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경이야기] 사경寫經의 역사

사경이야기

2009-06-22     김운학

   사경의 역사는 퍽 오래다. 경전의 성립의 시초로 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부처님의 교설이 나온 뒤 먼저 경전의 결집이 되었으나 이것은 구송(口誦)으로 결집이 되었기 때문에 이 때는 사경이 있을 수 없었고 이것이 약 3백년간 내려가다가 처음으로 문자화 될 때 비로써 사경은 시작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니 사경은 경전의 결집이 아닌 성전 성립과 동시에 시작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파리문 도사(島史)나 대사(大史)에 보면 기원전 39년부터 17년까지 재위한 밧타가-마니왕 시대에 처음으로 경전의 기록이 되었다고 하고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제3에 보면 카니시카왕이 협존자 등으로 하여금 비바사론(毘婆娑論)을 결집하고 이것을 뒤에 적동섭(赤銅鍱)에 새겼다는 기록 등이 있는 것으로 보면 아마 이 사경은 임 기원전 초에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사경은 부처님의 탄생지인 인도보다도 세일론 등을 중심한 서역 각지에서 많이 행해져 그 언어도 범어, 파리어, 호어(胡語)등으로 지역에 따라 달랐다. 그리고 그 지면도 달라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 등은 호엽(好葉)에 서사했다. 하고 지심범천소문경(持心梵天所問經) 제4와 보녀소문경(寶女所問經) 제4등에는 죽백(竹帛)에 서사했다 했으며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제75에는 엽지 대불정수능엄경(大佛頂首楞嚴經) 제7에는 선피 구엽지(具葉紙), 소백첩(素白疊)등으로 서사했다. 일반적으로 현존의 범어원전은 대개 구엽에 의해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경이 중국으로 전역해 오면서 한층 더 성하게 될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당연한 귀추라고 밖에 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당시의 경을 전하고 유포하기위해서는 이것을 기록화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여기에는 사경이 화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여기에는 사경이 필수적으로 따르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사경의 의의를 말하고 있는 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이나 반주삼매경 같은 것만 해도 후한 영제(灵帝)의 광화 2년 지루가참(支婁伽讖)에 의해서 역출되었으니 이것으로 보아도 중국에서 사경은 서력 2세기 이전에 이미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출삼장기모(出三藏紀某) 제2에 보면 후한 항제(恒帝) 때 축불삭(竺佛朔)이 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의 호본(胡本)을 가지고 중국에 왔고 다시 제7에 보면 주사행(朱士行)이 위(魏) 감로(甘露) 5년 간전국(干闐國)에 들어가 방광반야경(妨光般若經)의 범서 호본 90장 60만여 어(語)를 써왔다는 등 활발하게 사경들이 일찍부터 시작된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대개 전법 전수에 그 목적이 있었지만 이 전법 전수의 사경에는 신앙이 깊게 깔려 있기 때문에 사경의 의의와 역사는 역시 그 가운데서 찾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후 중요한 것을 몇 가지만 들어 보아도 유송(劉宋) 무제(武帝)는 스스로 계경(戒經)을 쓰고 남제(南齊) 고제(高帝)는 법화경을 썼으며, 경릉 문선왕(竟陵文宣王)는 대자유마경(大字維摩經)이하 17부, 71권을 쓰고 문선왕의 아들 파능왕(巴陵王)도 또한 법화경 10부, 20권을 썼으며 명제(明帝)도 일체경을 칙명으로 쓰게 한 것이다.
  더욱 양간(梁簡) 문제(文帝)는 친히 반야경 10부를 혈서로 썼으며 유혜비(劉慧斐)는 불경(佛經) 2천여 부를 썼고 진문제(陳文帝)는 일체경 12장을 문제(文帝)는 50장을 선제(宣帝)는 12장을 각각 칙명으로 쓰게 한 것이다. 그리고 북제의 효소제(孝昭帝)는 선황(先皇)을 위하여 일체경 12장을 합해서 3만 8천권을 쓰기도 하고 혜사(慧思)는 금자반야경(金字般若經)과 법화경 각 1부를 써 앞으로 미륵의 세상에 전해 달라고 원문(願文)과 함께 남기기도 한 것이다.
