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을 위한 불교이해]  인간 자각의 종교

현대인을 위한 불교이해

2009-06-13     관리자

 불교는 인간 이외의 일체 조물주적 권위신을 배척하고 인간의 종교를 발견 제시한다. 불교는 일체 맹목적 신앙을 거부한다. 


 인간 자각의 종교

 공자님이 탄신한 것은 예수님이 탄생하기 551년 전이고 부처님의 탄신에 대해서는 이설도 있으나 대개 BC623년이 통설인가 싶다.(금년은 불기<불멸후>2518년이다.)
 그러고 보면 불교는 세계 종교중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임에 틀림없다. 말하자면 가장 묵은 종교다. 그러나 불교가 지니는 의의는 또한 가장 새롭다. 그것은 불교가 가장 근원적인 실재에 근거하는 진리임으로 언제나 구체적 현실에 산 뜻을 공여해주기 때문이며 동시에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불교는 인간 이외의 일체 조물주적 권위신을 배척하고 인간으로서 인간의 종교를 발견한 것이기 때문이다.
 불교는 일체 맹목적 신앙을 거부한다. 맹목적인 은혜 받는 것으로 구제를 삼는 것을 배척한다. 그리하여 철저한 자각에 의한 구제의 길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는 신의 사랑이나 목마르게 구하는 식의 기도나 희망에 매달리는 종교가 아니다. 깨달음에 의하여 보아진 탄탄대로를 활발하게 나아가는 자각의 종교다. 그러기에 신이나 절대자 앞에 매어달린 구원과 기도를 단념했을 때 비로소 불교의 참된 빛은 찬란한 것을 알게 된다.
 불교는 깊은 철학을 포함한다. 그리고 일체 학술을 용납한다. 일체 문화성을 내포한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철학이나 지식으로 파악하려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불교를 철학이나 지식으로 알려 할 때 불교는 결코 잡히지 않는다. 여기서 불교학자는 있어도 불교자는 없고 불교 사상가는 있어도 신자는 없다는 말이 있게 된다. 만약 불교를 철학이나 지식으로 삼는다면 불교와는 십만 팔천리다.
 불교는 합리적 이론과 사유의 세계가 물론 있다. 그러나 참으로는 사유, 논리, 합리, 만능의 꿈이 깨어졌을 때 비로소 불교의 참된 빛은 발견 한다. 따라서 철학에서도 그 논리가 다하고 사유가 다했을 때 비로소 불교의 빛은 만나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신과 같은 절대자와 인간의 합일을 종교로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합일할 신이 없다. 그러니 불교는 그런류의 종교는 아니다. 신을 밖에 있는 것으로 보지 않고 사람 내면에 있는 내재신(內在神)의 입장을 취하여 이러한 내재신과의 합일을 불교라고 하거나 혹은 불(佛)과 사람의 합일 즉 불인합일을 불교라고 주장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교는 어디까지나 신을 거부한다. 자성(自性)의 자각이 있을 뿐이다. 합일할 신도 없다. 불과 사람이 합일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각을 통하여 스스로가 불이 되는 것이다.
 불교는 일체 세간적 자각이 부족하여 인간의 생명적 욕구를 적셔 주지 못할 때, 또는 일반 종교가 주는 깨달음이 천박하여 부족을 느낄 때, 또는 일반 학술이 주는 자각이 부족을 줄 때, 생생한 실재를 제시하는 불교는 비로소 찬란히 그 광채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상에서 자각을 강조하는 것을 보고 혹 그 자각이라는 것이 무엇을 자각한다는 것이냐 할지 모른다.
 불교의 자각은 참된 자기 본성, 인간 본성을 깨닫는 것이다.
 앞에서 법성, 진여, 불성을 말한 적이 있고 그것이 인간본유의 본성이라 말했거니와 자각이란 이 본성을 자각하는 것이다.
이 자각된 본성--불성이 근원적 실재며 인간의 진면목이다. 불멸의 진리다. 이 자각된 불성을 「한마음 헌장(憲章)」에서는 「한마음」이라 하고 자각의 내용 불성의 내용을 말하고 있거니와 불성인 본성이야말로 구극의 가치인 것이다.
 기도에 의한 구원을 배척한다는 불교에는 과연 기도가 없는가. 오늘날 불교계에 행하여지는 기도는 무엇이라는 말인가.
 그러나 이 기도는 절대자인 신에 대한 은총이나 구원의 기구가 아니다. 자성 현현을 향한 작법이요, 본성 공덕의 현발을 위한 수행이며, 자성 자각, 자성신 구현을 위한 공업이다. 불교의 기도에 대하여는 다른 기회로 미루겠다. 불교가 구국의 실재를 본분으로 삼고 이 본분 공덕의 시현이 인간 본성이라는 근본 입장에 서므로 당초부터 밖에 예속할 대상을 두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로 얻어지는 것은 본성 공덕이다. 본성 공덕이 부처님의 덕성 내용이다. 부처님의 덕성이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실로는 진리가 함장(내포)하는 절대의 자비며, 지혜며, 위력이며, 조화다.
 뿐만아니라 불교에 있어서 기도가 가지는 의미는 절대신을 상대로 하는 유의 기도와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다. 마치 사방(四方) 상하(上下)의 벽을 거울로 채워놓은 방에서 불을 켜는 것과 같이 근본적으로 자성내(自性內) 자기 분별의 성격을 가지는 것이다.

