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치 병(難治病)-잘못된 인습

*운학산 한화()[5]

2009-06-16     관리자

누구나 한가지의 병폐는 가지고 있어……

우리에게 또 하나의 난치병이 있다면 그것은 잘못된 인습일 것이다. 번연히 잘못인 줄 알면서도 차츰 차츰 끌려들고, 그러다가는 잘못된 줄도 모르는 채 굳어져 버리는 그러한 습성은 참으로 고치기 어려운 것이다.
예를 들면 심심풀이로 홀짝홀짝 마셔보던 술이 마침내는 자신이 주정뱅이라는 불명예스런 낙인을 찍히게 만들었을 때 좀체로 그 낙인을 벗어나기란 어려울 뿐만아니라 오히려 잘했다고 큰소리를 치는 경우 같은 것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런 잘못된 습성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나 누구나가 거의 한가지씩의 병폐는 가지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중국 임제(臨濟)선사의 문하에는 흥화존장(興化存獎)이라는 분이 계셨는데 매우 활발한 선풍(禪風)을 드날리던 어른이었다.
그 어른께 어떤 납자(衲子)가 묻기를 “부처님께서 다자탑(多子塔)앞에서 가섭존자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하였다.
이에 흥화는 “한 사람이 거짓을 전하니 만 사람이 진실로 전한다.<一人傳虛萬人傳實>”하였다.
흔히 볼 수 있는 사례로서 이런 경우를 부화뇌동(附和雷同)이라 하여 그 말씀이나 사실의 진부를 알아볼 생각은 않고 그저 따라가는 작태를 이르는 말이다.
다 아는 바와 같이, 부처님은 3차례에 걸쳐 마음을 전하셨다고 하는데 첫째는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보이심<靈山會上擧拈花>, 둘째는 다자탑 앞에서 자리를 나누어 앉으심<多子塔前分半孔>, 셋째는 곽 속에서 두 발끝을 내보이심<娑羅樹下示離趺>이다.
여기서 거론한 것은 둘째의 것에 해당함은 물론인데, 이때 어떤 내용을 주고 받았겠느냐는 것이 그 납자의 물음이었다.
그런데 그에 대답으로서 한 사람이 거짓을 퍼뜨렸는데 많은 사람은 죽어라 하고 진실이라 여기면서 퍼뜨린다는 것이다.


이 한 토막의 답변은 액면대로만 따진다면 부처님이 거짓말을 퍼뜨리니 가섭 이후의 많은 사람들은 그것에 무슨 진실이 있는 양 전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그 뜻을 알아야 된다고 와글와글 아우성이고, 그러는 동안에 자신은 바로 알았는데 아무개는 잘못알았느니…어떠어떠한 방법이 이 도리를 알기에 편의하다느니…한다.
그래서 인간이 본래 갖추고 있던 불성의 세계를 잊어버리고 자신을 못난이로 자처하게 만드는 병폐까지 생기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선문(禪門)에서는 이런 형태를 가끔 존귀두각(尊貴頭角, 높은체하는 병폐) 감수하열(甘受河劣, 못난체)이라 하여 자칫 속기 쉬운 함정으로 경고하는 것을 잊지 않고 있다.
사실 똑똑한 사람에게 실수가 더 크다는 사례를 더 많이 보아 온 우리이기에 어렴풋이 짐작이 갈 법도 하기는 한 일이다.
내가 알았노라, 내가 잘하노라 하는 사람일수록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큼직한 문제거리를 남겨놓는 경우가 허다하니 말이다.
부처님과 가섭존자 사이에 언어와 형식을 초월한 밀전(密傳)의 법이 없으란 법은 없으나 그것을 나름대로 짐작하여 이럴 것이다, 저럴 것이다, 하고 주석을 내리려는 심사에 쐐기를 박으신 것이라고 보아야할 것이다.

이러한 병폐는 교가(敎家)에서도 경고한 예가 한두번이 아니니 예를 들자면 원각경 금강장보살장(圓覺經金剛菩薩章)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윤회의 소견으로 여래의 적멸의 바다에 들려하면 끝내 이르르지 못할 것이다.”
내 마음 속에는 윤회의 씨앗이 그대로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래의 적멸의 바다에 들려고 한다면 끝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윤회의 마음이 진짜 쉬지 못한 상태에서는 설사 적멸의 바다를 운운한다하여도 그것마저 윤회의 마음을 더하는 결과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른바 잘못으로 잘못에 더하는 격이다. 이와같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저질러지고 있는 잘못된 인습은 최고의 진리를 배우는 과정에서부터 인습, 생활, 각 분야에 걸쳐 실로 방대한 것이다. 이와 같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저질러지고 있는 잘못된 인습은 최고의 진리를 배우는 광정에서부터 인습, 생활, 각 분야에 걸쳐 실로 방대한 것이다.

잘못으로 잘못에 더하는 격

우리의 의식에는 또 이런 잘못들이 있다. 가령 제사를 지내는데 메를 올리고는 반드시 수저를 걸어 시접을 구른다던가 숭늉을 만다.
그것이 일반 세속의 제사법과 비슷하여 통용이 무난해서 좋기는 하나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잘못된 줄도 모르고 지내는 한 단면이라 하겠다.


