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이 라마 망명수기 <8> 중공의 침략 1

티벳 불교 총수이며 국가원수인 비구 달라이 라마의 망명 수기 : 내 나라, 내 겨레

2009-06-24     달라이 라마

 

제 5장 침략

1948년 아직 공부하고 있을 때, 정부에서 중공 간첩이 침투했다는 말을 전했다. 우리 국방력과 외세의 군사원조가 있나 하고 살핀단다. 간첩 임무로는 식은 죽 먹기다. 내가 알기로 서양사람 6명 중 2명, 나머지는 오스트리아 2명과 백계 러시아 1명인데 전쟁 당시 영국의 적대국이라고 인도에서 이송한 사람들이다.

 우리 국군은 장병 8천 5백명, 소총은 그 수보다 많고, 각종 포 50문, 박격포 250문, 기관총 300정이 전부다. 앞서 말했지만 무단월경 감시와 경찰력이었다. 전쟁을 치르기에는 어설펐다.

 이 절박한 소문 뒤에는 더 험한 소식이 동부에서 들려왔다. 동부에 있는 영국인 무전사가 라사에 있는 동족 무전사에게 중공군 대부대가 이동하는데 침공할 것 같다는 내용을 타전했다.

 국무회의에 경고가 알려지자 국회를 소집했다. 유사 이래 가장 심한 위협을 받고 있는 때다. 공산화된 중국은 전에 없는 군사력을 보유했다. 과거에는 두 나라 사이에 종교적인 동정심이 있었는데 지금은 티벳 사람으로선 군사적 성격보다 더 생소한 유물사상이 더 큰 위협이었다.

 자원도 무기도 인력도 없으니 각국에 호소하여 중공을 멈추게 하자고 결의했다. 영국, 미국, 인도, 네팔에 사람을 보내기로 했는데, 출발전 네 나라의 회신은 큰 실망이었다.

 영국은 인도를 독립시킨 뒤, 지리적으로 도울 수 없다고 정중하게 거절했다. 미국도 같은 내용으로 대표단을 거절했다. 인도도 군사원조를 할 수 없고, 무력으로 대항하지 말라는 소리에 1914년 인도에서 합의한 내용으로 평화적 타결을 하라고 충고했다. 이렇게 군사문제는 독불장군이 없다.

 게다가 동부 지사의 임기가 완료돼 구관은 떠나고 신관이 임지에 도착전 중공군이 먼저 침입했다. 우리 국군과 지방민 자원자들이 대항했으나 하나마나 였다. 신임 지사는 후퇴했다.

 군인도 화약고를 폭파하고 철수했다. 그러나 중공군이 더 빨리 더 깊숙히 퇴로를 막아 모두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영국인 무전사가 잡혔으니 라사는 연락방법이 없었다.

 이때 중공군이 보낸 지사의 연락이 왔다. 자기에게 협상할 위임을 달라는 것과 침략군 사령관이 더 이상 진격을 않는다는 확약도 있었다.

 정부는 내가 나서라고 모든 것을 떠맡겼다. 내 나이 16살이다. 공부도 끝나지 않았다. 정치고 뭐고 세상 모르고, 할 일이라고는 공부 뿐인줄 알았고 18살이 되어야 정식 권한이 생긴다고 들었는데 내 나이 16살이니 자격 미달이라고 거절했다.

 사람들은 전임자가 입적한지 오래고, 그간에 섭정으로 지낸 국사가 원만치 못했으니 다 맡으라고 내세웠다. 침략받고 있는 백성들의 단결을 위해서라도 달라이 라마라야 모두 따른다고 했다.

 거절해서 될 일도 아니고, 힘 닿는대로 나라를 위하여 중공에 대항하기로 결심했다. 전통적인 의식으로 취임하고 재소자는 전원 투사로 풀어 주었다.

 이 무렵 고향 절에 갔던 큰 형이 돌아왔다. 형은 그곳서 중국 국무군이 쓰러지고 중공군이 진군하는 것을 봤으며 말로는 보호하러 왔다고 떠들고, 신앙의 자유도 있으니 걱정말라고 해놓고, 모든 제도는 그 반대로 뜯어 고쳤단다.

 또 티벳은 중국영토니 찾아서 공산화시키겠다고 했단다. 형에게 라사로 가서 나를 만나 정부가 중공을 받아들이도록 종용하면 지사를 시켜준다고 했단다. 거절하다 못해 개인보다 나라의 위기를 직접 알리러 거짓으로 꾸며대고 도망 왔단다.

 나는 국제연합에 알리려 준비를 했다. 한편 인도의 조언대로 더 험해지기 전에 중공과 협상도 생각했다고 주둔군 사령관을 통하여 나이 탓으로 실권이 없었으나 이제 수임케 됐으니 오랜 역사의 두 나라 우호를 다시 복원하자고 중공 정부에 글을 써 보냈다. 우리 포로도 돌려주고 정복한 땅도 돌려달라고 썼다.

