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저] 부부夫婦가 행복해지는 길

無 孔 笛

2009-06-22     경봉 스님

  [법좌에 올라 주장자를 세 번 치시고]

  今日 日暖風知
  山層層 水潺潺
  霞登曉日 雨過靑山
  頭頭毘盧 物物華嚴
  오늘 날은 따뜻하고 바람은 화한데
  산은 층층하고 물은 잔잔히 흘러간다.
  아침 안개는
  새벽 하늘에 올라가고
  비는 청산을 지나가니
  머리 머리에 비로자나불이요
  물물이 화장세계로다.

  우리가 이 사바세계를 무대로 잡고 연극 한바탕 잘해야 되는데 어떻게 해야 연극을 잘하느냐 하면 정신이 물질과 사람에 초월해야 된다. 우리인간이 물질에 안 걸리면 사람에 걸리고 사람에 안 걸리면 물질에 걸려 가지고 가슴이 답답하고 멀가 아프고 이렇게 사니 사나 마나 매 한가지다. 우리 사람이나. 나는 짐승이나 기는 짐승이나 모든 동물이 자기 업(業)대로 살게 되어 있는데 사람은 집을 짓지마는 짐승이 어디 집을 짓는냐? 집을 안 짓더라도 겨울이 되면 얼어 죽지 않게 준비를 가지고 있다. 개구리와 뱀은 겨울을 지낼 준비를 안 해도 땅 밑에 들어가서 호흡만 가지고 한 겨울을 살고 나온다.
  그러니 사람도 자기 업대로 살게 되어 있는데 자기가 잘못해 가지고 곤란을 당하고 걱정을 하지 한 생각 돌이키면 그만 근심 걱정이 없어지는 것이다.

  부처님 경계

  신선(神仙)의 약은 콩알만치만 먹어도 일체의 모든 병이 다 떨어져서 오래 살게 되는데 법문(法門)도 많이 하는 것이 법문이 아니라 다만 한 구절이라도 진리법문을 들으면 그만 업장이 어름 녹듯이 녹는다.
  조사(祖師) 스님한테 묻기를
『어떤 것이 부처님의 경계(境界)입니까?』 이렇게 물으니 조사스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非有非無) 있지 아니한 것도 취하지 아니하고 없지 아니한 것도 취하지 아니한다(不取非有非無).
  이와 같이 아는 자는 이 이름을 부처님의 경계라고 한다.
  그러니 만약 사람의 마음이 목석(木石)과 같아서 유지(有智)로서 아는 것을 취하지도 아니하고 무지(無智)로서 불심(佛心)을 알려고 하지 아니한다. 또 가히 유심(有心)으로서 법신(法身)을 알려고 하지 아니하고 또 가히 상(相)을 가지고 모든 소해(所解)를 알려고 하는 것이 다 망상(妄想) 분별(分別)이다.
  너의 종종해(種種解)가 가히 자심(自心)의 계교(計巧)요. 자심의 망상이다.
  그러니 제불지혜(諸佛智慧)는 가히 설(說)해 가지고 사람에게 보일 수도 없고 또한 감추고 숨길수도 없고 선정(禪定)으로서 측량할 수도 없다. 알음알이가 끊어지고 아는 것도 끊어진 것이 부처님의 경계다. 또한 가히 측량할 수도 없는 것이 이름이 불심(佛心)이다.
  만약 능히 불심을 이와 같이 믿는 (信)자는 또한 곳 무량항하사(無量恒河沙) 번뇌가 없어질 것이요, 만약 능히 심념(心念)을 두어 가지고 불혜(佛慧)를 생각하는 자는 도심(道心)이 날마다 장하게 커질 것이다.』
그러니 참선하는 사람은 화두(話頭)를 따져 가지고 알려고 하면 안 된다. 과학은 따져서 알려고 하지마는 참선하는 이 법은 따지면 념념(念念)히 멀어지기 때문에 따지는 것이 아니다.

  物과 人에 초월한 정신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능금은 40여종이 있고 세계적으로는 200여종의 능금이 있는데 「인도」나 「홍옥」을 여러분이 하나 먹고 먹은 사람한테 그 능금 맛이 어떠냐고 물으면 무엇이라고 말을 하느냐? 알기는 알지마는 설하기는 어려워서 자꾸 물으면 능금이 시큼하고 달큰하고 시원하고 맛있다. 이렇게 밖에 말을 못한다. 아무리 말을 하려고 해도 말이 안 되는 것을 말을 하니까 듣는 사람은 능금 맛이 그렇다고 듣고만 있지 어쩔 수 없다.
  그래서 신선불긍분명설(神仙不背明說), 설득분명소쇄인(說得分明笑殺人)이라.
신선의 도를 닦는 사람은 신선의 도를 분명히 설하지 않는다. 분명히 설하려고 하면 신선의 도를 아는 사람이 웃는다.
  여러분이 오늘 하루를 지내고 나서 내가 오늘 세끼 밥을 먹고 밥값을 과연 했느냐? 안 했느냐? 또 오늘 남에게 이익 되는 일을 했느냐? 손해를 보였느냐? 하는 것을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세상사람 중에 불교를 잘못 믿는 사람은 남이야 죽든지 말든지 돈만 벌면 된다고 해서 돈을 버는데 그렇게 남을 속이고 거짓말해서 번 돈을 자식에게 전하면 호열자균을 묻혀서 자식에게 전하는 것과 같고 그 돈이 나갈 때는 사람 상(傷)하고 집안 망(亡)치고 마가는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이 사바세계를 무대로 잡고 연극 한바탕 잘 해야 되는데 연극을 잘하려고 하면 물질과 사람에 초월한 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항상 먹고 입고 주(住)하는 의, 식, 주 삼건사(三件事)에 노예가 되어 가지고 다 일을 못하고 항상 우리 마음 가운데 쓸데없는 망상(妄想), 번뇌(煩惱), 진뇌심(塵惱心)이 속에 차 가지고 마음 쓰는 것이 비좁으니 이 망상, 번뇌, 진뇌심의 하찮은 마음을 비우면 본래 넓고 크고 맑고 청정한 그 자리가 들어난다.
  왜 더러운 마음을 꽉 채워 가지고 마음이 좁도록 할 필요가 어디 있느냐? 하찮은 마음만 비우면 그만 맑아지고 맑아지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통한다.

