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불교경전으로 본 의료(下)

2009-06-17     이정학

약제(藥劑)에 대해서는 「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비니모경(毘尼母經)」,「대지도론(大智度論)」,「마하승기율(摩何僧祈律)」,「대품(大品)」,「십송율(十誦律)」,「사분율(四分律)」,「선견율(先見律)」등에 기록되어 있다. 약과 병에 관한 경전기록은 지면의 기회가 있을 때 상세하게 논술하고자 한다. 이상 내과병에 대하여 그 치료법을 대충 살폈으며 다음은 외과치료를 살펴보고자 한다.

의학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수술이 까다로운 난도술(難刀術)을 실제로 행하여 성공한 싱예가 경전에 기록되어 있다.

병사왕의 대변 속에 피가 섞여 나오는 것을 보고 시녀들은 자신들의 월경과 같다고 하면서 웃었다. 기바(耆婆)는 문진(問診)을 끝내고 병의 본태(本態)를 파악하여 치료할수 있음을 확신했다. 기바는 왕을 철재로 된 목욕탕속에 앉히고 따뜻한 물을 머리에 부으면서 주문을 외웠다. 왕은 자는 듯이 전신마취 되어 수술을 다 마칠 때까지 자기를 수술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최면 중 전혀 수술을 의식하지 못했던 왕은 최면에서 깨어나 놀라며 기바에게 여러 가지 것을 물었다. 수술이 끝난 얼마 후 고질병이던 질루(疾瘻)가 깨끗이 나은 것을 안 왕은 더욱 놀랐다. 수술을 받을 때에 동통은 어떤 시대를 막론하고 참기 어려운 것이다. 참기 어려운 아픔을 어떻게 피하여 수술을 완료할 수 있을 것인가는 의사의 연구과제다. 알콜마취를 이용한 개두술(開頭術)이나 개복술(開腹術)은 세계 최초의 공적으로 길이 남을 것이다.

많은 의사들이 서양의학만을 중시하고 세계 최초의 대 위업에 눈을 돌리지 않는 것은 대단히 유감된 일이다.

사분율과 대품에는 왕사성(王舍城) 내에 장자 한 사람이 두통으로 고민을 하며 많은 의사를 찾아 다녔다. 어떤 의사는 7년 후에 두통으로 죽을 것이라고 말하고 어떤 의사는 7개월 후에, 어떤 의사는 1개월 후에, 어떤 의사는 7일 후에 죽는다고 하였다. 장자는 마지막으로 기바를 찾아가 치료를 부탁했다. 기바는 여러 가지로 장자에게 병상을 물어본 후

『내가 능히 너의 병을 고쳐 주겠다』고 하였다. 기바는 장자에게 소금과 신 음식을 먹여 갈증을 나게 한 후 술을 먹여 취하게 하였다. 취한 장자를 상에 눕히고 머리 가죽을 벗기고 두정골을 열어 병즙을 말끔히 제거하고, 골을 합치고, 가죽을 꿰메고 약을 바르고 난 후에 수술을 마쳤다. 기바는 술의 성질을 알고 주취를 이용하여 전신마취를 생각하였던 것이다. 세계최초의 무통 수술이 성공한 것이다.

장자의 어린아이가 대소변도 보지 못하고, 음식물도 먹지 못해 얼굴색이 황색으로 변하고 피부 겉으로 혈관이 튀어 나왔다. 기바는 이 상황을 보고 장폐색이라고 진단하고 즉시 개복술을 진행했다. 복중(腹中)의 장이 꼬여 있는 곳을 발견하여 원상대로 고치고 가른 배를 꿰매어 수술을 끝냈다. 이 수술을 할 때에는 병자를 묶고 개복수술을 했다고 한다. 병자가 이미 가사(假死)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마취법을 실시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장폐색을 조기 진단하여 수술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외과기능과 설비가 필요한 것은 누구나 다 잘 아는 사실이다. 2천년 전 이와 같은 수술이 있었던 일은 세계 의학사상에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일이다. 불교에는 석존시대부터 현대인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위대한 예방의학과 의료가 전개되었다. 오늘에 사는 우리들은 다시한번 그 위업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 위업을 계승·발전시켜 이 시대의 이 땅위에 꽃 피워야 할 무거운 책무를 마음 속 깊이 느낀다. 하루 속히 석존의 위업을 꽃 피울 수 있는 불교종합병원과 불교보건의료연구소가 설립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불교종립대학에 의과대학이 설립되어 불교인의 의사와 간호부가 배출되고 보건부, 물리요법사, X선기사, 의료복지종사자 등이 많이 탄생되어 기능적 사회발전에 대응하여야 하겠다.

병원마다, 보건소마다, 기능회복 센터마다, 유치원마다, 양로원마다 불교경전이 놓여 모든 중생이 부처님의 자비를 깨달을 수 있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