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법구도전기] 1. 위법망구의 표본 용명 스님

- 금산사金山寺와 진표율사眞表律師-

2009-06-22     관리자

    1. 금(金)판군의 침입
  때는 구한 말, 나라는 어수선하고 민심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일본, 청국, 러시아 등 열강들이 무서운 독수를 뻗쳐 우리 국토를 뒤흔들려 하였고 우리나라를 사이에 둔 저들의 암투와 각축은 절정에 다다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를 틈타 외국 여러 나라에서 여러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신비의 나라 한국 땅에 속속 찾다들었고 거기에는 지하자원에 관심을 가진 기술자들도 있었다. 이런 틈에서 우리나라 도처에는 금덩어리 찾아내기에 혈안이 된 군상들이 우리나라 도처를 해내면서 파헤치고 다녔다. 그중에도 금의 명산지로 알려진 전북 김제 금덩어리에 혈안이 된 사람들이 무수히 몰려들어 온통 금판으로 벌집을 이루고 있었다.
  그 무렵 일단의 금판 떼거리들이 금산사에 몰려들었다. 그리고 사찰도처를 파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금산사 도량지역에 품위 높은 금광맥이 뻗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금을 파내기 위하여 당시 무력하기 짝이 없던 사람이하의 존재였던 승려들은 안중에 없이 금을 찾아 마구 파들어 갔던 것이다.
  그것도 그럴 것이 오늘날도 널리 알려지고 있는 것처럼 금산사 동구 밖에 펼쳐져 있는 김제 평야는 유명한 사금(沙金)의 산지였다. 그리고 그 평원의 원류인 금산고을의 중심인 금산사에는 예부터 금송아지가 묻혀 있다는 전설마저 있는 터였다. 저들에게는 금산사가 오직 금송아지로만 보였던 모양이다. 그들은 그곳이 신라 이래에 한국불교 법상종 총본산이며 민족의 정신과 혼이 연원한 미륵신앙의 성지라는 것을 알 까닭이 없다.
『이곳은 부처님 도량이니 건드리면 안 됩니다. 여기를 파면 안 됩니다. 나가 주십시요』하는 스님들의 호소가 귀에 들릴 리 만무하다. 『이놈들, 무슨 말이 많느냐!』하고 호통치며 발로 걷어차고 주먹으로 후려치면 되는 것이고 완강히 저항하는 승려들에게는 몽둥이세례를 안겨서 흩어버리면 되는 것이었다.
  사중에서는 큰 난리를 만난 것이다. 백여 명의 대중이 저지에 나섰지만 모두가 얻어터져 상처를 입었을 뿐 도저히 금판패거리를 당해낼 수는 없었다. 그 사이에 관가에도 여러 차례 이 위기를 호소하였다. 천년의 역사적 고찰을 보호하고 모리배(謀利輩)들을 퇴거시켜 달라고 여러 차례 청원을 드렸다. 금산사 스님들의 여러 차례의 호소가 주효하여 마침내 현군이 동원되어 일단 금판패거리를 몰아낼 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 다음날 현군이 돌아가자 금판패거리들은 또 밀려왔다.