     부부가 행복해지는 길

  그리고 오늘은 부인네가 많이 왔는데 부인네는 집에서 비록 가장이 화가 나서 무엇이라고 하더라도 그만 「잘못했소. 다시는 안 그러지요」 그러면 일체 시비(是非)가 끊어지는데 부인네가 억세어 가지고 소리를 냅다 지르고 온 동네가 떠들썩하니 떠들고 또 이를 부드득 갈고 이런 사람은 가장이 일찍이 죽든지 자식이 없던지, 돈이 없던지 몸에 병이 있던지 그런 것이 하나씩 붙어 있다.
  그러니 부인네들은 어떻게 하든지 부드럽고 화하고 착하고 순해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이 부인네에게 한 말을 여러분에게 전하겠는데 부인네는 가장의 착한 것만 생각하지 하찮은 마음먹은 것은 생각하지도 말아라, 이랬다.
  가장이 부인네한테 과거에 잘 한 것은 다 잊어버리고 좀 지내 가다가 잘못하면 그것을 가슴에 착착 접어 두었다가 한달이나 두 달 후에 잘못한 것이 있으면 그 전에 잘못한 것을 첨부해 가지고 가장의 마음을 그만 뒤집어 놓는다.
  그러니 그것을 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또 남자한테는 무엇이라고 했는고 하니 부인을 업신여기거나 능멸하지 말고 경건한 마음으로 서로 대할 것이며 주기(珠琪)를 해주라고 했다.
  주기라고 하는 것은 우리나라로 말하면 보석 반지나 패물 받을 형편이 안 되는 부인네가 부처님이 그랬으니까 억지로 패물해내라고 가장한테 조르면 안 된다.
  그래서 하찮은 마음을 버리고 착한 마음을 내어서 서로 대해야 집안이 화(和)해 진다. 내가 늘 말하지마는 사람의 얼굴에는 눈이 가로 그어져 있고 코가 내리그어져 양쪽에 귀가 있어서 두 점이 찍혀 있고 입이 맨 밑에 가로 그어져 있어서 바를 정(正)자를 써 가지고 다니는데 마음은 삐딱하니 쓰고 있다.
  배를 타고 동으로 동으로 가기만 하면 이 지구가 둥굴기 때문에 떠난 그곳에 되돌아온다.

  一二三四五六七
  大方廣佛華嚴經
  일이삼사오육칠은
  대방광불화엄경이드라

  대방광불화엄경은 일곱자인데 우리 얼굴에 눈이 두개, 코구멍이 두개, 귀가 두개, 입까지 합하면 일곱 개로서 대방광불화엄경을 낯에 새겨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 화엄경의 이치가 천삼라지삼라(天森羅地森羅) 전부가 대방광불화엄경의 도리인 것이다.

  설법이 설법이
  般若婆羅密이 般若婆羅密이 아니라
  이 이름이 般若婆羅密이요
  今日 說法이 아니라
  이 이름이 說法이 法이로다.

  금강경에 보면 반야바라밀의 이치를 모두 설해 놓았는데 반야라고 하는 것은 지혜이고 바라밀은 생사에 건너가서 생사에 초월하는 그것을 바라밀이라고 하는데 금강경의 끝에 가서 반야바라밀이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이 이름이 반야바라밀이다. 이래서 이 이름뿐이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들의 성(姓)도 각성받이로서 김가, 박가, 이가... 온갖 성이 있는데 우리가 부모태중에서 나올 때 이마에 성을 써 붙이고 나왔느냐? 이름을 지어가지고 나왔느냐? 다만 윗대 조상 때부터 김가, 박가, 이가라는 성을 붙이고온 것으로써 이 몸에 대한 대명사에 불과한 것이지 실명(實名)이 아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모든 법을 설해 놓고 끝에 가서 반야바라밀이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이 이름이 반야바라밀이라. 다만 이름뿐이라고 했다. 또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설법을 하지마는 설법이 설법이 아니라 다만 이 이름이 설법이다.

  말소리 들리는 곳 멀다고 탄식마라.
  눈 옆에 귀가 있고 코 밑에 입이로다.
  그곳에 구름만 없으면 나의 주인공 면목을 알리라.

  사람의 주인공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 내 몸을 내 것이라고 애지중지하고 잘난 체 하지마는 자기가 자기를 모르고 있다. 또 온 곳을 아느냐? 가는 곳을 아느냐? 죽는 알도 모르고 질팡갈팡 없이 살면서 집안 어른이라고 큰 소리만 치고 있다.

  백발아 너 인간의 몇 사람을 그르치고 다시 또 강남쪽 녹차의 머리에 올라오느냐
  (白髮爾誤人間幾 更上江南綠次頭)

  또 한 법문이 있는데 이것은 말도 아니고 문자도 아니고 법문이다.
  [할(喝) 일활하고 하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