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고도산업사회에 있어서의 불교

특집/ 佛光 창간 4주년 기념강연요지

2009-06-22     서경수

    1. 세간을 위한 출세간법

  불교의 교리인 <법>을 출세간법(出世間法)이라고 한다. 인간역사의 상대적 제약(制約)을 벗어난 법이란 뜻이다.
  그러나 반드시 출세간법이다. 그러므로 세간을 위한 출세간법이다. 이 법이 출세간을 위한 것이라면 세간에 사는 인간과는 아무런 관계도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이 출세간법을 오직 출세간만을 위한 법으로 오해한데서부터 불교 교단사는 잘못 흘러내려오지 않았는가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인 법이 인간이 사는 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부처님의 일생은 붓다·가야의 성도(成道)로 끝났을 것이다.
  인간을 위한 발언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도 후 부처님은 세간에 사는 인간을 위하여 몇 차례 주저한 끝에 녹야원에서 교설을 폈다. 이것이 초전법륜(初轉法輪)이다. 부처님은 말씀 즉 가르침을 통하여 인간에게 성도의 내용을 현시(顯示)함과 동시에 인간에게 성도에 이르는 길을 보여주었고 인간을 그 가르침을 통하여 부처님과 인간이 만나서 대화를 한 자라가 초전법륜의 녹야원(鹿野苑)이다. 따라서 녹야원은 성도하여 성인(聖人)이 된 부처님과 세간사회 교통하여 살아가는 인간이 만나서 서로 대화를 성취한 광장이기도 하다.
  이 광장에서 부처님은 처음으로 <불교>의 창시자로서 등장했다. 붓다·가야의 부처님은 성도한 성인에 지나지 않을 뿐 아직 불교의 교조는 아니었다. 붓다·가야는 싯다르타 태자가 위대한 성인이 된 자리, 녹야원은 부처님이 불교의 교조가 되므로 종교로서의 불교가 이루어진 곳이다. 따라서 부처님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사는 세간 즉 사회를 위하여 교법을 폈고 부처님이 창시한 불교는 또 어디까지나 인간이 사는 사회를 위하여 존재한다. 그래서 인간역사의 상대적 제약을 벗어난 출세간법도 인간이 사는 세간사회를 위하여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는 인간사회에 관계된 모든 문제에 무관심할 수 없다. 불교는 그 사회가 당면한 문제에 대하여 무어라고 한마디 발언해야 한다.
  옛날 부처님이 교통하는 인간의 문제에 대하여 한마디 하듯이 오늘의 문제에 대하여 한마디 발언도 없는 불교라면 오늘이 요청하는 종교로서의 존재이유마저 의심받는다. 오늘 여기 이 자리에 부처님이 와 계신다면 오늘의 사회문제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발언하실까 하는 것을 대변(代辯)하는 것이 오늘의 대승보살(大乘菩薩)이 짊어져야 할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2. <메커니즘> 시대의 종교기능


  고도산업사회(高度産業社會)란 한마디로 고도로 <기술(技術)>산업이 발달한 사회를 가리킨다. 그리고 기술 산업이 고도로 발달했다는 것은 모든 것이 <기계화(機械化)> 되었음을 의미한다. 고도로 정밀화된 <메커니즘>이 정치·경제·군사 등 문화 분야에 골고루 침투하여 모든 관계를 기능적으로 조절하고 조작(操作)하는 주동적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사회다. 특히 기계의 비약적 발전과 숫자적 속도의 발전은 서로 비례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사실이다. 더구나 모든 정보를 수집 판단까지 하는 <컴퓨터>까지 등장함으로 기계시대도 또 절정에 이른 느낌을 준다. 한편 기계시대가 정정에 이르렀다함은 동시에 그 한계에 다다름을 암시하여 주시도 한다. 하나의 시대상황이 한계에 다다름을 암시하여 주시도 한다. 하나의 시대상황이 한계에 다다르면 부정적, 비관적 불신론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같은 한계상황에 가장 민감하게 대응하며 부정적 불신론을 제기할 때는 대개 종교나 논리가 앞장선다. 만일 한 사회가 직면하는 역사적 한계상황에 처해 있으면서도 아주 둔감하여 비판의 발언을 한마디도 제대로 못하는 종교라면 불이 꺼진 연대(火台)처럼 그 종교적 기능을 포기한 화석적 존재(化石的 存在)에 지나지 않는다.

