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淨化)의 당위성과 과제

특별기획/당위성을 중심으로 본 한국불교 정화운동③

2009-06-18     관리자

 12월17일 청담스님은 선학원을 대표하여 50여명의 비구승들과 함께 교무원을 찾아갔다. 교무원은 지금의 조계종 총무원청사가 서있는 그자리에 함석으로 지붕을 덮은 목조건물이었다. 그날은 못시도 추웠으며 벌써 눈이와서 지면에는 눈이 덮여있고, 그것이 얼어서 얼음을 이루고 있었다. 교무원안에 있던 대처승들은 문을 안으로 걸어잠그고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였다. 그들은 술동이를 들여다놓고 술잔을 돌려가며 창밖 비구승들을 비웃고 있었다. 청담스님은 안으로 잠겨있는 문을 열고자 맨손으로 유리를 깼다. 소바닥이 갈라져서 선혈이 솟아났다. 그래도 안에서는 비웃고 욕설을 퍼붓기만  할 뿐이었다. 청담스님 일행은 눈위에 엎드려 눈물을 흘려가며 그들에게 호소했다. 잘못된 과거를 뉘우치고 대화에 응하라는 것이었다. 유혈이 낭자한 손바닥을 얼음위에 짚고 엎드린 청담스님과 그 일행을 대처승들의 가족과 고용된 청년들이 에워쌌다. 위협을 가하여 쫒아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눈위에 엎드린 비구승들은 4시간이 넘도록 그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부처님을 부르며 불법이 바로서게 해달라고 읍소로 기도했다. 비구승들이 밤이 되어 선학원으로 철수한 다음날, 12월18일 이 대통령은 제 4차 유시를 발표했다. "나라의 간우한 이 때에 민족통일이 긴요한데 사소한 파당적 이해관계로 분열하거나 투쟁하는 것을 피하고, 청정적멸한 도리를 숭상하여 평화롭게 해결하여야 할 것이다. 처첩을 둔 승들은 자기의 전과를 회개하고 돌아가서 도를 닦고 있든지 그렇지 않으면 퇴속해서 살든지 하여 우리나라 불교의 명예를 손상하지말게 하여야 할 것이다.

 대통령의 유시는 제 7차까지 발표되었는데 제 4차 유시가 발표되자 대처승들은 서둘러 호적상의 독신이 되기위한 이혼수속을 했다. 정화는 조금은 전진이 었었다. 평화적인 방법으로는 암자 하나도 내어주지 않을것으로 판단한 비구승들은, 12월 26일 마침내 조계사(당시 태고사)에 들어 않았다. 효봉, 동산, 청담, 대의스님과 비구니스님들이 조계사로 들어가 정령해 버렸다. 당시 주지 최원종스님은 비구승들이 입주하는 것을 알고 슬그머니 비껴버렸다. 그러나 외출했다 돌아온 전세봉이 강력히 반발하고 비구승들이 들어있는 방에 장작불을 피워 방이 뜨거워 견딜 수 없게 했다.  동산스님과 효봉스님은 이에 굴하지 않고, 별돌을 깔고 그위에 송판을 덮은뒤 다시 가마니를 덮고 들어앉아 꼼짝도 한했다. 육박전이 벌어지고 대처승들은 욕설을 퍼부어댔으나 비구승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이때, 동산스님과 효봉스님 그리고 청담스님은 이런말을 주고 받았다. "이왕 시작한 일이니, 공부를 한생동안 늦추는 한이 있더라도 후생을 위하여 거름이 됩시다." 1955년 2월 4일 비구. 대처 각 5인의 대표로 구성된 "불교정화대책위원회"가 문교부장관실에서 열려, 승려 8대 원칙을 정하였다.

