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과 장애의 의미

* 직장인의 불교신앙

2009-06-17     관리자

 있어야 할 인생 방정식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노력의 성과가 그대로 실현되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기대하는 [ 인생 방정식(人生方程式)]은 다음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성과(成果) = 능력(能力) + 노력(努力) + 성실성(誠實性)

 이러한 등식(等式)이 성립되면 그것을 당연하다고 받아들이고 이러한 등식에 이상이 생기면 불평과 불만으로 한숨 짓는다.

 러한 방정식의 근거는 [심은 씨는 꼭 거둔다]는 믿음인 것이다. 그리고 이 믿음은 진실 그대로이다.

 결코 심지 아니한 씨를 거두는 법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불교에서, [인과(因果)는 역연(歷然)하다고 가르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보는 현실 세계는 어떠한가? 능력있고 성실한 사람이 꼭 성공하고 부도덕한 삶을 사는 사람이 반드시 그 과보(果報)를 받고 있는가?

 누가 보더라도 크게 성공해서 세상에 큰 이익을 줄 것이라고 기대되는 사람이, 하는 일마다 실패해서, 보는 이들이 동정을 금할 수 없을 경우가 있는가 하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불성실한 사람이 재산과 세력을 크게 얻어 교만스럽게 살아가는 것을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지 아니한가?

 [인과의 역연]하다면 이러한 현상은 어떻게 나타났다는 말인가?

 

 삼세(三世)를 일관하는 인과법칙

 러나 우리는 인과가 역연하다는 불조(佛祖)의 가르침을 의심해서는 안된다. [심은 씨는 꼭 거둔다]는 인과 법칙은 영원 불변의 철칙인 것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경우에도 이 법칙에 어긋나는 일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석은 이 법칙을 근거로 해서 만 내려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인과경(因果經)의 다음 말씀에 대하여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전생일이 궁금한가? <欲知前生事>

 금생에 받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今生受者是>

 내생(來生)일이 알고 싶은가? < 欲知來生事>

 금생에 하고 있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今生作者是>

 다시 말하면 인생의 불변의 철칙인 인과의 법칙은 [금생(今生)]이라고 하는 단막극에서 만 적용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과거생(過去生, 前生)과 금생과 미래생(未來生)을 통해서 일관하여 절대적으로 적용되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영원 생명의 법칙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금생의 이 육신(肉身)에 한정되어 있는 일회적(一回的)인 성격의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우리의 참 생명은 이 육신 이전부터 있어 왔고 이 육신 소멸 이후에도 있을 영원생명이다. 육신 이전이 [전생]이고 육신 이후가 [내생] 인것은 모두가 잘 알고 있다.

 이러한 [전생]과 [금생]과 [내생]의 상관관계가 곧 인과 법칙이다. 그러므로 [현재]라는 이 시점은 영원한 과거를 기준으로 할 때에는 [ 거두어 들이는] 현장이면서, 영원한 미래를 향해서는 [ 씨뿌리는] 현장 노릇을 하는 양면적 성격을 띄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삼생(三生)을 일관하는 법칙이 인과 법칙이다.

 지금 심은 씨가 가까운 미래에 그 열매를 맺을 수도 있다. 마치 봄에 씨앗 뿌린 콩이나 팥이 그 해 가을에 그 열매를 거두게 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심어 놓은 씨가 땅에 묻힌채로  해를 넘기고 다음 해에나 그 열매를 맺는 보리의 경우도 우리는 알고 있다.

 그 뿐 아니라 씨를 심어 놓고 6년이나 7년을 지나서야 수확하게 되는 인삼과 같은 예도 우리는 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한 번 심은 씨는 꼭 거두게 되지만, 그 거두게 되는 시기는 일정하지가 않다.

 그러나 심은 일이 없는 씨가 열매를 맺는 법은 결코 있을 수 없다.

 봄에 심어 가을에 거두는 것은 금생에 노력한 것이 그대로 금생에 성과를 나타내는 것과 같다. 가을에 심어 이듬 해 봄에 거두는 것은 전생에 한 노력의 대가를 금생에 받는 것과 같다. 씨 뿌리고  6~7년이 지나서야 거두는 것은 먼 과거생에 심은 노력의 성과를 금생에 거두는 것과 같은 것이다.

 좋게 나타났건, 나쁘게 나타났건, 나타난 현상은 모두가 내 책임하에 심은 씨의 수확인 것이다. 이것이 삼세일관의 인생관이다.