    3. 기계시대의 문제점

  기계만능사조(機械萬能思潮)는 인간에게 <심각한 소외감>을 가져다주었다. 옛날의 기술자는 한 제품이 완성될 때까지 자기손으로 시작부터 그 작업을 해 왔으므로 창조한다는 희열(喜悅)을 맛볼 수 있었다. 그러나 기계화된 오늘의 작업과 정에서는 조작노동(操作勞動)이 극도로 단순화되어 동일작업(同一作業)을 수없이 되풀이하는 인간 로봇과 경향이 일어난다. 이리하여 인간이 만들고 인간이 부리던 기계가 도리어 인간을 부리고 있다. 주종(主從)의 역전현상(逆轉現像)이 생긴다. 인간은 주인의 지위에서 기계에 의하여 쫓겨난 셈이다. 인간이 모든 것의 주인임을 자각하는 것이 불교의 교리다. 주인임을 자각하는 <나>를 불교는 강조한다. 그런데 인간이 주인의 지위에서 쫓겨났다면 <나>를 아주 잃은 것이다. 인간의 상실과 함께 나를 상실한 것이다. 나를 상실한 인간이 바로 로봇이다.
  둘째 「라디오, TV, 신문 등 매스컴의 의도된 시청각적 자극은 사고방식마다 획일화(劃一化)하고 심지어는 중대한 판단조차 TV나 신문의 해탈에 맡기는 젊은 지식인들을 만들어 놓았다. 자기의 생각에 의하여 사물을 판단하는 인간의 사유기능(思惟機能)을 포기하고 로봇이 된 것이다. 그리하여 기계시대의 절정에서 이루어진 로켓에 의한 달의 정복이 과연 인간과 사회에 어떤 이익을 주었는가 라는 회의를 한 번도 할 줄 모를 만큼 둔감한 로봇이 되었다. 천문학적 숫자에 이르는 재정적 지원으로 최고의 인간두뇌에 의하여 달 로켓트가 달을 향하여 발사될 때 인간이 사는 지구상에는 수억의 인구가 굶주림의 고통을 받고 있었다. 자비의 종교임을 자처하는 대승불교 보살의 관심은 어느 편으로 쏠려야 할 것이다. 이태백(李太白)의 달을 짓밟은 우주인에게만 관심을 보낼 것인가. 아니면 굶주림에 시달리는 중생들에게 자비의 손길을 뻗칠 것인가.
  셋째, 컴퓨터 조작에 의한 기계적 생산은 <다량(多量)>을 산출한다. 다량 생산하는 제작과정에서 단일노동을 해야 하는 인간은 규격화된 생산품과 함께 획일화된 대중 속으로 용해된다. 자기 자신을 자각하는 <나>를 잃은 인간은 규격화된 다량 로봇층의 하나가 되고 만다. 내면에서 나를 잃고 불안한 대중속의 인간은 만족을 외부에서 추구하려고 한다. 그런데 고도의 산업은 다량생산을 위한 자본투자가 필요하므로 자본가가 형성된다. 따라서 고도산업사회는 자본주의 사회로 직결된다. 투자는 반드시 이윤을 예산한다. 그래서 황금(黃金)이 모든 만족을 가져다준다고 망상하는 대중은 이윤추구에 혈안이 된다. 그것도 지루한 단순노동을 거치지 않는 일확천금(一攫千金)을 노린다. 고도산업사회라 할 때 이 고도는 <고속도(高速道)>와도 통한다. 이윤이 빠른 속도로 얻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대중의 심리다. 그래서 도박과 투기가 대중사회에서는 성행한다. 가장 빠른 속도로 얻어지는 이윤은 복부인(福夫人)들의 투기다. 그런데 이 같이 획득된 이윤은 가장 반도덕적 향락에 탕진도기 때문에 또 하나의 사회악을 조장한다. 이리하여 반사회적 악순환은 무한궤도(無限軌道)를 치닫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금은(金銀)같은 재화(財貨)를 멀리하는 부처님의 교훈을 반성해 본다. 부처님의 유통화폐에 의한 자본의 일시적 축적에서 초래되는 사회적 불균형을 일찍이 우려한 것 같다. 자본주의의 폐단을 부처님은 깊이 통찰하고 <금은정(金銀淨)>의 계율을 정했다. 그 후 100년도 못되어 이 <금은정>에 대한 해석의 차이 때문에 불교교단이 상좌부(上座部)와 대중부(大衆部)로 근본분열(根本分裂)을 일으켰다.

