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현상과 해탈

에세이 동불서불(東佛西佛)

2009-06-20     관리자

 

본래적 가치구현

오늘은 종교에 있어서 의식에 대하여 불교와 기독교를 비교할까 합니다. 나는 불교는 인간의 자주적 주체적 위상을 확립한 종교로 보고 있습니다. 여기서 자주적이란 말은 그 무엇에 지배되지 않는 절대적 가치를 말합니다. 자기 자신을 책임지고 모든 가치, 즉 재산이나 명예, 권력 기타 수단으로의 가치에 앞서 있는 본래적 가치구현을 말합니다. 그것이 곧 금강석과 같이 단단하고, 그것은 어떤 것에도 파괴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는 것에 나는 불교의 위대성을 인정합니다.

또한 주체적이란 말은 그 스스로 주인이라는 말입니다.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그 자리를 빼앗길 수 없는 자유인이라는 뜻입니다. 이때 자유란 물론 방종을 의미하지 않는 자율을 말합니다. 자연이나 신이나 기타 어떤 관념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주인공이란 뜻을 가늠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천상천하 유아독존(唯我獨尊)의 의미가 더욱 빛나게 됩니다.

불교의 성불은 이러한 자주·자존·주체를 들어낸 용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불성을 곧 바로 들어내기 위해선 몇가지 외형상 인간의 심리현상을 제거해야 합니다. 심리현상은 경험적인 것이고 역사적인 것이나. 결코 본성적인 선험성은 아닙니다. 경험적이기 때문에 환경, 사고, 지식, 체험들에 의해서 복합적으로 형성되는 것입니다. 먼저 이러한 외적 영향에서 생긴 어떤 고정된 관념을 제거하는 점진적 방법이 의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어떤 심리현상이 일어날 때 그 심미현상을 분석하여 그 인과로 해명하려 하는 논리적 습관에 젖어 있습니다만, 긍극적으로 아무리 논리적 적합성을 추구한다 해도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원인이든 그 원인을 원인의 최종관계로 종결하고 수용하지 못한다는 데서 알 수 있습니다. 이때 의식은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저쪽의 원인을 쉽게 마음 속에 용해해 줍니다.

 

불성의 무죄를 선언

우리는 때때로 종교적 의식은 하나의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서도 선가(禪家)에서도 의식을 크게 중요시하지 않는 듯하고, 기독교에서도 프로테스탄트가 의식을 중요시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불교의 의식은 수단이 아니고 그것 자체가 하나 목적이요, 종교적 구원의 단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미 말한 바과 같이 인간의 본성이 불성으로 청정할진데. 그것만 깨달아 알면 되지 복잡한 의식은 무엇이 소중하냐고 하는 분이 있겠읍니다만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심리현상의 바탕은 청정하고 일체가 포괄된 것이긴 하지만 심리현상이 그것을 가져서 본래 자주․주체인 주인공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심리현상을 제거하기 위해 의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의식이 진행되면서 진리자성을 가린 경험적 찌꺼기는 사라지고 의식 속에 곧 본래의 불성이 들어나기 때문에 수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불교적 의식을 너무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불공을 드린다든지 또는 49제를 올린다든지 이러한 행위를 모두 부정하고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라든지 또는 마음을 깨쳐야 한다든지 하는 말의 풍요 속에 참다운 불교는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진정한 불교는 의식을 소중히 하면서 다는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러한 이유로 심리학자 칼․G융의 종교와 심리학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증거로 제시하고자 합니다.