경전에는 6도 중생의 음식먹는 형태를 4가지로 소개하였으니, 인간이나 축생은 덩어리로 먹고<段食>, 귀신은 몸으로 부딪쳐서 먹고<觸食>, 아래 하늘무리는 생각으로 먹고<思食>,윗하늘 무리는 마음으로 먹는다.<識食>고 하였다.
여기에 소개한 4가지 음식법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인간이나 축생은 무엇인가의 덩어리가 목구멍을 통해서 넘어가야 그것이 소화가 되면서 영양도 섭취하고 뱃구레도 채워서 힘을 쓴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짐승들은 그냥 입으로 핥아먹기도 하고 쪼아먹기도 하거니와 고등동물인 인간들은 수저라는 도구를 사용해서 점잖게 입으로 떠넣는 것이다.
그러나 귀신들은 그것이 지옥이던 아귀 또는 아수라이건 몸으로 부딪쳐서 영양을 섭취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운감한다는 낱말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음식의 기운만을 쏘인다는 뜻이기도 하거니와 사실은 코로 쏘이는 것이 아니라 발로 짓밟고 몸으로 비빈다는 것이다.
나는 요즘 TV에서 어느 화장품 선전하는 장면을 잠깐 본 적이 있는데, 피부에다 영양을 준다는 소리를 들었다. 마치 그런 예라고나 할까? 목구멍을 통하지 않고 온몸으로 영양을 섭취하는 것이다.
그러니 옛날에는 제사지내는 음식을 요즘처럼 많이 차리는 것이 아니라 소줏잔만한 그릇에다 조금씩 담아서 올렸고 그렇게 올렸던 음식은 절대 사람은 먹지 않고 모두 시식돌에 버렸었다.
그런데 요즘은 많이 차림은 물론 수저를 갖추고 때로는 동참제사라 하여 커다란 밥그릇에다 남산만치 밥을 담아 놓고 거기에다수저를 있는대로 갖다 꽂아서 마치 성난 고슴도치 같은 꼴을 만들어 놓으니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고 하겠다.


예부터 사람들의 논법상 자신이 한 말과 모순되는 상태를 자어상위(自語相違)라 하고 자신의 종교에 위배되는 언행을 자교상위(自敎相違)라 하며 말로도 치지 않을 대상으로 여겼었다.
가령 “우리엄마는 숫처녀다.”한다면 “숫처녀가 어떻게 너를 낳았겠느냐?”하는 반문을 받게 된다.
그와 같이 부처님 말씀에 귀신은 수저가 없이도 음식을 먹는다고 하였다. 그러니 귀신에게 제사지내면서 수저를 쓴다면 역시 자체 모순인 것이다.

사식(思食)과 식식(識食)

이왕 이야기가 나왔으니 사식(思食)과 식식(識食)에 관해 좀더 이야기를 하고 넘어갈까 한다. 사식이란 아랫하늘, 즉 욕계와 색계의 하늘의 음식법을 가르키는데 그들에게는 몸이 있다.
그러나 욕심은 적거나 아주 없어서 먹는 일에 대해 지금의 우리처럼 음식을 보면 악착같이 더먹겠다는 생각도 없고 설사 음식이 없다고 해서 예축할 생각이나 남의 것을 훔쳐먹을 생각은 전혀 없다고 한다.
그런 마음씨의 과보로서 그 세계에는 무엇인가 먹고 싶구나 하면 그 음식이 어디로부터인가 날아와서 먹게 되고 먹기를 마치면 또 사라진다고 한다. 그들이 무엇을 어떻게 먹는다는 것은 내가 미처 모르거니와 요즘 절마다 공양주, 채공 걱정이 태산같은데 신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떻든 생각하는대로 음식이 이르른다는 것이 특징으로서 먹는 것 뿐 아니라 뒤가 보고싶어도 그 자리에서 땅이 갈라지고 볼일이 끝나면 다시 깨끗하게 합해지고…더욱 신기하고 신나는 동네인 것만 같다.

다음 식식(識食)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이는 흔히 잘못 알기 쉬운 대목이어서 만난김에 곁들여 두거니와 이는 잘못 알면 식, 즉 심식(心識)으로 무엇을 먹는다고 착각하기 쉬운데 그런게 아니다. 정확한 풀이를 하자면 식(識), 그 자체가 음식이 되어 생명을 지탱한다는 뜻이다. 윗하늘 즉, 무색계의 경우인데 거기에는 말 그대로 색이 없다. 육신은 없고 오직 심식만이 가서 태어나니 심식이 없는데 무엇을 먹겠는가?
그러니 심식이 있어 존재하는 그 자체가 생명을 유지하는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요즘 흔히 말하는 정신력으로 지탱한다는 경우가 이에 해당하리라 생각한다.

어떻든 오늘의 주제는 잘못알고 있는 지식, 습관등을 조명하려는데 있으므로 이쯤에서 멈추고 다음은 상식에 관한 문제 하나를 이야기할까 한다. 그 상식이란 것은 다름이 아니라 불기에 관한 일이다. 지금 바야흐로 불기 2529년도 부처님 오신 날 봉축행사가 있었다. 그런데 왕왕이 제 2529회 부처님 오신날 운운하는 것을 볼 때 아찔하기까지 한다.
아시는 바와 같이 지금 사용하는 불기는 1956년도에 세계의 불교대표가 세일론에 모여 그 해를 부처님 입멸하신지 2500년으로 공인할 것과 아울러 불기는 세계의 모든 불교국이 이 부처님 입멸로 통용할 것을 결의하므로서 시작된 것이다.
그러니 부처님의 생신을 말하자면 여기에다 의당 80세를 가산한 수치여야 하는데 때로는 종단의 공식기구에서 나오는 발표문이나 심지어는 방송, 신문 등에서도 그렇게 발표되는 사례가 있으니 딱한 일이다. 더구나 가슴아픈 일은 일부 스님이나 신도들까지도 제 2529회 부처님 오신 날 운운하는 것을 보면 이에 대한 홍보가 없었던 우리의 현실을 탓해야 할지 아니면 남들이 하니까 나도 따라서 해야겠다는 추종심리를 탓해야할지 어리둥절해진다. 마땅한 쇄신이 요구되지 않나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