 완전한 향상을 위한 종교

 우리가 인격 향상을 한다고 할 때 우선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다. 나라를 위하여 또는 사회를 위하여 또는 조상이나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또는 훌륭한 지위를 따내기 위하여 등등 말이 나올 듯도 하지만 실로는 다 아니다. 자기 보전을 위해서다. 참된 자기, 본래의 자기를 실현하고 완전한 자기를 보전하기 위해서다. 제 모습대로 본래 자기를 나투기 위해서다. 인간이기 때문에 참으로 인간답게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수양이다. 여기에는 많은 가르침이 있다. 종교도 있다. 이 세상을 나그네 길로 돌리고 천상이나 어떤 타방 세계에 가서 신을 섬기며 바르고 착하게 살고자 하기도 하고 자비와 지혜가 두로 원만한 깨달음에 이르고자 힘쓰기도 한다. 이 모두는 인격 향상과 통한다.

 우리의 인격을 구성하는 요소에는 대개 세 가지가 있다. 지(智), 정(情), 의(意) 세 방면의 정신작용이 그것이다. 종교는 이 정신작용의 세 방면을 성숙시켜 완전한 위치에 갖다 주어야 한다. 그래야 종교가 제 1차적으로 인간의 인격 향상을 도모한다고 할만하다. 그런데 이러한 안목으로 보면 오늘의 종교가 이런 원초적인 요구를 다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어떤 종교는 인간의 지적 요구를 거부하는 것도 있다. 거의 반합리적 비이성적 교리를 들이대고 맹신을 요구해 오기도 한다. 어떤 종교는 인간의 정(情)적 요구를 아주 깔아뭉개고 그 위에 교의를 설정하고 있는 종교도 있다. 그러나 불교는 그렇지 않다.
 지(智), 정(情), 의(意), 어느 방면으로도 충분히 인류에게 만족을 준다. 불교는 인격 구성의 전 요소를 충족하는 종교다.
 오늘날 교육은 우리의 인격 구성의 중요한 부면을 담임한다. 인격보다도 지식이나 기술의 전수장으로 화한 오늘의 교육에 대하여 물론 비판은 있다. 그러나 아무리 교육이 변질된다손 치더라도 교육에서 인격이 떠날 수는 없는 것이다.
 불교는 인간의 본성을 신봉한다. 그리고 그 본성의 아름답고 지혜스럽고 용기 있는 창조성을 신앙한다. 그래서 불교적 인격 도야는 이러한 본성이 갖는 여러 덕성의 완전 개현, 인격화, 인격에의 실현을 기도 한다.   그러므로 불교 수행은 바로 인간 교육이며 인격도야며 인간의 지혜와 역량의 개발이다. 마땅히 교육의 진수는 불교에서 구하여야 하며 인격의 완전한 성취도 불교에서 구하여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종교의 교육적 접근을 기(忌)하는 사람 가운데는 불교를 포함한 종교 일반이 가진 미신적 경향을 든다. 옳은 말이다. 교육에의 미신의 접근은 엄히 경계하여야 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불교는 철저한 자각의 종교다. 자각적 인간 회복의 종교며, 구속 한계 상황에서의 인간 해방의 종교며, 인간 본성 즉 불성이 가지는 인간의 무한 자유와 무한 덕성 실현의 종교다. 혹 이해할 수 없는 신비적 요소가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그러나 그는 불교가 개현한 세계에 대한 파악이 미진하기 때문이다. 불교는 교리이거나 추상이거나 가설이 아니라 사실에 대한 가르침이며 그에 대한 충실한 기술이다. 불교는 깨달음, 지혜를 생명으로 한다. 미신이란 생각할 수 없다.
 대개 기도는 미신에 뿌리를 제공하기가 일쑤다. 그것은 신에 대한 창조주적 주재신적 혹은 죄 복을 판단하여 상벌 길흉을 내리는 사법신(司法神)적 권위를 인정하고는 그의 은혜나 작업에 의하여 현실이나 운명의 개혁을 시도하는 심리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다시 신과 인간과의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불교에는 인간에 대립하는 인격신은 없는 것이므로 의론의 여지가 없다.