    4. 잃어가는 자연

  고도산업이 기계화되어 다량생산이 쏟아져 나오므로 자원 고갈과 함께 자연이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다. 자연자원이 기계의 조직에 의하여 다량으로 물자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배출되는 폐수(廢水)와 가스는 가공할 공해를 발생하여 지구와 인류에게 위협을 주고 있다. 자연의 은혜를 배신한 인간에 대한 자연의 보복이다. 자연을 정복한다는 인간의 오만은 하나 밖에 없는 지구를 잃게 될 위기까지 몰고 있다. 산천초목에까지 불성(佛性)이 있다는 불교의 가르침이 다시 되새겨질 때가 왔다. 인간은 소중한 <나>와 함께 지구까지 잃어버릴 한계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인간도 본래 자연의 일부다. 그 자연을 정복하고 파괴하려고 하는 발상부터가 자멸(自滅)을 초래하는 망상에 속한다. 끝으로 고도산업이 일방적 자본축적을 가속화(加速化) 한다면 사회에 부의편재로 인한 양극화현상을 일으키고 이 양극화현상은 사회 구조를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불안을 안겨다 주게 된다.
  그렇다면 종교가 또는 불교가 어느 층을 위하여 존재한다고 생각하는가. 부처님은 잘 사는 자도 못사는 자도 똑같이 보신다. 대지혜 대자비의 눈으로는 저들을 다같이 불쌍히 보시고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신다. 지추치지 않는다. 부처님은 질식하실 때 평등하게 7가식을 가르치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잘 살고 잘 된 상류층 주변을 서성대는 종교라면 대다수의 서민층은 외면할 수밖에 없다. 대신(大臣)이나 귀족의 문지방을 멀리하라는 초기교단의 계율은 같은 뜻을 품고 있다. 못나서 가난하게 살아가는 서민층을 위하여 서민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서민층을 위하여 서민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대승보살이 나갈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재산에만 집착하여 사회의 안정과 균형을 깨고 있는 재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성복도 잊지 말아야 한다. 옛날 부처님은 밝고 맑은 지혜의 길을 가르치며 왕상(王相)들로 하여금 어진 정치를 펴게 하였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가나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했음을 상기해주기 바란다.

     5. 배워야 할 회향정신

  깊은 산속 승방(僧房)에서 참구(參究)의 길에 정진, 선승(禪僧)의 수행은 나무래려는 뜻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나>를 깨쳤다는 내면적 질적 전환이 어떻게 사회적 전환을 이르킬 수 있는가. 정진만 있지 회향(廻向)은 없는 것이 오늘의 불교가 아닌가 한다.
  회향은 위대한 깨침에 사회의 방향으로 전환시키는 폭포같은 <자비>가 있을 때 이루어진다. 인류와 사회에 대한 자비가 불같이 타오르지 않을 때 깨침은 오직 깨침으로 끝난다. 선서에 자비라는 낱말이 극히 적다는 사실에 유의하여 주기 바란다.
  부처님의 말씀은 법륜(法輪) 즉 법의 바퀴라고 한다. 바뮈는 항상 돌려 움직여야 하는 것처럼 부처님의 가르침도 항상 기능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법륜은 훌륭한 연주가나 훌륭한 가수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훌륭한 작곡악보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위대한 악보도 훌륭한 가수가 나타나 멋지게 불러주지 않는다면 만인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감동을 줄 수 없다. 오늘의 불교는 부처님의 위대한 말씀을 가장 훌륭하게 불러서 만인의 가슴을 감동케 하여주는 가수를 필요로 한다. 이 가수가 오늘의 대승보살이다. 나는 이 같은 멋진 가수가 이 불광회에서 나와 주기를 바라며 이 말씀을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