 국회는 중공군이 라사로 진군할지 모르니 나는 인도 변방으로 피하라고 했다. 거절했으나 많은 사람의 우격으로 내가 졌다. 이런 일은 앞으로도 말하겠지만 자주 일어나 의견 충돌이 계속됐다.

 나 자신 너무 고집하다 보면 온 티벳 사람의 뜻을 거역하는 결과라 개인적으로는 딱하나 달라리 라마를 섬긴다는 그들을 따르기로 했다.

출가, 재가 두 수상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니면 전결하라고 위임했다. 국무위원들의 걱정은 40년전 중국이 침공했을 때 전임자가 한대로 인도로 가야하고 그러기 위하여는 비상금이 필요하니 시킴에 보관하라고 했다.

 9년 후에 그것을 정말 쓸 줄 누가 알았으랴

 슬픈 일은 국제 연합이 티벳 문제를 거론치 않기로 했다는 소식이었다. 우리는 당황했다. 믿은 것은 정의롭다는 국제연합이었다. 더욱 영국이 묵살했다니 한심했다.

 오랜 세월 친했던 영국이다. 그 나라 관리들이 많이 도와줬고 우리의 독립도 그 나라가 인정해 줬다. 그런데 그 나라가 중국의 보호국일지도 모르니 티벳의 법적지위는 분명치 않다고 했단다.

 인도의 태도도 마찬가지였다. 중공과 평화적으로 해결하면 자치권이 보장 될테니 국제연합에서 토론을 포기하자는  소리였다. 군사원조거절보다 더한 실망이었다. 정의를 호소하는 데도 도울 수 없다는 친구들이다. 우리는 중공군에 버려졌다.

 역사를 들춰보면 지금 우리가 이런 궁지에 몰리게 된 정책이 뻔하다. 1912년 독립 당시 국제적 인정을 좀더 받아야 했었는데 우리는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고 홀로 동떨어져 만족하고 있었다. 국제연맹에라도 들었더라면 국제연합에라도 가입했더라면 또 큰 나라와 대사라도 교환했더라면 국권은 뜬구름이 되지 않고, 간단한 우리 문제는 터무니 없는 근거로서 정의를 뒤엎은 일로 되지 않았을거다. 우리는 세상이 좁아져 어느 구석이고 혼자 살 수 없을 만큼 됐다는 쓰라린 교훈을 배워야 했었다.

 한가지 남은 일은 최대한으로 중공과 협상할 뿐이다. 동부의 품의대로 지사에게 위임했다. 회답은 뜻밖에도 인도 주재 중공대사가 라사나 점령군 주둔지가 아닌 북경에서 하라고 했다. 1951년 초 지사 외 네 사람이 그곳으로 갔다. 그들이 라사로 올 때 까지는 또 캄캄했다. 출장부명서로 봐서는 주은래가 환대하고 내리 만든 10개 조항의 초안을 내밀더란다.

 우리 대표는 티벳이 독립국 임을 여러날 여러가지 증명으로 말했으나 중공은 받아주지 않았다. 그 보다 7개항  더 추가한 개정안을 내며 우리쪽이 선택의 여지도 없게 했단다. 개인적인 수모와 너의 나라는 무력으로 끝내겠다는 협박을 했단다. 본국의 훈령도 안된다고 했단다. 

 중공이 미리 만든 협상의 골자는 우리나라가 중공의 일부라는 억측이다. 우리 대표가 동의 못할 거짓말이었다. 죄수처럼 폭행까지 당하고 서명하니 도장은 중공이 파와서 찍고 우리 대표에게 낭송을 시켰다. 깜짝놀랄 내용이었다.

 일부분은 사실이고 전부는 사실 이상의 가혹하고 뻔뻔스러운 허세에 소름끼쳤다. 서두에 이런 말들이 나온다. 과거 100년 이상 중국과 티벳은 제국주의 군대와 동조자 때문에 기만과 도발로 침략 당했다. 그러한 압제하에 티벳 인민은 노예로 고통받고, 운운 한마디로 엉터리다. 인민해방군을 티벳에 진격시켰다고는 시인했다. 이유는 침략적 제국주의자들을 구축하며 자유롭게 중화인민공화국의 대가족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였다.

 사실은 1912년 그들 중국군이 나간 뒤 우리나라에는 외국군이 없었다. 내용은 계속된다. 티벳 정부는 인민해방군을 활발히 도와 국가 방위에 협력해야 한다. 티벳 국군을 중공군으로 통합하고 티벳의 외교권은 몰수한다며 현 티벳 정부는 그냥 둔다. <계속>

 

홍교 김일수 옮김 
마하보디협회 한국지부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