 불교에서 진리라고 하는 것

 본란은 종종 불교에 대하여 「진리」니 「근원적 실재」니 하는 말을 써왔다. 이에 대하여 혹자는 이해하기를 「우주의 본체」니 또는 「구극의 존재」또는 「물질」로 이해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는 않다. 이것은 부처님의 참 인격(人格), 부처님의 참 성품, 즉 법신을 두고 말한 것이다. 법신에 대하여는 이미 말 한 바와 같이 우리가 인식 평가를 가할 수 없는 것이지만 아무튼 부처님의 참 몸인 법신이 우리 생명의 근원이다. 말하자면 우리의 참생명은 법신진리의 표현인 것이다.
 그리고 일체 부처님도 법신을 떠나 존재하지 않는다. 부처님은 일체가 법신인 것이다. 그래서 일체 부처님은 한 몸이다. 과거불, 현재불, 미래불이 따로 있는 듯 하지만 실로는 오직 한 부처님 즉「석가모니불」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두 부처님이 없다 한다.
 이와 같은 부처님의 진리를 「진리」라 하고 이와 같은 법신인 부처님을 「근원적 실재」라고도 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법의 표현으로서의 법신과 법의 인격적 구현으로서의 보신불(報身佛)에 대하여는 깊은 이해가 있어야 한다. 삼신(三身)이면서 일신(一身)일 뿐인 「석가모니」부처님에게서 구원불멸(久遠不滅)의 실재적 진리성과 완성자로서의 뜨겁게 자비스러운 인간성과 자재 무애하신 지혜의 운용을 보아야 하겠기 때문이다.
 종래 불교를 비난하는 사람중에는 「석가모니불도 사람인데, 신이 창조 했는데 사람을 신앙한다는 것은 소용없다. 우리는 신을 믿는다.」하는 것을 보았다. 이들이 아는 신이란 초재신(超在神)이요 별격신(別格神)이다. 별격으로 있거나 초월해 있다면 그 신은 작은 신이다. 실로는 신이 아니다. 중생의 한 형태다. 그런 신은 없다. 그래서 오늘날 「죽은 신」으로 낙인찍힐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또는 「자기와 함께 있다」한다면 그도 신은 아니다. 자기가 신이거나 신이 자기이거나 아니면 따로따로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이와 같이 진리이신 인간이고 깨친 인간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우리」라 칭한다.
 우리와 같은 인격을 지니신다. 그리고 인격으로 대진리라는 자각을 이루셨다. 그리하여 자각신이시고 진리신이신 인간이다. 인간 밖에, 우주 밖에 따로 있는 별재신이거나 조물주가 아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인간의 길을 가리키신다. 부처님은 참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표준