 1. 독신 2. 지계 3. 불범사바라이(不犯四波羅夷) 4. 삭발염의 5. 수도 6. 3인 이상 단체생활 7. 불주육초(不酒肉草) 8. 비불구자(非不具者)가 그것이다. 8대원칙을 정한것은 승려자격의 원칙에 어긋나는 사람들을 사원으로부터 퇴거싴키자는데 합의했기 때문이다. 8대원칙이 양측의 합의에 의해 정해졌는데도 조금도 실현되지 않았다. 다음 달인 3월, 조계사 법당에서는 3백50명의 비구승이 이 원칙을 관철하기 위한 단식기도를 시작했다. 단식기도가 시작된지 4일째 되던날 새벽, 3백50여명의 대처승측 인원들이 몽둥이를 들고 담을 넘어 들어와 단식중인 비구승들을 습격하여 무차별 폭행했다. 몽둥이로 때려 실신하면 끌어내고, 들어다가 댓돌 밑으로 내던졌다. 법당의 안과 밖에는 유혈이 낭자하고 수십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출동한 경찰에 의해 습격자 60여명이 현장에서 연행되고 더러는 구속되었다. 이때 부상한 비구니 한사람은 선학원에서 치료하다가 끝내 사망했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5월9일 문교부장관과 내무부장관 공동명의의 공문이 교무원에 송달되었다. 그 공문의 요지는 이러했다. 1. 대통령의 유시를 받들어 8대원칙에 따라 정화할것. 2. 정화는 6월30일까지 완료할것. 3. 주지이외의 자도 8대원칙에 따라 처자를 거느린 자는 사찰에서 퇴거할것. 4. 7월 31일까지 문교부와 내무부에 명단을 각 2통씩 제출하고 주지 인허증을 받을것. 그렇게까지 했으나, 정화는 진전이 없어다. 8월1일 비구승은 전국 승려대회를 조계사에서 개최하고, 종명을 '대한불교조계종'으로 하고 종헌을 제정하였다. 그리고 종단의 기구를 구성하니 종정에 석우스님, 총무원장 청담스님, 조계사주지에 대의스님이었다.

 그러나 이 대회는 대처승측과 합의가 없었다는 이유로 9월 12일에 다시 소집되었다. 비구승이 비로소 종단의 주도권을 관장하게 되었다. 이때에 참석한 비구승이 1천1백18명이었다. 이 숫자는 한국의 비구승 전원을 가리키는 숫자였다. 당시의 치안국이 전국의 비구승을 전원 파악했었다. 1천1백여명의 비구승이 7천명의 대처승과 1천3백여개에 이르는 사원을 정화하는 불교정화는 이렇게 하여 전면적으로 확대되어 경향각지의 사찰에서는 20여년동안 사찰 인수과정에 지루한 분쟁이 벌어졌다. 1962년에 통합종단을 이루었다가 대처승측은 다시 이탈해 갔다. 비구승과 대처승은 융화되기 어려웠던 것이다. 1969년 대법원의 확정판결로 모든 본안소송이 비구승단의 승소로 종결될 때까지 300여건의 소송이 계속되었다. 정화를 통하여 비구승단이 회복되고 채처승단은 마침내 태고종으로 분종하였다.

 종화운동의 당위성과 우리의 과제

 정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불교의 교세는 타종교의 성장률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위축되었다. 이에 대한 원인은 봅합적이다. 우선 비구, 대처상이의 재판과정속에서 종단의 정재가 탕진되었던 사실을 들 수 있다. 특히 대처승측은 정화를 인위적으로 막으려는 의도에서 지가증권 즉 사찰 토지분배의 대금으로 설립했던 종단소속의 모든 기업들을 팔아 재판비용의 명목으로 또는 가족들의 생활비로 거의 사용하였다. 비구승측도 수도와 교화에 쓰여져야할 교단의 정재의 일부를 소송비로 낭비하였다 .

정화의 과정은 때로는 푝력을 사용했던 모습을 국민들에게 보여주었고, 그로 인하여 우리 종단은 국민들로부터 신망을 잃게 되었다. 이러한 주지권 다툼의 현상은 정화과정에서만 그치지 않고 하나의 만성적 병폐가 되어 대처승과의 분쟁이 끝난 이휴에도 비구승들끼리의 분쟁의 양상으로 연장되었다. 폭력을 사용하며 이권을 추구하려는 습성은 근래의 신흥사 살인사건, 부산 선암사 살상사건, 대흥사 분규, 봉은사 분규에서 잘 드러난다. 정화의 혼란속에서 일부 승려들의 기강이 흐트러졌고 그 여파는 많은 승려들에게 영향을 미쳐서 대처승 정화당시의 독신 승려가 지켜야 할 8대원칙을 다 지키지 못하는 승려가 일부 생기게 되었다. 대처승을 정화한 비구승단에 비구승의 첫째 원칙인 독신의 게율이 엄하게 서지못하고 '은처승'이라는 용어가만 정화이후의 비그승단 내에도 취재승(取財僧)과 특히 처자권속을 등장하게 되었다. 일부이기는 하지만 숨겨둔 승려들이 생겨난 것이다.

