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 불법을 전한 외국 스님들 -신라편-

*한국 불교사[4]

2009-06-15     관리자

[1]봉불(奉佛)이전에 들어온 스님들
신라가 불교를 받들기 시작한 것은 제 23대 법흥왕(法興王)14년(527)의 일이라고 한다. 물론 그 해에 처음으로 불법이 신라 땅에 전해져 왔던 것은 아니다. 언제인지 정확한 연대는 알 수가 없으나 법흥왕 14년 보다는 상당히 오랜 이전부터 불법을 전하기 위한 스님 <法僧>들이 신라 땅에 들어왔을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및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신라에서 불교를 신봉하기 전에 전법(傳法)의 고승들이 적지않게 들어왔음을 보이고 있다. 연대순으로 본다면 제 13대 미추왕(味鄒王)2년(263)에 고구려에서 신라로 왔다는 아도(我道)스님을 비롯하여, 19대 눌지왕(訥祗王)때 왔다는 묵호자(墨胡子), 21대 비처왕(毘處王)때에 시자(侍者) 3사람을 데리고 왔다는 아도 스님, 어느 때인지 분명치 않으나 고구려의 고승 정방(正方)스님과 멸구자(滅垢疵)스님, 법흥왕 14년(527) 3월 11일에 왔다는 아도스님 등의 여섯분을 들 수가 있다.

위와 같이 여섯 스님의 이름을 들 수가 있지만 여기에는 문제가 없지 않다. 종래에는 아도의 3가지 경우 및 묵호자 스님을 모두 동일한 아도로 보려는 성향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그 연대들이 각기 다르며 전혀 동일인으로는 보기 어렵게 되어있다.
그러면서도 비슷한 사연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는 경우를 보게 됨으로써 더욱 거기에 문제점이 있음을 보게 된다. 하나하나를 각기 따로 들어서 간략하게 정리해 본 다음에 전반적인 문제점을 대강 검토해 보고자 한다.

1. 아도(我道)스님
정시년간(正始年間, 즉 240~248)에 조위(曹魏)나라의 사신으로 고구려에 왔던 아굴마(我堀摩)가 고도녕(高道寧)이라는 고구려 여인과 알게 된 뒤에 귀국하였었는데, 그로부터 임신한 고도녕 부인이 낳은 아들이 아도스님이었다.
어머니는 어린 아들 아도를 출가시켰는데 그가 16세 때에 아버지의 나라 <魏>로 가서 아버지<我堀摩>를 만나본 다음에 현창화상(玄彰和上)의 제자가 되어 공부하였다. 19세에 어머니에게로 돌아오니 그 어머니는 아들 아도에게 신라 땅으로 가서 불법을 전할 것을 권하였다. 신라의 서울 안에는 7군데의 절터가 있는데, 그 절터들은 모두가 이전 부처님<釋迦佛 以前의 迦葉佛>때의 절터로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길이 전해질 땅이라고 아도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말하였다는 것이다.

효성이 지극한 아도스님은 어머니의 분부를 따라 신라로 왔으니 그 때가 미추왕 2년(263)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대궐로 나아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펴게 해줄 것을 청하였으나, 아직 불교를 모르는 신라에서는 그의 뜻을 이해 못하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피하여 일선군(一善郡) 모례집(毛禮家)으로 가서 몸을 숨겼다. 그로부터 3년 되는 해, 왕의 공주가 병이 들어 어떠한 약을 써도 효험이 없었다. 왕은 사람을 사방에 보내여 공주의 병을 고칠 의원을 구하게 하였다. 그때 아도스님이 대궐로 가서 공주의 병을 고쳐주었다. 왕이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원하는 바를 물으니, 그는 오직 절을 지어 불교를 크게 일으켜서 국가의 복을 받드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였다.

왕의 허락을 받은 아도스님은 초가집을 지어 절로 삼고 살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펼쳤다. 그러나 미추왕이 세상을 떠나자 사람들이 해치려고 하였으므로 그는 다시 모례의 집으로 돌아가 스스로 무덤을 만들고 들어가 덮개를 닫고는 자절(自絶)하였다는 것이다. <三國遺事 권 3阿基羅條의 我道本碑인용부분>

2.묵호자(墨胡子)
눌지왕(417~458)때 묵호자라는 스님이 고구려로부터 일선군(一善郡)에 이르러, 그 고을 모례라는 사람집의 굴실(窟室)에서 숨어 살았다.