    2. 용명스님의 순교

  그때 금산사에는 정용명 스님이 주지였다. 불법 앞에 생명을 바치고 불법의 영광으로 자신의 생명의 영원을 믿었던 철저한 호법자였다. 대중스님들을 통솔하고 사중을 보위하여 그 어려운 사회적 상활 속에서 금산사의 도풍은 엄연하게 지켜왔던 것이다. 그런데 도량이 멸실하는 중대한 위기를 당한 것이다. 그런데 도량이 멸실하는 중대한 위기를 당한 것이다. 온갖 고난과 싸우며 백가지 계교를 쓰고 현군이 동원되어도 사찰을 지키기 어려운 것을 느끼자 그는 결연히 호법순교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리고서 대적광전 부처님 앞에 엎드려 말없이 마지막 하직을 고하였다. 그리고 법당을 물러서 나오니 금판 떼들은 막 법당 뜰에 모여들고 있었다. 그들은 손에 손에 몽둥이와 쇠망치를 들고 살기등등하여 어제의 보복을 하려는 듯 승려들을 찾아 달려가는 참이었다. 이를 본 용명스님은 『여봐라!』하고 고함을 질렀다. 그 소리를 도량을 흔들고 산에 메아리치고 하늘로 퍼져갔다. 순간 패거리들도 잠시 주춤하더니 이윽고 그들은 향하여 대라하려는 순간 곁에 있는 모리배가 쇠망치로 스님의 머리를 내려쳤다. 피는 하늘로 솟구쳐 올랐고 스님은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이를 멀리서 지켜보던 대중스님들은 일제히 고함을 지르며 질풍처럼 달려들었다. 그 소리가 얼마나 격렬하고 그 위세가 당당하였는지 모리배들은 겁에 질려 방망이를 내동댕이치고 달아나 버렸다. 대중들은 용명스님을 붙들고 『스님 스님!』하고 소리쳐 보았지만 대답은 없었다. 대중은 스님을 끌어안고 한 덩어리가 되어 울음의 바다가 되었다. 통곡소리가 온 산중을 울렸고 끝내는 용명스님을 따라 목숨 바쳐 이 도량을 지키리라는 순교호법의 호규로 바뀌어갔다. 그때부터 대중들은 결사적이었다. 단 한 사람의 금판꾼도 절 근처를 얼씬거리지 못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금산사 개산 이래 미증유의 재난은 극복되었던 것이다.
  지금 금산사 앞뜰 한 복판에 잣나무 한 그루는 세월을 잊은 듯 만년 청정하여 하늘에 치솟고 땅을 은은히 덮고 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 한 개의 크지 않은 반석이 조화를 이룬다. 이곳이 바로 용명스님이 순교한 곳이다.
  비록 몸은 이 도량에서 보이지 않아도 스님의 순교정신과 호법의 용기는 지금 이 도량에 숙연히 넘쳐흐르고 있는 것이다.

    3. 금산사와 호법전통

  금산사는 누구나 아는 바와 같이 신라 진표율사가 미륵신앙의 근본도량으로 개창한 대가람이다. 진표율사가 백제 불교와 신라 불교, 그리고 그를 이른 한국 불교에 끼친 불멸의 공업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금산사는 신라 혜공왕 2년에 창건되었고 고려 문종왕 때에 혜덕왕사에 의하여 크게 개창되었다. 임난 때 뇌묵(雷黙)선사가 2천명의 승군을 모아 왜적을 무질르는 한편 수군대장 이순신 장군을 도왔던 근거지이기도 하였고 환성지안(幼惺志安)선사가 대화엄경 법회를 열어 쓰러져 간 이조 불교를 다시 일으킨 역사적 도량이기도 하다.
  정용명 스님은 금산사 주지가 되면서 이러한 금산사의 전통을 지켜나갈 것을 가슴 깊이 새기고 있었다. 금산사 역대주지스님이나 대중스님이 그러하였듯이 용명스님은 개산조(開山祖) 진표율사의 순교적 구도정신을 계승할 것을 다시없는 영예로 삼았던 것이다. 진표율사의 순교구도정신은 이와 같이 오늘의 금산사에 넘쳐 있고 오늘의 한국불교에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4. 진표율사의 구법