 정화가 모든 면세서 우리 교단을 바람직하게 이끌어 나왔다고 단정할 수만은 없다. 그러나 정화로 인하여 현재의 불교가 이정도의 수준으로 발전하였다고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도 있다. 대처승들의 관리하에 있던 모든 절들은 퇴락일로에 있었다. 그러나 비구승들에 의하여 운영되기 시작하자 이러한 절들은 짧은 시간내에 면모를 일신하기에 이른것이다. 비구승들은 쓰러져가는 가람을 보수신축하고 환경을 정비하였으며 사원내의 세속적인 요소들을 제거하였다. 두드러지게 드러난 정화의 결과는 사원의 정비였다고 보여진다.

 역경사업도  꾸준히 진행되어온 정화종단측의 중요사업이었다. 일제 36년동안 대처승들이 막대한 재산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하여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화이후 한글 역경사업을 진척시켜온 것이다. 정화는 부처님 제자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다. 1600년 역사의 비구승교단의 한국불교전통과 일제 36년동안에 타락한 대처승 제도와 비교할때 어느 것이 우리가 지키고 회복해야할 전통인가는 명백하다. 이러한 위상은 일본이외의 세계 모든 불교국에서 볼수있는 바와 같이 대처승제도가 아니라 비구승제도에 있다. 정화운동은 힘의 낭비와 다소의 희생이 불가피하였다할지라도 반드시 이루어야할 중요한 대작불사였음에 틀림없다.

 현재 한국불교의 혼란은 정화운동의 부산물이 아니고, 정화 이후 우릭단의 교육정책의 실패에 그 원인이 있다. 승려의 교육없이 승단의 발전과 중생교화의 전망을 기약할 수 없다. 일부인들은 승단의 분쟁과 승려들의 기강해이와 대중포교의 부진등 오늘의 부정적인 상황을 모두 정화의 부산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원인은 도제교육의 부진에 있으며 이는 사회의 다양한 요청에 부응하여야 한다는 대의를 소홀히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오늘의 제반 승려교육은 이상적인 도제교육의 개념에 부합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이제 알게되었다. 도제양성에 종단의 모든 역량을 집중하여야 한다. 정화이념에 부응하는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다양한 가치가 엄존하는 산업사회의 요청에 충실히 부응하여야 한다. 그것은 불교의 전통과 교리에 근거하고 현대화와 대중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이어야 하고, 이것은 종단의 여러면을 빠른 시일내에 쇄신시킬수 있을 것이다.

 정화가 일어난지 30년후인 오늘의 현실을 돌아볼때 아쉬운 점은 또 있다. 이는 지금의 승려들이 저와를 주도하였던 선배들에 비하여 정화이념과 지계정신을 소홀히하고 있다는 점이다. 승가는 화합을 본위로 하고 보살도의 실천을 통한 인간의 완성에 궁극의 아상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공존의 질서는 화합에 연결되고 청정은 신뢰의 반석이며, 지계는 신뢰와 화합의 완성을 위한 기초이다. 어떠한 말로도 지계와 청정과 정화이념에 역행되는 행동을 합리화할 수는 없다. 오늘 우리가 정화를 재조명하여 얻은 교훈은 승가가 청정해야 한다는 것과 자율과 자정능력을 가질만큼 건전해야한다는 사실이다.

조계종은 관권의 부당한 간섭과 때로는 정교유착을 통하여 드러난 여러 고질적인 병패를 극복하고 종단의 발전적인 미래를 가꾸기 위하여 서둘러 정화정신으로 돌아가 청정의 회복에 힘쓰고 신생 은처승을 정리해야할 것이다. 불교정화가 교단내의 자정에 철저히 바탕을 두지 못하고 불가피하게 관의 힘에 의존하였던 사실을 거울삼아 전도있는 불교로서 민족사의 증언자, 민족의 미래를 밝히는 향도자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는 종교단체로 발전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