번역과 아울러서 그만큼 불교도 연구되고 신앙되어졌을 것은 당연하다. 당시 중국불교계의 초기적이 연구경향과 그 성격을 흔히들 격의불교(格義佛敎)라고 한다.

 격의불교란 그때 중국의 일반적 학풍과 사상계의 현학적(玄學的) 청담사상(淸談思想) 의 영향을 받은 중국불교의 초기적인 경향을 일컫는 것이다.

 말하자면 당시의 노장(老莊)적 청담학풍에 영향되어 불교의 독자성을 제대로 확립되지 못한 시대사조(時代思潮)적인 불교형태였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중국과 고구려 스님과의 교류

 그와 같이 중국에서 번역되고 형성되었던 경전과 격의적인 불교경향이 고구려에 들어왔던 것으로 볼 수가 있다.

 그 시대가 바로 그 때였기에 의심할 수가 없는 일이지만, 보다 더 확실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고구려 고승에게 글을 보냈다는 그 지둔 도림스님이 당시 중국 격의불교의 대표적인 인물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때 그 글의 내용이 양고승전〈권4 竺潛法深傳〉해동고승전〈권1 釋亡名傳〉에 들어 있는데 지둔 도림이 그의 선배인 축법심(竺法深, 286~374)을 고구려 도인에게 소개하고 있는 내용이다.

 고구려 스님에 소개 당하고 있는 축법심 또한 격의 불교의 대표적인 고승이다. 축법심과 지둔 도림은 다 같이 당대 격의불교의 대표 격인 고승인데, 이들과 고구려 고승 간에 서로 서신을 교환하고 또 소개하고 소개받는 사이였음을 미루어서 더욱 고구려 초전 불교의 격의(格義) 적인 성격을 의심할 수가 없다고 할 것이다.

 위와 같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 외에는 고구려에서 처음 받아들인 불교의 성격을 더 자세히 알기가 어렵다.

 불상경문의 전래

 삼국사기(三國史記, 권13 高句麗本紀6)의 소수림왕 2년조 순도(順道) 전법(傳法)사실에는, 전진 부견왕이 고구려에 불상과 경문(經文)을 보내온 것으로 되어 있다.

 물론 경문은 불교경전으로서 당시까지 중국에서 번역되었던 범위 내의 것으로 볼 수가 있으며, 불상 또한 그 내용은 밝혀져 있지 않으나, 당시 중국에 있었던 불상이 범주에 속하는 것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물론 전진에서 고구려에 보내 온 불상 석가여래 본존상(本尊像) 이었겠으나 그 크기나 모양새를 알 수가 없다.

 전진 왕 부견이 일찍이 고승 도안(道安)에게 예물로 보낸 불상에는 외국제(중국아닌 인도 서역지방)의 금박의 상(金箔倚像)과 금불좌상(金佛座像)과 결주미륵상(結珠彌勒像)과 수놓은 불상〈0佛〉및 베로 짠 불상(織佛) 등이 있었다고 한다. (양고승전 5釋道安傳)동일왕인 부견왕이 고구려에 보낸 불상도 그러한 불상의 범주에 속하는 불상일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고 할 것이다.

 태양은 떠오르다

 이상에서 대충 이 땅에 불교가 처음 들여진 때의 사정을 살펴보았다. 그렇게 해서 이 땅 한국의 불교는 시작되고 또 전개 되어 왔다.

 그러나 소수림왕 2년(372)말고는 최초로 불교가 들어온 년대를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하도 오래된 일이라 역사의 안개에 가려서 불교가 처음으로 전해진 해를 알 수가 없는 것도 당연하다 할 것이다. 단지 소수림왕 2년 순도 스님이 불상과 경전을 가지고 왔던 그해 보다는 앞서서 언제인가 불교가 이 땅에 전해졌었다는 것만은 역사적인 사실이었다고 할 수가 있을 것이라 하겠다.

 그리하여 우리 불교의 새벽은 드디어 깊은 밤의 어두움을 물리치고 겨레의 터전 위에 찾아 왔었다.

 뿌연 새벽 안개 속을 헤치고 태양이 산마루에서 이글이글 타는 얼굴을 드러내듯, 우리의 불교도 태고적 신앙의 짙은 어두움을 꿰뚫고 빛나는 민족종교의 새아침을 맞이하게 하였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한국불교의 새벽은 바로 우리 민족문화의 새벽 그것이기도 하다」고 하여도 결코 지나친 표현은 아니라고 할 것이다.【佛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