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寺의 향기] 칠현산(七賢山) 칠장사(七長寺)

고사의 향기

2007-05-22     관리자

짙푸른 생명의활기가 온 천지를 수 놓은 칠월의 산하(山河). 낮 내리쬐는 짜증스런 뜨거움은 찾아가는 가람의 미풍(微風)이 먼저 달려나와 이내 그 기운을 반감시켜 놓는다.

  안성(安城)에서 장호원쪽으로 사십여리의 죽산(竹山)에서 다시 남(南)으로 진천행 길을 시오리 가면 두교리(斗橋里). 이 두교리의 서쪽에 솟은 칠현산을 마주보고 십리쯤 오르면 칠장사가 잔잔한 여름의 향취로 반긴다.

  차령산맥의 여백이 이어져 평탄한 지형을 이루고 농토가 기름진 칠장사가 자리한 안성은 고구려의 내혜홀(柰兮惚)로서 신라 경덕왕 때는 백성군(白城郡)이라 불리었다.

  지금의 이름 안성은 고려 초부터 불리어진 것이며 최부(崔府)는 그의 시에 "산은 동북쪽을 막아서 저절로 성이 되었고 지역은 서남으로 트이었는데 기름진 들판이 질펀하다"라고, 함부림(咸傅霖)은 "열 집 풍경은 무성과 같은데 남쪽 들은 기름지고 사방 산 편평하다. 사군(使君)이 현가(弦歌)로써 다스리는데 고을에는 멸명(滅明) 같은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라고 안성의 풍토와 백성의 성품을 이야기 하였다.

  깔끔하게 포장된 산길을 따라 걷다보면 오른편 그늘에 친근한 석색(石色)의 부도가 산속의 정적을 잠시 깨우듯 꿋꿋한 기상을 내품으며 칠장사를 인도한다.

  7세기 중엽에 개기(開基)되어 고려 현종(顯宗) 5년(1014)에 혜소국사(慧炤國師) 정현스님이 크게 중수 하였다는 칠장사의 칠현산은 원래 아미산(峨嵋山)이라고 이름하였다 한다.

  혜소국사가 수도하던 어느날 이 근방에서 못된 짓을 일삼는 포악한 일곱악인(七惡人)이 절 아래서 쉬다가 그중 한 사람이 목이 말라 샘에 와서 물을 먹으려 하니 샘가에 놓은 바가지가 순금으로 만들어져 있음을 보고 얼른 옷속에 숨겨 가지고 왔다한다.  두번째 사람 역시 목이 말라 샘가에 가니 금 바가지가 있어 훔쳐 가지고 오고, 세번째 네번째 마지막 일곱번째 사람 모두가 순금 바가지를 훔쳐 가지고 왔다.

  그러나 나중에 각기 훔쳐가지고 온 바가지를 꺼내 보려하니 온데간데 없어 일곱 악인은 서로 이상하다는 생각끝에 바로 혜소국사가 조화를 부려 이와 같은 일이 생김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 뒤부터는 스님의 교화를 받기 시작하였다고 나중에는 이들 모두가 현인이 되었기에 이름을 칠현산(七賢山)이라고 부르고 절 이름도 칠장사(七長寺)라 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칠현인의 화현이라고 일컬어지는 나한상을 모신 나한전이 경내 뒷편 위에 자리하고 그 옆에 혜소국사비가 나란히 있다.

  보물488호인 혜소국사비(慧炤國師碑)는 현존하는 부도탑비로 가장 크고 화려한 것 중의 하나로 안성에서 출생하여 10세에 입산하고 17세에 융철사(融哲師)의 가르침을 받아 뒤에 고승으로써 많은 사람의 추앙을 받았던 그의 행적을 가리고 있다.

  혜속국사께서 생존하였을 때 가장 융성한 사세를 지녔던 칠장사에는 우왕(禑王) 9년(1383)에 왜적의 위험때문에 고려조 실록을 이곳에 보관하였다는 기록과 조선조 인조 원년에는 인목대비가 인조반정으로써 복귀 된 다음 억울하게 돌아가신 친정 아버지와 태자를 위해 이곳 가람을 원찰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지정문화재로 되어 있는 대비의 친필로 베낀[금광경최승왕경]10권 한 질과 자신의 심정을 피력한 한시를 적은 친필 족자1축이 전해 내려오고 있음은 칠장사와 인목대비의 관계를 짐작케한다.