그때 양(梁, 실은 눌지왕 때에는 아직 중국의 양나라가 세워지지 않았다.) 나라의 사신이 옷가지와 향(香)같은 물건을 가지고 왔다. 신라에서는 그 향이 어디에 쓰이는 무슨 물건인지를 알 수가 없었으므로, 사람을 시켜서 나라 안에 두루 물어보게 하였다. 오직 묵호자 스님이 그것을 보고 그 이름이 향이라는 것과 불에 사르면 향기가 좋으며, 삼보(三寶)의 신성(神聖)에 발원하는 정성이 닿아서 반드시 영응(靈應)함이 있게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때 마침 공주<王女>가 병을 앓고 있어서 임금님은 묵호자로 하여금 공주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스님이 향을 사르고 발원하여 공주의 병을 낫게 하였으므로, 임금님은 기뻐하여 그 사례를 두둑하게 하였다. 묵호자 스님은 모례집으로 돌아와서 왕으로부터 받은 선물을 모두 주고는 “나는 지금 갈 곳이 있다.”하고는 어디론지 가버렸다.<三國史記 권4 法興王15년 條>

3. 아도(阿道) 스님
비처왕 (또는 焰知王이라고도 함)때 (479~500)에 아도(阿道 또는 我道)회상이 시자(侍者)3사람을 데리고 또한 모례집으로 왔는데 그 행색이 묵호자 스님과 같았다.

여러 해를 머물다가 병없이 죽고, 그 제자 3사람이 남아서 경과율<經律>을 강독(講讀)하여 더러 신봉하는 이가 있게 되었다. (위의 묵호자 스님과 같음)

4.정방(正方) 스님
다음(6)의 아도스님 이야기에서 보임

5.멸구자(滅垢疵) 스님
위의 경우와 같음.

6.아도(阿道) 스님
양나라의 대통(大通) 원년(新羅法興王 14년·527) 3월 11일에 아도스님이 일선군(一善郡)에 왔는데, 천지가 진동하였다. 그때 아도스님은 왼손에 금환석장(金環錫杖)을 짚고, 오른손으로는 옥바릿대<玉鉢應器>를 받들었으며, 몸에는 장삼<霞衲>을 입고, 입으로는 부처님 말씀<花詮>을 외웠다.

처음에 아도스님이 모례집에 이르렀을 때 모례가 나와서 보고 놀라면서 말하기를, “지난번에 고구려의 정방(正方)스님이 우리나라에 왔다가 죽음을 당하였고, 또 멸구자 스님도 고구려로부터 왔다가 역시 죽음을 당하였는데, 스님은 무엇하러 왔습니까. 빨리 대문 안으로 들어와서 이웃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하십시오.”하고는 밀실(密室)에 숨기고 공양하여 받들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마침 오(吳) 나라 (나라 이름이기 보다는 중국 남쪽의 地名으로 보아 양나라를 가리킨 것으로 보는 것이 마땅할 것임)에서 사신을 보내어 법흥왕에게 향을 바쳤는데, 임금님이 그 쓰임새를 몰라서 나라 안에 두루 묻게 하였다. 아도스님이 향의 쓰임새를 알려주었더니 왕의 사자<王使>는 스님을 데리고 서울로 가서 임금님을 만나게 하였다.

그 때 그 자리에 있던 중국의 사신이 스님을 보고는 절을 하면서, “이 변두리 나라에 어찌 큰스님<高僧>께서 불원천리 하시고 오셨습니까?” 라고 하였다.
이 일로 말미암아 법흥왕은 불법과 스님<佛僧>을 공경해야 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불교신앙을 허락하였다는 것이다.<海東高僧傳 권1 釋阿道條의 按古記>

위의 내용들을 통하여 정방과 멸구자 두 스님을 제외한 네 경우는 모두가 서로 연관성이 있음을 볼 수 가 있다. 비록 연대적으로는 상당한 거리가 있고 각기 다른 사람으로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으나 그 이야기 내용에서 상당히 비슷한 점을 볼 수가 있다.