 범부 인간의 세계라는 것은 물질주의에 의해서 인식되고 개척되고 가치 지워진 세계다. 인간은 그 인식 구조상 참된 실상(實相)을 보지 못한다. 인식은 극히 부분적이고 환상적이며, 인식의 평가도 잘못된 견해의 염료로 물드린 판단이다. 도대체 인간이 갖는 인식 자체가 전도견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있는 것은 물질이다. 감각이다. 부분적이며 변화 과정에 있는 현상 뿐이다.
 이런 물질론적 입장에선 인간 척도는 어쩔 수 없이 일반적 범부 인간이 그 표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불교에선 인간 세계는 최고 최상의 각자(覺者)인 부처님을 표준으로 한다. 그래서 부처님을 진인(眞人), 완인(完人)이라 보고 구극 최상의 이상이며 동시에 표적으로 삼는다. 그래서 부처님은 인간성을 무한으로 확대한 구극에 이른 대각자이며 범부가 측량할 수 없는 절대적 초월성을 갖추신 자재자이다.
 이에 더할 인간 세계를 생각 할 수 없고 이에 더한 인간성의 완성을 생각할 수 없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보면 물질적 견해에서 발견한 인간 세계란 극히 부족한 것이며 인간 또한 미완성이다. 아무리 덕성을 도야했다 하더라도 물질견을 탈피하지 못하였으면 그는 미각적(味覺的) 존재다.
「부처님은 이미 이룬 사람이며 사람은 아직 이루지 못한 부처님」이란 말씀은 부처님을 표준한 인간의 지향성을 보여 주는 금언(金言)이기도 하다.
 우리는 범부 인간을 표준으로 할 것인가, 대각자를 표준으로 할 것인가, 인간 세계를 표준으로 할 것인가, 각(覺)의 경계를 표준으로 할 것인가에 따라서 인간과 인간 세계의 가치는 크게 달라지는 것이다. 인간 세계는 보다 참되고 행복하게 향상하여야 하며 또한 보다 참되고 발전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 만큼 현재는 만족스럽지 않다. 인간은 이와 같은 보다 큰 가능성에의 긍정과 현실에 대한 끊임없는 부정을 통하여 희망을 가지고 앞으로 전진한다. 인간의 표준을 각에 둔다는 점에서는 이밖에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를 제시한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의 구극 이상인 각(覺)과 각(覺)의 경지는 결코 막연한 이상이 아니다. 그것은 장차 이루어질 것이 아니라 이미 현재 이루어져 있는 것이며 또한 부처님이 이미 그를 완전히 이루셨고 현재 진리대로 살아 계신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끊임없이 우리를 향하여 우리의 향상을 촉구하고 계발하며 협동한다는 점이다.
 인간이 현실을 개혁하여 이상으로 향한다는 것은 괴로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로는 그렇지 않다.
오히려 현실에의 낙착이 불안한 것이며 현실의 고정이 고통스럽다. 한걸음 한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데서 불안과 고통에서의 해방을 맞보는 것이며 이상에의 접근을 성취하는 것이며 내지 인간 본성의 실현을 전재하는 것이 된다.
 이것은 즐거움의 길이다. 각과 각의 세계를 향한 인간의 노력은 즐거움의 행이며 성공에의 진행이다.
 이와 같이 보아올 때 불교적 인간 표적은 밖에 있는 것에 도달하는 것이라기보다 자기 안에 이미 이루어져 있는 것을 개발하고 발휘하고 그의 완전한 상태와 성능을 실현하는 것이 된다 할 것이다.
 그것은 인간 현실이 미망에 근거한 것이며 미망은 실로 있는 것이 아닌 착각적 현상이며 미망적 착각이 아닌 본래의 세계가 바로 각이며 각의 세계며 부처님이며 부처님의 경계이며 우리의 본분이며 우리의 본연 세계이기 때문이다.