  조선후기 범종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는 칠장사 범종은 법당 안에 있고 바로 뜰 앞에는 얼마 전 보물 988호로 지정돤 석불입상이 좌대 위에 미소를 머금고 있다. 의습선, 광배의 화염문등 세부적인 묘사로 조각되어 있는 8세기 양식의 수작 석불은 원래 죽산중. 고등학교 교정에 있던 것을 학생들의 훼손이 심하고 해서 수년전 이곳 칠장사로 모신 것이다.

  이처럼 존귀한 유물을 비롯하여 군데군데 여유로움을 간직하고 숨쉬는 자연 그대로의 여백이 있고 정갈하게 손이 많이 간 인공미가 없는 자연스러움을 간직한 칠장사에는 또 묵언 수행을 하고 계시는 금성(金性)스님이 계셔서 더욱 충만함을 느끼게 한다.

  "정화 당시의 피폐함이 몇 년전 까지만 해도 곳곳에 배어 있었습니다 .  경내 윗편에 있는 건물들은 거의 다 쓰러져가고 있었고 이 곳 저 곳에서 빗물 새는 소리가 들리고 모든 것이 엉망이었습니다.

  84년 청화(淸華)선사께서 이 곳 칠장사에서 동안거를 하시던중 많은 불사가 이루어졌습니다.  그 후로 웬만큼 복귀가 되었고, 사찰 소유의 전답과 임야도 되찾아 어느 정도 안정단계에 있습니다. "  그간의 사찰운영과 어려운 불사의 힘겨웠던 이야기를 주지 명철(冥撤)스님은 말씀하신다.

  나한기도 도량의 칠장사는 상주하시는 5명의 스님과 고시 공부하는 학생이 함께 정진하고 있다.  도심과 떨어진 곳에 위치해 신도의 발길이 적어 재정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스님의 불사계획은 끝이 없었다.

  "우선 제일 급한 불사가 기도하시러 오시는 신도님께 방사를 할 요사체의 건립입니다.  대웅전에서 조금 떨어진 뒷밭에다 불사를 하려 합니다.

  그리고 칠장사에 7개의 암자가 있어는데 그 가운데 한 곳만 지금 남아 있고 나머지는 모두 터뿐입니다.  그 곳에 선방 불사를 하려 합니다.  그래서 선 도량의 칠장사를 만들려고 합니다.  아마 묵언 수행정진을 하고 계시는 금성 스님의 묵언 후에는 대대적인 불사가 이루어지리라 생각 듭니다.  뜻있는 불자님들께서 많이 동참 기도하러 오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또한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것은 칠장사에는 300여년이 된 괘불이 2불 있습니다 .  다른 사찰의 것에 비하여 그 연대도 오래되고 여러모로 그 가치가 중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승인을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문화재 관리국에 알리고 있고.... 좋은 결과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언제든지 찾아가 편안히 쉬며 다시금 충전을 해 가는 우리의 산하.  그 한 곳에는 항시 반겨 맞이하는 자애로운 어머니 손길처럼 부처님의 온기가 머물고 있다.  칠현산에 자리하는 칠장사 역시 더하고 덜함이 없는 따스한 정감이 교체하는 곳이다.

  빛바랜 단청에서 세월의 유수함을 느끼면서도 더욱 한결함을 간직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웅전에 모셔진 본존불의 상호 때문일까.  아니면 곳곳에 스며있는 법음(法音)의 메아리때문일까.  오늘따라 싱싱한 기운이 더욱 윤기를 더하며 칠장사를 감돌고 있다.

 

*  칠장사는 경기도 안성군 이죽면 칠정리 764번지로 전화번호는(0334)72-7777이다.  서울에서는 용산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진천행버스 (매20분)을 타고 죽산에서 하차하여 다시 죽산에서 낮2시40분, 저녁 7시 두차례 칠장사까지 운행하는 버스를 이용하면 편리하다.  죽산에서는 광해원행 시외버스를 타고 칠장사 입구에서 하차하여 도보(6km)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