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광 茶室

.

2009-06-23     관리자

이달은 소서, 대서가 들고 초복, 중복이 들고 더위도 장마도 함께 닥치는 달이다. 더위와 씨름하다 보면 곧잘 시원한 옷타령도 나오게 된다. 그렇지만 오늘 우리의 의생활은 다른 것도 그렇지만 과다하리만큼 호사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주거환경은 계절이 없고 의복생활은 편의 지상주의이고 때로 진시황제가 부러워 할만한 것도 있다. 옛사람들은 북쪽 창가에 앉아 있는 복을 제석천왕 복과 바꾸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그에 비하여 오늘의 우리 생활이란 재석천왕복으로는 어림도 없다하면 지나친 허풍일까. 어쨌든 더위 속에서 공부하여 성인이 된 옛날을 생각하면 우리는 너무나도 환경 타령에 빠져 있고 진지한 생명추구에는 등한하지 않는가 생각되어 부끄러워 진다.

우리 부처님은 무슨 옷을 입으셨을까. 기록에 보면 확실히 남루한 분소의(糞掃衣)를 입은 게 틀림없다. 두타(頭陀) 제일이라 하여 고행 제 1의 성자이며 부처님의 법등을 이어받았다고 하는 가섭존자는 누더기 도인의 대표이기도 하다. 그런데 가섭존자가 처음부터 남루한 분소의를 입은 것은 아니었다. 출가 당시는 시장에서 가사에 알맞은 베를 사서 좋은 옷을 만들어 입으셨다. 부처님을 만나 모시면서 부처님께서 가섭의 옷을 좋다고 하시니 가섭은 부처님께 청하여 그 옷을 바치고, 가섭은 부처님의 누더기 옷을 받아 입었다. 이렇게 되어 가섭은 영광의 누더기를 받아서 간직하였다가 장차 성불할 미륵불에게 바친다고 하지 않는다. 부처님께서 가섭을 만날 때는 이미 제자가 수천명, 빈비사라왕까지 귀의한 때였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우리의 오늘은 어떠한가. 더위에 무심하고 도행에 정성을 집중하는 정신력이 약해지지 않았는가 한다. 좋은 환경에서 얻어 지는 것이 나약이 아닌가. 광실자 자신을 돌이켜 보는 넋두리다.



♣지난 6월 5일 탄허스님이 입적하셨다. 다비식이 올려질 오대산은 다비 당일만도 만명의 조객이 모였다고 한다. 다비의 연기도 꺼지고 산은 첩첩 말이 없고 개울물은 숨죽여 흐르는 듯, 온 산중이 빈 것만 같았다. 오대산 산중 뿐만 아니라 한국불교계를 누르고 앉으신 그 커다란 모습을 우리는 이제 잃었다. 아마도 오래 두고 메우기 힘드리라.

세인들은 탄허스님을 일컬어 조선조이래 유일한 대 학승이었다고 말한다. 산이 높은 만큼 둘레도 넓고 골짜기도 깊은 법, 산의 이 골짜기, 저 봉우리를 말할 수 있어도 산 그 모두를 말하기는 어려운 것처럼, 탄허스님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광실자가 스님을 처음 만난 것은 6·25때 부산 범어사 선원이었다. 그때는 여러 선자들과 함께 묵묵히 선정에만 잠입한 생활이었다. 그 후 한동안 충무 미래사 선원에 머무시다가 범어사로 돌아 오셨는데 그때도 묵묵, 산과 같이 앉아 지내셨다. 불교 정화 운동을 거쳐 종단이 일대 파란을 겪는 와중에서 뵈올 때도 역시 스님은 산과 같이 말이 없었다. 그러나 대학생들과 더불어 수련장에 나가 강단에 섰을 때나, 선자들을 위한 강설 시간에는 그야말로 장광설이다. 도도히 강물을 내려 붓듯이 말과 비유과 소재가 무진장이다. 이것이 스님의 침묵 상인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화엄경 번역과 주술을 쓰시던 어느날 애용하시던 만년필을 매만지시며 「원고 20만매를 썼노라」하셨다. 화엄경 출판이 끝난 다음에는 한국불교 기본교재 전부를 역술하시겠다고 하셨다. 스님은 그것을 끝내 다 해내셨다. 이것도 스님의 침묵상이 아닌가. 동국학원 이사로서 회의석상에 나오셨어도 역시 침묵의 변설이었다. 한번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불법은 결코 빛날 것이요. 해가 솟아오르는데 촛불 걱정할 것 없소.」

스님은 천지 밖에 유연히 머무셨다. 아!이 순간도 스님은 저 불멸의 침묵 속에 대비 서원력을 굴리시리라. 뜨거운 호법 의지가 그 속에 팽팽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