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부부의 황혼

이남덕 칼럼

2009-06-21     관리자
 

일석 선생님 댁에서


시골로 이사 오고부터 서울 나들이가 주말이면 주례 행사처럼 되어 버렸다. 일주일에 한번 정기법회에 나오는 것이 주목적이지만, 토요일 하룻밤을 묵으면서 무슨 행사나 누구 만나는 일들을 하게 된다. 지난 주말에는 은사이신 이희승(李熙昇) 선생님을 찾아뵙고 그 아드님 댁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일석 선생님께서 병신년(1896)생이시니, 금년에 92세의 고령이시다. 사모님은 그보다 한 살 위이신 93세시니 우리나라 역사에 갑오경장(甲午更張) 있던 다음해, 또 그 다음해에 나신 어른들이시다. 사모님은 오래 전부터 병석에 누우셔서 요즘은 계속 혼침상태에 계시나, 일석 선생님께서는 여전히 활동하시고 계시다. 특히 이번 여름에는 6~7년 전서부터 목(후두부)에 생겼던 종양수술을 하시고 났는데도 조금도 전과 다름이 없이 건강하시다. 첫 번째 수술은 1982년 봄에 내가 제주대학에 일 년 동안 갔다가 서울로 돌아오니 바로 혀 아랫부분을 수술하셨다고, 음식도 잘 못 잡수시고 말도 제대로 발음이 안 된다 하시며 약간 짜증스러워 하셨다. 그만한 연세에 음식을 못 잡수시면 기력이 쇠하실까 걱정되었으나 선생님의 정신력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라 이내 회복하셨다. 그때만 해도 사모님 기력이 있으셔서 이제 그만 말씀하시라고, 오랜만에 만난 제자더러 병환 말씀 하시는 선생님을 제지하셨는데 이제 사모님은 아무 것도 모르신다. 선생님의 이번 수술은 사모님 상태가 걱정되어 뒤로 미루시다가 상태가 소강을 보이셔서 결정하셨는데, 네 시간 반이나 걸리는 대수술이었다 한다. 수술하시기 전 수 일 동안 신변정리를 다하시고, 자손들에게 남기시는 유언장을 ‘내가 바라는 사항’ 이라고 쓰셔서 세밀히 지시하셨고, 마취에 깨어나서 첫 말씀이 “내가 아직 살아 있느냐?” 하셨다니, 돌아가실 것은 각오하셨던 것이며, 참으로 재생의 기쁨을 온가족이 가지셨던 것이다. 사모님만은 이 사실을 모르시고.


부부애의 측은지심


한 인간이 얼마를 살다가 끝난다는 사실은 누구나가 다 겪는 일인데도 또 누구나가 다 기가 막혀한다. 오늘 존재했다가 내일 존재하지 않는다는 일은 사실 기가 막힌 일이다. 더구나 살아있을 때는 기뻐도 하고 슬퍼도 하고 별별 생각을 다하게 하는 인간의 죽음은 그 당사자 자신만 기막힌 것이 아니라, 그를 아끼고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을 기막히게 하기에 충분하다.


어떻게 죽느냐 하는 것은 어떻게 사느냐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나는 이 몇 년 동안 일석 선생님 내외분의 노경을 지켜보며 전형적인 한국인의 삶의 방식이란 바로 이런 데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더욱이 노부부가 연세가 많도록 해로하실 때 서로 의지하고 측은히 생각하심이 젊었을 때보다 있는 것이 아닐까 추측되었다. 선생님께서는 그런 내색은 없으시나 사모님에 대한 강한 책임감은 가끔 엿볼 수가 있다. 몇 해 전서부터 사모님은 거동이 불편하시어 다른 이의 부축이 필요하게 되셨는데, 운동부족을 나무라시며 보행 연습을 권면하시는 말씀을 자주 하시었다.


한국의 노부부들은 흔히 상대방이 건강치 않은 경우 ‘저 양반이 먼저 가야지’, 또는 ‘저 사람이 나보다 먼저 가야지’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조금도 자기가 더 오래 살겠다는 뜻이 아니라, 건강한 자기가 지켜보는 가운데 상대방을 편안히 가게 해야겠다는 뜻으로 말함을 우리는 알고 있다. 지극한 사랑과 책임감의 표현이다. 풀잎의 아침이슬로 비유되는 인생의 무상함을,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의 애잔한 생명에서 실감하게 될 때, 그 사랑은 결코 젊은 날의 이성 사이의 애정이 아닌, 깊고도 간절한 감정이다. 그것은 동양의 측은지심(測隱之心)은 인지단(仁之端)이라 할 때의 생명애(生命愛)의 감정이지만, 그렇다고 인도주의나 인간애(人間愛)와 같이 박애성(博愛性)을 더 많이 띤 것은 아니니, 우리말로는 역시 사랑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벙어리 냉가슴 앓듯이


선생님은 동란 때 서대문 냉천동 댁에서 화재를 만나서 그 많은 장서와 함께 안경도 타 버렸는데, 그때 이후 이내 안경을 안 쓰시고 책을 보시어 지금도 안경 없이 밤에도 신문을 읽으실 만큼 눈이 밝으시다. 그 대신 귀가 어두우셔서 보청기를 끼셨는데 이 근래에는 점점 더 안 들리시기에 나는 가끔 필담으로 말씀 드리기도 한다.