즉 그들의 은신거점이 모두 똑같이 일선(一善)의 모례집이며, 1과 2는 공주의 병을 고쳤다는 사실이 같고, 2와 6은 향과 그 쓰임새를 알아맞히었다는 것이 같으며, 1과 3과 6의 이름을 아도(1은 我道라고만 쓰고, 3은 阿道와 我道를 같이 쓰고, 6은 阿道만으로 쓰이고 있다.) 라고 한 것 등이 서로 같기 때문이다.

묵호자는 인명(人名)이 아니고 외형의 특징을 지칭한 일종의 별명<指自之辞>으로 보고, 아도는 모두 동일인(同一人)의 이름으로 보아 고구려 소수림왕 4년(347)에 중국으로부터 고구려에 왔다는 그 아도(阿道)스님과 같은 인물로 보려는 학자도 없지 않다.

그러나 소수림왕 4년에 고구려에 왔다는 아도스님과는 전혀 별개의 인물로 보이고 있다. 미추왕 2년에 신라로 왔다는 아도스님은 아버지<我堀摩>의 성<我>과 어머니의 이름<高道寧>을 따서 아도(我道)라 이름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비처왕 때 왔다는 아도와 법흥왕 때 왔다는 아도는 그 연대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소수림왕 4년에 고구려에 왔다는 그 아도스님과는 도저히 한사람으로 볼 수가 없다. 따라서 비처왕 때와 법흥왕 때의 아도스님 역시 각각 다른 인물로 전해져 있다.

아도는 我道·阿道·我頭·我度등으로 쓰이고 있는데, 삼국유사의 고기(古記)인용 각주(脚註)에는, “그때 신라 사람들이 스님 이름을 몰랐으므로 아두삼마(阿頭三磨)라고 하였다. <時人不知僧名 而法 阿頭三磨>”라고 있다.
즉 처음에 스님이 신라에 이르렀을 때 그 이름을 몰라서 아두삼마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두삼마는 스님의 이름이 아니라 이름을 모르는(무어라 불러야 할지 모르는)스님의 혀액<外形의 特色>을 보고 그 때 신라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던 별명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 아두삼마는 당시 신라인들이 불렀던 그 발음대로가 아니고 한문글자로 그 뜻을 옮긴 것으로 볼 수가 있다.

삼국사기 등에 의하면 처음 불교가 전해졌을 당시의 신라사람들은 승려들을 가리켜 “애기 머리<童頭>에 이상한 옷<異服>을 입고 그 의론(議論)이 괴상하다.”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스님들은 머리를 깎았기 때문에 애기 머리 <童頭 또는 兒頭>라고 지칭하였던 모양이니, 阿頭 또한 兒頭와 같이 어린아이의 머리처럼 머리카락이 없는 머리라는 뜻으로 볼 수가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삼마(三摩)는 글자 그대로 ‘털이 짧다’ 즉 수염이 없다 또는 수염이 짤막하게 많지 않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므로 아두삼마는 머리를 빡빡 깎고 수염이 없는 스님들을 처음 보았던 당시 신라인들이 스님을 일컬었던 호칭으로서 ‘애기머리 몽당수염’ 또는 ‘아이머리에 수염없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다가 나중에 끝의 말이 없어지고 아두(阿頭)라고만 불려져서 아도(阿道)로 표기되었고 드디어는 아굴마와 고도녕의 아들<我道>이라는 설화에로까지 발전되기에 이르렀다고 할 수가 있겠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미루어 보아 법흥왕 때에 불교신앙을 국가적으로 신봉할 수 있게 되었을 그 이전에, 특정한 어느 한 사람이 정확한 연대를 밝힐 수 있는 해에 불법을 전하러 왔던 것이라고는 볼 수가 없고, 언젠가는 자세하지 않으나 많은 스님<傳法僧>들이 끊임없이 신라에 전법하러 왔던 것을 나타내고 있는 이야기 들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물론 묵호자, 아도(비처왕 때와 법흥왕 때 왔다는) 스님들은 모두 고구려 스님이 아닌 중국이나 서역(인도)지방의 외국 스님일 것으로 보여진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