  금산호법의 원류는 진표율사다. 여기에 간단히그 거룩한 구도행적을 적어 보기로 한다. 진표율사는 전주 만경현(萬頃懸), 대정리(大井里)에서 아버지 진내말(眞乃末) 어머니 보낭(寶娘)의 아들로 태어났다. 성은 정(井)씨, 때는 신라 효성왕 4년(서기 740년)이다. ,일성은 서기 762년>
  12세에 지금의 금산사 숭제(崇濟) 법사에게 나아가 출가하였다. 숭제법사는 율사의숙연을 미리 알고 공양자제비법(供養次第秩法) 1권과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 1권을 전하여 주면서 말하기를 『네가 이 계법을 전하고 미륵 지장 두 성인 앞에 지성으로 참회하고 그 계법을 받아서 세상에 전하도록 하라』하였다. 그때 묻기를 『얼마동안 이나 정진하여야 계를 얻게 됩니까?』하니 정성이 지극하면 불과 1년에 감응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을 듣고 율사는 전국을 두루 다니며 수행하였다. 그러다가 27세 때 쌀 두가마를 쪄서 말려 양식을 만들어 지금의 전북 부안(扶安)에 이르러서 변산(邊山) 부사의방(不思議房)에 들어가 용맹스러운 정진에 들어갔다. 먹는 것이란 마른 쌀 두 홉 마시는 것은 물 두 그릇 이러기를 3년 동안 미륵보살 앞에 참회하고 기도하였는데 그래도 이렇다할 감응을 얻지 못하였다. 율사는 크게 분발하여 『1년에도 얻을 도를 3년에도 못 얻으니 이것은 나의정성이 미치지 못함이라』하고 차라리 이 몸을 바꾸리라 하고 높은 절벽에서 몸을 내어 던졌다. 그때 문득 푸른 옷을 입은 동자가 나타나서 손으로 율사의 몸을 가볍게 받아 곁의 바위에 사뿐 놓았다. 율사는 다시 용기를 내었다. 3·7일을 기한하고 밤낮으로 정근을 쉬지 않았다. 그 돌에 엎드려 얼마를 예배하며 참회하였던지 기도한지 3일이 되니 팔꿈치와 두 무릎에서 피가 흐르고 살이 뭉게지고 힘줄이 드러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진하기를 7일 만에 지장보살을 뵙게 되었다. 지장보살은 6환장 지팡이를 짚고 다타나서 살이 터져 쉴새없이 피가 흐르는 팔다리를 만져주니 금방 피가 멎고 살이 원상태로 복구되어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가사와 발우를 내어 주신다. 율사는 크게 감격하여 지장보살 앞에 머리 조아려 예배하였는데 머리를 들었을 때 보살의 형상은 간데없었다. 이러한 감응을 얻고 율사는 더욱 용기백배하여 정진을 계속하여 3·7일이 되니 마침내 천안(天眼)이 열려서 도솔천에서 미륵보살과 지장보살이 대중에 둘러싸여 거동하시는 걸 보게 되었다. 두 성인은 율사 앞에 나타나시더니 율사의 이마를 만지며 말씀하셨다.
『장하다 대장부여 네가 제법을 구하기 위하여 신명을 돌보지 아니하고 지성으로 참회 하였구나』이어 제법을 일러주시고 미륵보살은 다시 두 개의 표찰(섬대(標札)처럼 된 것)을 내어 주셨다. 하나는 8을 표시하였고 하나는 9을 표시한 것이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9는 본래 깨달은 불종자를 표시한 것이고 8을 새로 닦아 나타나는 불종자를 뜻한 것이니 이 것으로 장래의 과보를 알 수 있을 것이다.』하고 상세히 가르쳐 주신다. 그리고 다시 수기하시기를 『너는 지금의 몸을 버린 뒤에 국왕의 몸을 받게 될 것이고 그 다음에는 도솔천에 태어나리라』하였다. 이 말씀을 듣고 엎드려 절하는 가운데 두 성인은 조용히 형상을 감추었다. 그날이 4월 27일이라고 한다.
  율사는 드디어 대법을 받고 대원을 성취하였다. 그에게는 도 하나의 일이 남겨져 있었다. 교법을 널리 펴서 널리 중생을 제도하는 일이다. 그래서 우선 출가의 옛 절인 금산숲을 찾아갔다. 변산에서 나서려 하니 무지개 서상이 비쳤는데 그것은 마치 다리모양이었다. 한쪽 끝은 변사이고 또 한 끝은 금산 숲이었다. 율사는 금산숲이야 말로 그곳으로 갔던 것이다.
  금산숲은 그때까지 자그마한 절이었다. 율사가 불사를 시작하니 제천선신이 도와서 사방에서 많은 모여와서 크게 신심을 발하니 큰 절이 불시에 이룩되었다. 때는 신라 대종 광덕 2년(서기 764)이다. 그때에 미륵불 장육상(丈六像)을 철로 조성하여 금당에 모시고 그 남쪽벽에는 미륵보살이 도솔천에서 하강하여 제법을 주시는 위의를 그렸다. 이렇게 하여 금산사에 계단을 쌓고 제법을 널리 전하며 또한 점찰선 악업보경에 의하여 크게 점찰법회를 열었다. 점찰법회는 사람이 선세에 지은 바 선·악간의 업보를 점쳐서 알게 하며 그에 따라 선을 권하고 악을 경계케 하여 사람마다 깊이 인과업보를 믿고 닦게 하는 법회다. 이것은 악업을 버리고 선업을 닦게 하는 것으로 한갓 개인을 구제할 뿐만 아니라 사회의 기풍을 바르게 하고 나라를 흥왕케 하는 근본적 교화운동이었으니 그 성과는 참으로 큰 것이었다.
  이 법은 영원불변의 대법이다. 인과를 믿고 선을 행하는 신념이 필경 세계의 무궁한 평화 번영을 이루는 것이다.
  필자도 외람되게 금산사 주지를 10년 맡았었다. 그 자리를 물러선 지금에도 노을의 금산사 스님들과 함께 저 진표율사와 용명화상의 구도호법의 원력을 우러러 받드는 마음은 변함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