그와 반대로 사모님께서는 눈이 어두우시고 그 대신 귀가 매우 밝으시다. 시각과 청각은 어느 한편이 약해지면 다른 한편의 감각은 강화되는 것인가 생각된다. 사모님은 누구보다도 먼저 대문 밖에 오신 선생님의 귀가를 알아차리셨다. 그리고 선생님 외출 중에라도 지금쯤 어디 계시더라는 짐작을 항상 하고 계시었으니 염려와 관심은 사모님의 생명의 근원에 자리 잡고 있다 할 것이다.


일석 선생님의 회갑 때 출판된 <벙어리 냉가슴> 수필집에 보면 선생님 열세 살 때 혼례를 올리셨고 한때는 사모님과 이혼까지도 생각했었다는 술회가 있다. 지금 생각하면 다 우스운 얘기지만, 당시 신학문을 한 청년들 사이에 ‘이혼 동맹’ 이라는 것까지 있어서 자기 의사가 아닌 동기에서 조혼(早婚)한 책임은 자기에게 없다는 양심(불양심?) 선언이 이루어졌었다는 데서 그들의 고뇌가 얼마나 절박한 것이었을까를 짐작할 수 있다. 좋아서 만나고 싫어지면 헤어지는 요즘 세태에서 보면 한국의 노부부는 참 알 수 없는 분들이라고 여겨질 것이다. 비록 얼마나 어려운 고비를 벙어리 냉가슴 앓듯 꿀꺽꿀꺽 참으며 살았을지는 아무도 모르되, 그 어려움 속에서 담담한 인품을 키우고 따뜻한 인간애를 나누며 백년해로 하시는 노부부의 모습에서 나는 인간의 성숙성을 실감하는 것이다.


욕심을 버린 참다운 생활


나는 한때 선생님 내외분께 부처님의 말씀을 어떻게 전해드릴 수 없을까 하였던 때도 있었다. 노경에 신앙생활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안심과 기쁨을 주는가를 말씀드리고 했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외람된 생각임을 알게 되었다. 세상에는 종교인을 자처하면서 종교인답지 않게 사는 사람이 있고, 그 반대로 종교인이 아니라 자처하면서 종교인다운 참다운 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다. 선생님의 경우가 바로 후자의 표본 같은 경우다.


철두철미 유교적 분위기 속에서 한평생을 살아오신 선생님의 생활은 지성(至誠) 하나로 일관된 느낌이다. 일찍이 기독교학교(이화여전)에도 몸담아 계셨지만 ‘조상 숭배'를 '우상 숭배’라 하는데는 도저히 동조할 수 없으셨다 한다. 선생님의 조상숭모(祖上崇慕)는 거의 종교적 차원에까지 이르신 것으로 보인다. 제사 참례 전에 목욕재계 하시고 참제에 엄숙하심이 옛날 우리 할머니들 치성 드리시던 것과 꼭 같으시다.


선생님께서 소위(자칭) 종교인 보다 더 종교적인 생활을 하시는 이유는 욕심을 일찍이 버리셨기 때문이다. 1942년 10월에 검거되어 전후 만 3년 동안 일제(日帝)의 폭리탄압으로 감옥살이를 하신 ‘조선어학회’ 사건은 선생님 인생관에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왔다고 하겠다. 경찰서와 형무소에서 겪으셨던 고문이나 학대를 통하여, 인간에 대한 절망감 같은 것이 얼마나 컸던지는 말씀하신 일이 없다. 다만 감방에서 읽을 수 있었던 종교서적이나 과학서적을 통해서 불교와 천문학에 관한 책을 탐독하셨다 한다. 광대무변한 우주 속에 한 점 먼지보다도 작은 지구 위에서 인간끼리 욕심을 부리고 싸우는 것이 참으로 무의미하게 느껴졌다는 말씀은 여러 번 해주셨다. 선생님께서 어려운 난세를 살으시며 고초는 받았을지언정 흠없이 명예롭게 살으실 수 있었던 것은 일찍이 욕심을 버리셨기 때문이며, 사모님께서 어려운 살림 열심히 사시느라 고생은 하셨지만, 선생님을 하늘같이 믿으셨기에 천수를 다하시도록 평안한 여생을 보내시는 것이다. 사모님은 의식이 없으시나 손을 잡아드리면 두 손으로 꼭 쥐신다. 아, 생명의 따뜻함이여! 존귀함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