  수대(隋代)에 와서도 문제(文帝)는 칙명으로 416장 13만 2천86권을 쓰게 했고 당대에는 정관 5년 태조가 황후를 위하여 원내의 덕원사(德原寺)와 선계사(宣界寺)에서 장경을 서사했으며 동 9년 4월에는 다시 칙명으로 대통지사 지통(智通)과 비서랑 저수랑(禇遂良)등에게 원내에서 일체경을 서사케 한 것이다.
  그리하여 고종 용삭(龍朔)3년 정월에는 대경타사(大敬妥寺)에서 일체경을 쓰게 하고 인덕(麟德) 원년까지 도영(道英) 담수(曇邃)등에게 교열(校閱)을 보게 한 다음 드디어 구경론(舊經論) 741부 2천 7백 31권과 아울러 현장의 신역경론 75부 1천3백 35권을 합친 신역 합8백 16부 4천 66권을 써 장격각에 넣은 것이다.
  이때가 사경의 일대(一大)성황기라 볼 수 있다. 이때는 민간에도 사경이 크게 성했는데 이것은 선도 정토신앙 운동같이 데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당시 민간 신앙의 핵을 이루고 있었던 정토 신앙이 선도에 의해서 크게 성하고 있었던 때니만큼 이 선도의 사경행위가 일반 신앙에도 크게 영향을 주었지만 또 선도 자신 대중성 있는 사경을 신앙행위로 행했다는 것을 보아도 역시 이 사경이 민간화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선도는 정토원을 위해서 아미타경 10만여 권을 사경했다는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한 사실이다. 당대 이후 금은니경(金銀泥經)이 많이 나왔다는 사실들도 역시 이러한 사경의 신앙성의 깊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당말(唐末)이후 이 사경이 이 장경판의 개판과 함께 쇠약해져 간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활자문화의 대두와 함께 필연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사경의 역사를 우리나라로 돌려 볼 때도 역시 초기 불교의 전수유포(傳受流布) 과정에서 많은 사경들도 짐작해 볼 수 있지만 역시 우리의 역사상 크게 자랑할 수 있는 사경행위는 고려대장경 조판 불사를 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흔히 고려 팔만대장경이라 말하는 이 장경의 의의를 조판에만 두는 수가 많은데 그 이전에 그 조판이 한결같이 나오게 한 사경의 의의를 먼저 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즉 그 경판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 내용과 자체가 한결같이 정성스럽게 나오지 않으면 안 되는데 이것은 역시 이 사경에서 나오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현종시(1010) 거란병의 침입으로 왕이 나주까지 피난했을 때 오직 대장경의 조판으로 국난을 극복하기 위하여 문종까지의 약40년 간 1106부 5048권의 완성을 보아 거간을 물리치고 다시 고종 18년(1231) 몽고병의 쳐들어와 팔공산(八公山) 부인사(浮仁寺)에 봉한된 이 장경을 태워버려 다시 강화도에 간경도감을 두고 이후 16년간에 걸쳐 총1511부 6802권의 양조(兩雕) 장경을 완경한 호국의 신앙 속에 먼저 사경의 행위가 깊이 숨어 있음을 간파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다시 이의 중간시가라 보아질 수 있는 의천 대각 국사의 속장경 간행을 또한 넘겨 버릴 수 없을 것이다. 이때의 필자로 비성서(秘星書)의 남궁기(南宮記) 노영(魯榮)등과 사경원(寫經阮)의 유후수(柳候樹)등을 드는 것을 보아도 사경원의 사경생활들을 엿볼 수 있으며 이 사경원에서 쓴 금서화엄경(金書華嚴經) 3역본 180권을 의천은 완주(杬洲) 자은사(慈恩寺)에 보낸 일도 있는 것이다.
  다시 이조에 와서는 세조 6년으로부터 성종 3년까지의 약 11년간 존속했을 것으로 본 간경도감에서의 일들, 역시 사경이 따랐고 또 여러 불상이나 탑 속에서 많은 금자(金字)의 사경들이 쏟아져 나온 예들을 보아도 사경의 예는 얼마든지 있으며 그 자세한 것들을 들려면 한이 없다.
  그러니 사경의 역사는 곧 전초의 역사와 함께 인쇄술이 발달한 오늘에까지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음을 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