 남 때문에 안되는 것이 없기 때문에 남을 미워할 수가 없는 것이며, 남들이 거두고 있는 영광된 성과는 그것이 그이 자신이 심은 결과이기 때문에 시기하거나 질투하거나 미워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달마대사의 가르침 <보원행(報怨行)>

 달마스님은 이 문제에 대하여 [보원행(원망스러움을 갚아 가는 삶)]이라고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계시다.

 불법을 공부하는 사람은 아무리 괴로움을 당하더라도 남을 원망하지말고 언제나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지난 무수겁 중에 생사의 물결속에 윤회하면서 근본을 버리고 지말(枝末)을 따라 무수한 원한과 미움을 쌓았으리라.

 남의 뜻을 어겨 피해를 준 일도 무한 하리라. 지금은 내 잘못이 아니라 하더라도 이것은 숙세(宿世)에 내가 지은 악업의 열매가 익은 것일뿐, 하늘이나 사람들이 나에게 주고 있는 일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괴로움을 달게 받아 누구도 원망하지 말아야 한다. 경에 말씀하시기를 [ 봉고불우(逢苦不憂) 즉 괴로움을 당해서 걱정하지 말라. 왜냐하면 마음이 넓기 때문이니라.]고 하셨으니 [이런 마음이 날때에 진리와 더불어 맞아 들게 되니 원수와 원망과 미움 등이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닫게 되어 진리를 닦아 가게 될 때, 이것을 보원행 즉 원망스러움 없는 삶이라고 하느니라.]

 이 가르침에 의지해 보면 우리가 당하는 괴로움은 모두 나의 전생에서의 악업이 그 원인일 뿐 결코 나 아닌 남들의 소행(所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에 지은 악업이 소멸되어지는 현장이므로 그 괴로움으로 원망을 사기는 커녕 도리어 이를 달게 받아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봉고불우(逢苦不憂)와 감사

 우리는 괴로움을 당하면 크게 당황해서 근심과 걱정으로 지새운다. 그러나 인과의 법칙을 아는 사람은 이렇게 생각한다.

 [심은 씨는 꼭 열매를 맺는다고 하였으니 나의 과거 생활이 지극히 나쁜 것이어서 그 때에 심은 나쁜씨가 오늘 나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라면 이 때를 당해서 근심하거나 걱정할 일이 아니라 이것을 달게 받아 지난날의 업장을 소멸해 버려야 하는 것이다.

 나에게 괴로움을 주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 사람은 사실은 나의 원수가 아니라 나의 업장을 없애주는 고마운 분이로구나. 나에게서 미움을 살 것을 무릅쓰고 나의 업장을 소멸시켜 주는 저 분은 불보살의 화현이구나. 부처님의 자비가 이와 같이 나타나서 나의 업장을 소멸해 주시는구나.] 이렇게 생각할 때 억울하고 분하고 원망스러웠던 어두운 마음에는 광명이 솟아나게 될 것이다.

 인욕 바라밀 

 과거의 업장을 소멸한다는 것은 과거를 기준으로 하는 말이고 다시 이것을 미래를 향한 창조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우리 불자들의 수행 덕목 중에는 인욕 바라밀 곧 [참는 바라밀행]이 있다. 어려운 일도 참고 모욕도 참는 것이다. 참되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수행으로 알고 기쁘게 감사하며 참아야 한다.

 그런데 이 [참는 수행]은 누군가가 나를 괴롭힐 때에 비로소 할 수 있는 것이다. 괴롭힘을 당하지 않으면 [인욕 바라밀]의 수행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인욕바라밀의 수행이 없으면 우리의 수행은 성숙될 수 없다. 그렇다면 나에게 이제 나타난 이 괴로움이란 무엇일까? 앞에서 본대로 과거의 업장을 소멸시킨다는 소극적 의미밖에 없을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이것이 바로 나의 영원한 미래를 위한 절대 가치의 창조의 현장이다. 인욕바라밀 수행의 도장이 바로 이 괴로움의 현장인 것이다. 괴로움을 달게 받을 뿐 아니라 그 사람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일어나야 한다.

 직장에는 여러가지의 괴로움이 있게 마련이다. 특히 계급의 승진, 상여금 지급과  공로 인정 등 모두 남들과의 경쟁속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일이 [인생방정식]에 맞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것은 불자가 아니다.

 직장의 불자는 자기의 삶에 나타나는 모든 경험 현실을 수행의 현장으로 승화시킨다. 불공평한 인사(人事)처리나 공로평정(評定)등을 당하더라도 그 자리가 바로 바라밀 수행의 도장인 줄 알고 기쁘게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

 고난과 장애는 결코 저주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