「프로테스탄트는 다만 신에게만 몸을 맡기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고해, 사죄 그 밖에 신의 작용에 의하여 죄가 없어질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자기 혼자 마음 속에 품고 소화시키지 않으면 안되고 그에 상응하는 의식이 없기 때문에 손에 넣을 수 있는 신의 은총에 대해서도 절대적인 확신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프로테스탄트의 양심이 민감하게 된 것도 이 사실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편안하지 못한 양심은 잠행성의 병과 동시에 불유쾌한 성질을 자지고 사람들을 불만상태로 이끌어 갑니다. 이 사실 때문에 프로테스탄트에는 가톨릭적인 사고방식으로서는 도저히 기대할 수 없을 정도에까지 죄를 의식하는 독자적인 기회가 주어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카톨릭의 경우에는 고해와 면제라는 제조가 항상 지나친 긴장을 풀어 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는 자기의 긴장을 자기가 처리하지 않으면 안되는데, 그것이 계속해서 그의 양심을 더욱 날카롭게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심리를 이해하는 데에는 자기 자신의 내면으로 향하여진 분석활동으로서의 자기 비판이 절대 불가결한 수단이 되고 있습니다. 이 자기 자신의 행동의 용기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편안치 못한 양심의 의한 책동과 거기에 상응하는 식별력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해서 비로소 자신의 행동이 어떤 동기에 의해서 지배되는가를 통찰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편안치 못한 양심이 지닌 가시는 이전에는 무의식이었던 여러 사실을 발견케하고…」라고 말하고 있는데서, 가톨릭의 고해성사의 의식이 필요성과 프로테스탄트의 양심의 자기 긴장에 의한 무의식의 체험을 논하고 있음을 봅니다.

불교에서의 의식은 사제에 의한 고해성사와 같은 것이 아니고, 모든 부처님을 청하고 그 부처님의 감신력을 빌어 모든 죄가 근원에 있어서 없음을 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불교는 모든 의식에 있어서 염불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 염불은 타자(他者)에 의한 구원이 아니라 본래부터 내가 구족하여 있는 불성의 무죄를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일심으로 청명함으로 나와 너의 대립에 의한 갈등이 무너지고 곧 나의 무아(無我)가 증명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프로테스탄트는 가톨릭의 전위적이고, 형식적인 의식에 반기를 들고 신의 직접체험을 가조하면서 새롭게 나타난 종교였습니다. 이들은 형식적인 의식으로서의 고해성사나 면죄는 양심을 속인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양심을 깊이 반성하여 최후에 직접 신과 대면하기를 요청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그 체험이 심리적 세계인 양심의 분석에 의한 체험이기 때문에 불교의 방법과는 조금은 다는 점이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무심(無心)을 요구합니다. 일체의 사량분별(思量分別)을 거부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 모든 분석적 방법을 추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 체험되는 세계를 인간의 본성으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불교의식의 해탈의 길

우리는 이제까지 불교의 의식과 카톨릭의 의식 그리고 프로테스탄트의 양심의 자기 긴장과 분석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어느 종교의 우열을 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의식이 종교에 있어서 중요하다는 사실이고, 물론 의식이 필요없는 인간의 자기발전이 성취된 시대에는 모르지만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의식을 통하여 자기 자신의 심혼을 정화한다면 그것 역시 인간사회에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불교는 양심의 분석을 통하여서는 우리 마음의 진면목을 알 수 없다고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분석을 계속하면 할수록 번뇌망상만을 성하게 할 뿐 진정한 마음의 본체인 청정을 체험할 수 없다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불교는 「말」의 불교적 측면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실천불교로 가기 위해서는 참다운 의식이 의미를 알고 그 의식을 지켜나갈 때 불교적 삶이 이루어지리라 생각합니다.

불교의 의식은 곧 해탈의 길입니다. 그 어느 시대에나 선(禪)을 중언으로 공부하는 선사들도 결코 의식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으며 오히려 의식을 더욱 중요하게 여겼음을 선사들의 행장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결코 형식적이 아닌 불교의식을 다시 부흥하기 위해 우리는 믿음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가를 반성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의식은 곧 부처님을 현실화시킨 작법입니다.

 

宋錫球

․동국대 불교대학 철학과 졸

․동국대학원 철학박사

․대만대학교 철학연구소 수학

․동국대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